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이완용이 남긴 땅 수천만평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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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 이윤형 ‘되찾기’ 연쇄 소송


권력층·토지브로커·변호사조직적동원…서울대 땅 1만평 등 재판 계류

 “이 이권에 손좀 대보시려우?” “일단 이완용 후손이 들고다닌다는 땅문서를 보여주시죠.” “그게 보통 분량이 아닌데…. 전국적으로 수천 필지가 넘어요. 문서를 쌓으면 천장에 닿을거요.”

 지난 6월 초순 서울 명동의 한 다방에서 이완용 일가의 토지브로커 김모씨와 취재진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김씨는 이완용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를 이완용 직계증손인 이윤형씨(60)에게 찾아주는 대가로 토지의 40%를 떼어받기로 약조하고 뛰어든 사람이다. 취재진이 이권을 목적으로 이완용 명의의 토지에 대해 캐묻는 것으로 착각한 그는 “알아낸 땅이 있으면 같이 손잡고 돈좀 만져보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이 취재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김씨는 태도를 싹 바꿨다.

 

“3공화국 때는 이후락·박종규가 지원”

 “캐봐야 나올 게 없을 거요. 이완용씨 증손자는 3공화국 때부터 이후락·박종규씨 같은 거물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 선에서 일을 추진했어요. 도지사·군수는 그가 일제시대 토지대장을 보자고 하면 갖다 바쳤고, 소송도 이름만 대면 대번에 알 수 있는 변호사들이 맡아주고 있소. 그걸 밝힐 수 있겠소?”

 취재 포기를 종용하던 그는 “갖고 있던 이완용씨 토지문서는 얼마 전에 증손자에게 돌려줬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을사오적 중 한명이자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이완용이 요즘 토지문제로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죽은 지 66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 석자가 주로 오르내리는 곳은 법원이 재판정에서이다. 한일합방 전후의 권세와 합방 공로로 일제로부터 많은 재화를 은사받은 이완용은 전국에 수천만평에 달하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완용의 사망으로 그 토지를 상속받은 손자 이병길은 해방 이후 서슬 퍼런 민족감정에 부딪혀 재산권 행사를 못한채 6·25때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요즘 캐나다에 이민가 살던 이병길의 아들(이완용의 직계증손) 이윤형씨가 재산상속권을 주장하며 전국 각지의 법원에 소유권 이전을 요구하는 민사 소송을 내기 시작했다. 인완용 증손의 ‘땅찾기’작업은 많은 수의 현직 변호사들과 토지 브로커들이 뛰어든 ‘이권마당’이 되고 있다. 이 마당의 한 모둥이에서 남 모르게 고민하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서울대이다.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은 지난 91년 12월,이 학교 퇴직 교수인 이기영 교수(의대)로부터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 일대 임야 2만여평을 기증받았다. 그런데 이완용의 증손 이윤형씨는 이곳이 증조부의 땅이었으니 자신에게 상속돼야 한다며 서울대학교 발전기금과 이기영 교수를 상대로 소유권반환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문제의 임야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과 바로 맞닿아 있다. 경기도 고양시청 토지과 서고에 보관된 토지대장에는 이 땅의 최초등기 내역이 ‘데정 6년(1917년)9월 29일 경성부 옥인동 이완용 査定“이라고 적혀 있다.

 1917년 9월 29일 서울 옥인동에 사는 이완용이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소유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땅은 그후 1927년 7월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에게로 소유권이 이전 되었다가 1957년 7월 6일자로 역사학자 이병도씨의 장손인 이기영 교수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소송을 제기한 이윤형씨는 이기영 교수의 소유권 취득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섰다. 상속권자인 자신이 이 땅을 판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기영 교수는 “지난 57년 이윤형씨의 모친인 이병전씨가 이 땅을 사달라고 제의해와 모친과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서울대에 기증된 이 땅은 이윤형씨의 소송 제기로 그 향방이 불투명해졌다. 서울대 최전일 기획담당관은 “이 땅을 학교 발전을 위해 쓸 생각이었는데 분쟁에 휘말렸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선의의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된다”라고 말한다.

 이완용의 증손 이윤형씨의 땅찾기 움직임은 여기저기에서 확인된다. 경기도 가???주군 도척면 유정리 일대도 그 대표적인 곳이다. 한일합방 이후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이곳의 전답과 임야를 사들였다. 유정리 주민 이종성씨(84)는 “일제 때 도척면에서 이완용의 소작을 부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이 일대 토지경영을 조선 말의 궁중 내시 안원식씨에게 맡겼다고 한다.

 

승소판결로 수십억대 땅 되찾아

 

 그러나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전답은 대부분 소작을 부치던 현지 주민에게 분배되고 임얀만 남았다. 지난해 이윤형씨는 이곳 땅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했다. 유정리 뒷산 10만여㎡와 대지 4천5백여㎡를 국가가 내놓으라는 내용이었다. 이곳은 해방 이후 건설부와 광주군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군에서 식림산업을 벌여놓은 땅이다. 이윤형씨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근 저수지와 도로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유정리 627-1과 627-4번지로 3천여㎡에 이르는 땅이다. 이곳은 광주군 농지개량조합의 농사용 관개시설과 경기도 국도로 편입ㅗ디어 있다. 지난 5월 이윤형씨가 낸 소송의 내용은 이곳이 이완용때 조성된 땅이니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광주군 농지개량조합 박광호 전무는 “13년 전 정당한 방법으로 매입해 등기를 취득하고 저수지를 조성했는데 느닷없이 토지브로커 집단이 아나타 이완용 땅이니 돌려다라고 소송을 벌여 재판계류중”이라고 말했다.

 이완용 증손의 집요한 땅찾기는 실제 소유권 반환 승소판결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울시 북아현동 545·546·539번지 일대 대지 7백12평이 그런 경우이다. 이완용으로부터 모든 재산과 귀족 작위를 승계받고 일제 말 임전 보국단 ·국민총력연맹 간부로 친일의 대를 이었던 손자 이병길은 1937년 이 일대에 4천여평의 땅을 조성해 투기를 했다. 바로 그 일부가 이윤형씨 앞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곳은 시가 30억원을 웃돈다.

 지난해에는 이윤형씨가 경기도 용인군에 있는 이완용 명의의 임야 중 6백여평을 재판 끝에 차지하기도 했다. 또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여주·이천 등지의 일부 임야와 전답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반환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윤형씨의 재산상속 작업은 매우 조직적이다. 친분이 있는 전현직 고위 실력자와 변호사 그룹, 그리고 전문 토지브로커들이 각각 역할을 나눠 일을 처리해준다. 토지브로커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완용 명의의 토지와 임야 중 값나갈 만한 것을 발굴해내고 그 대가를 받는다. 변호사 그룹은 승소할 경우 토지의 30% 내지 40%를 차지한다는 조건으로 이완용 토지와 관련된 모든 소송을 도맡는다. 이 그룹에 몸담고 있는 변호사들로는 박성귀 유선호 최원식씨 등이 꼽힌다.

 

“증조부 땅 모두 상속받겠다”

 이완용의 증손 이윤형씨는 재산상속 작업이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밝혔다. 남은 일생 동안 이완용 명의의 토지 중 가능한 모든 곳을 찾아내 상속받는 일에 몰두하겠다는 ‘포부’도 숨기지 않았다.

 이같은 그의 움직임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따갑다. 무엇보다도 이완용이 일제 때 조성한 엄청난 땅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완용이 주로 땅을 늘려나간 시점은 한일합방 이후이다. 물론 구한말에 황실로부터 하사받은 땅도 있지만, 전국 구석구석의 토지대장에 그의 이름을 새겨넣은 때는 그가 합방 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던 1910~1926년 까지의 시점이다. 특히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해 토지조사 사업과 임야조사 사업이 집중적으로 펼쳐짐으로써 많은 땅이 국유지로 변했고, 그 국유지가 이완용 등의 ‘합방공신’들에게 대거 불하되었다.

 이완용이 언제 어떻게 수천만평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전모가 드러난 자료는 없다. 그러나 이완용이 사망한 지 3년 후인 1929년 발간된 그의 추모집(회고록) 《一堂記事》에는 드문드문 땅을 조성한 경위에 관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몇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대정원년(1911년) 7월 11일 후작은 경기도 농사장려회장으로 선출됐다. 경기도 내 50정보 이상을 소유한 주민을 소집한 내무부 장관과 농상공부 장관, 도장관(도지사)은 그 관리인으로 백작 이완용을 회장으로, 자작 조중응·자작 송병준을 부회장으로 선정하다.”

 “대정3년(1914년) 6월 25일 후작은 작년에 정주지방에 있는 국유지 개간을 청원했는데 그 허가를 얻기 위해 정주로 시찰을 떠나다.”

 “대정4년 후3작 58세:6월 10일 경상북도 문경군 봉암면 일대 토지를 청주 사람 유영덕의 소개로 매입히다. 이곳은 후작의 선조 도암공이 일찍이 강연하신 지역이다.”

 “대정5년 후작 59세: 6월 15일 식림업을 위해 전남 진도군 소재 산림의 불하를 청원한 것이 허가가 나 현지를 시찰하다.”

 “대정9년 후작 63세: 7월 29일 영응군을 시찰하다. 전부터 미국인 骨?安이라는 자가 금광을 발견, 사금을 채굴하지만 채굴이 끝나면 평지가 되므로 이곳을 얻기 위해 시찰하다.”

 “대정12년 후작 66세: 1월 16일 총독부 소속의 용산인쇄소를 민영화할테니 접수하라는 有吉 정무총독의 통보로 총독부를 방문하다. 조선서적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인수서류에 날인하다.”

 비록 짤막한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합방 이후 이완용이 일제의 보호 아래 얼마나 재산증식에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一堂記事》에는 이밖에도 이완용이 서울 옥인동 19번지 3천여평을 매입해 저택을 지은 사실과 만주지역 개간권을 확보한 내용도 들어 있다.

 

이완용 후손의 ‘재산찾기’가 주는 의미

 1926년 이완용 사망 이후 모든 재산과 후작 작위는 그의 손자 이병길에게 상속되었다. 이병길은 물려받은 재산을 이용해 서울에서는 땅투기를, 지방에서는 목탄생산 사업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병길과 8촌 사이인 이병주 교수(동국대·국문학)는 당시 사정을 이렇게 말했다.

 “병길씨는 1940년경부터 친구들과 목탄사업에 손을 댔다. 당시에는 목탄이 중요한 연료였으므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국 각지의 임야를 산판한 것이다.”

 해방 이후 이병길은 친일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그러나 친일세력이 여전히 득세하던 해방정국 속에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나온 그는, 그 많은 재산을 국유화하자는 민족의 요구가 드높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전쟁 후 적산 몰수 대상에서 이부분을 제외했기 때문에 이완용의 재산은 그대로 파묻혀 있었다(45쪽 참조).

 인터뷰에 응한 이윤형씨는 앞으로 이완용명의의 재산을 되찾아 이를 이완용의 명예회복과 불우이웃돕기 등 ‘뜻있는’일을 하는 재단의 설립에 쓰겠다고 밝혔다. 경술국치 82년, 그리고 그날의 주역 이완용이 사망한 지 57년이 지난 올 여름, 명예회복으로 이어나가겠다는 이완용 후손의 재산찾기가 가리키는 우리 민족의 좌표는 어디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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