[문학] 지식인문학에의 ‘열린 전망'
  • 편집국 ()
  • 승인 1990.06.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론가 金炳 씨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기고 … “이념 극복할 새로운 문학 나와야”

이청주의 어떤 소설에서와 같이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이시대는 지식인들에게 가혹한 "손전등(질문)을 들이댄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 기성과 신세대 등이 뒤섞여 지금-여기의 이념적 갈등은 혼란스럽고 그 자체가 폭력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식인들의 지식인다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으며, 지식인들의 지식인됨을 또한 쉽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즈음의 격변기 소용돌이 속에서 지식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지식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최근에 나온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서 문학평론가 金炳 씨는 ‘새로운 지식인 문학을 기다리며??하는 제목 아래, 자가와 그 작품, 그리고 작품 속의 주인공을 통해 이념의 갈등이 ??그 자신이 지식인??인 작가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그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지식인 주인공을 어떻게 가치지우는가를 정밀하게 드러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평론은 특히 80년대 중반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 민족문학론·노동문학론 등이 활발하게 퍼져나가면서 소시민문학·역사허무주의 등으로 ‘폄하되었던??지식인문학에서의 ??열린 전망??을 제시하고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보수·혁신의 현실적 위상 뒤바뀌어
 이 평론의 들머리에서 50대의 대표적인 문학지식인인 필자는 80년대 초반 좌파 지식인의 ‘투쟁'에 대한 존경과, 자신의 '뒷짐진 자세'에 대한 무력감을 털어놓고 있는데, 이 부분은 그래서 이 글에 어떤 신뢰성을 준다.

 그는 80년대에 비해 “보/혁의 이념들이 현실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어느 사이 완전히 반전되었다'고 전한다. 그에 따르면 80년대에 지식인들이 '좌파로 보이는 낌새'까지 두려워했던 데 비해, 새 연대기가 열린 지금은 우파,보수,친미로 여겨지지나 않을까 신경을 스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변화를 자연스러우며 필요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좌파 대항 이념들의 형성이나 확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보다 성숙하고 세련된 논리와 내용의 억제??가 이W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덧붙이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가치의 상대주의와 태도의 포용주의의 당위성을 강조한 뒤 새로운(좌파)인식체계들이 검증 이전의 선입견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혹은 ‘유행적인 패션'으로 목소리만 큰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신/구의 인식체계들이 첨예하게 충동하는 현상들을 지양하기 위한, 그래서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능성을 그는 우리의 지식인소설들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규정화는 지신인소설은 “신/구체계의 이념들이 충돌하면서도 그 이념들의 정당성을 상대적인 시각으로 수용하고 그래서 우리(독자)  각각의 나름으로 대안을 자유로이 선택하며 그 전망을 개방적으로 열어놓는"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그런 소설은 우리에게 없다. 그는 ‘열린 전망'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새로운 지식인문학'에의 길을 탐색한다.


반공주의에 끊긴 지식인문학의 맥
 이념체제가 서로 다른 지식인들의 갈등을 그린 염상섭의 〈삼대〉를 그는 우리 지식인소설의 예외적인 수작으로 꼽는다. 30년대의 복고주의자에서 마르크시스트 행동주의자가지 등장하는 이 소설은 각기 다른 입지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이해의 시선을 주고 있으며 그들에게 깊은 이해의 시선을 주고 있으며 그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치체계의 유효성을 독자들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시대 여타의 작품들, 예컨대 염상섭의 〈만세전〉 현진건의 〈빈처〉〈술 권하는 사회〉같은 20년대 소설이나 박태원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채만식의 〈치숙〉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 그리고 李 의 작품 등 30년대 소설에 그려진 지식인의 모습은 현실적인 이념추구의 통로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의 무기력과 패배를 보여줄 뿐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잠시나마 지적 자유가 보장되면서, 지식인소설이 등장할 것인가 기대를 품게 했지만 6·25는 결국 지식인소설의 출현을 에 봉쇄하고 말았다. 극도의 반공주의 탓이었는데, 이 반공주의의 거대한 압력은 우리 지식인소설들에서 좌파 인물들을 증발시켰고 다시 패배와 수난의 지식인상을 양산하고 만다. 그는 김성한 서기원 이청준 홍성원 최인훈의 지식인소설들을 이에 포함시킨다.

 김병익씨는 80년대 소설의 다양한 성과와 그 한계를 짚으면서 90년대 지식인소설은 새지평을 내다본다. 이때의 지식인소설은 ‘90년대 한국문학의 큰 흐름'이란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겠다. 홍회담의 중편 〈깃발〉등 80년대 노동자소설을 그동안 '권위적으로'유지되어오던 지식인(작가)의 위치를 변화시킨다. 작가는 '기생적이거나 기회주의적 존재로 하대되는가'작가'독자의 권위적 관계를 무너뜨리는 창작주체론에 의해 '기층민으로의 '존재전이'를 이루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소설이 주장하는 지식인상은 패배주의적 지식인과는 달라서, 권력의 핍박 속에서도 도덕적 순결성과 그 이상주의를 공고히 하는 '운동권?학생지식인'들이다.


‘이념 금기??깨졌으나 토대 부실
 운동권적 시각의 소설들에서 김씨는 ‘당연히(운동권 지식인의) 지적 사유와 성찰'을 기대했지만 실망한다. '지식인의 비지식인적 태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증상이고 진보주의자들의 논리적 세련화를 지체 또는 억압하는 기능을 맞고 있다는, 보다 두려운 현상이 거기(운동권 학생지식인 소설에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발언은 무겁게 울린다.

 80년대 후반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기는 개혁의 의지와 기존의 금기체계들에 도전하는 몸짓을 보여주었거니와, 김씨에 의하면 전에 보기 힘든 지적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진보적 사회과학 인식체게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김씨는 李炳注의 장편 〈지리산〉과 趙廷來의 장편 〈태백산맥〉을 비교 검토하면서 ‘지식인문학의 부실한 토대'를 드러내 보여준다.

 〈지리산〉이 6·25체험 세대에 의한 작품이라면 〈태백산맥〉은 40년대작가의 추체험에 바탕한 것인데, 김씨는 이같은 차이가 소설에 나오는 지식인의 이념 성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지리산〉의 작가는 진보적 지식인과 그 이념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식민지 지식인이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 때문에 좌파이념가들을 반박한다. 반면〈태백산맥〉은 해방직후의 사회 성격을 진보적 시각에서 진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김병익씨는 〈지리산〉의 좌파적 지식인이 현실적 투쟁은 계속하지만 작중인물로 하여금 지식인다운 선택, 즉 지적 사유와 이념적 추구를 포기하게 만든 것이 이 소설을 ‘우리의 지식인 소설사의 중요한 목록'에서 제외시키게끔 했다고 아쉬워한다. 〈태백산맥〉속의 지식인들도 지식인다움과는 거리가 있음을 김씨는 지적한다.

 〈태백산맥〉은 토지에 얽힌 우리 민족의 삶에 대한 구체성, 분단문제를 보는 역사적인 시각 등 여러 미덕들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4부에 이르러 문제점이 노출된다고 김씨는 짚고 있다.

 작가가 좌파적 인물들은 하나같이 건강하게 묘사하는 데 비해 우파 인물들은 한결같이 타락한 부정적 인물로 그리고 있어, 이같은 이분법은 결국 독자의 선택의 여지를 좁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특히 ‘온당한 민족주의자'였던 김범우의 마지막 모습, 즉 이념적 태도(선택)에 있어 '매우 순진하고 비지식인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김씨는 '반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반미주의를 택하기 위해'작가가 지식인이기르 포기한 것이 아닌가 묻고 있다.

 이같은 작가의 시각과 심리상태는 자유로운 지적 사유라기보다는 상정된 결론을 강요하는,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닫혀진 이데올로기??가 될 우려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식인문학은 90년대 문학의 길트기
 김병익씨는 이청준의 〈자유의 문〉을 분석하면서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닫혀 있는 이데올로기'가 통과해야 할 '문'을 제시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광신적 집단신념'을 경계하면서 이청준이 강조하고 있는 '반성적 사유'를 거쳐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 '자유의 문'은 '문학을 포함한 지적 행위가 우리에게 들씌워진 집단적 허위의식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지향'한다. 이 허위의식은 이청준이 비판하고 있는 좌파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한세대 이상 우리를 억압해온 우파 이데올로기에도 더욱 심하게 잠재해 있을 것'이라고 김씨는 밝히고 있다.

 이제 김병익씨는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인문학'을 제안한다. 그것은 한 지식인의 수난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지식인 문학은 '좌우의 지적 체계를 검증하고 그것들의 논리적 현실적 적의성과 유효성을 검토하며 앞으로의 우리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90년대가 열리면서 우리 문학계는 탈이데올로기와 함께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작업들이 진보적 이념을 추구하는 문학과 균형을 이루며 삼투할 것이란 전망이 무성했다. 김병익씨의 새로운 지식인문학에서의 ‘권유'는 그 가능성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길트기라는 점에서 값진 모색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