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비벌리힐스 포철 사원 주택단지
  • 포항·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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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해진’ 직원들 노조 탈퇴… 시민 시샘 받아



 포항 시민들은 포항제철(이하 포철) 직원을 가리켜 ‘노랑 병아리’라고 부른다. 쇳물을 상징하는 노란 출퇴근 제복에서 연유한 이 별명은 포항에서는 각별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서울에 강남과 강북이라는 뚜렷한 선이 있다면, 포항에는 포철 직원과 포철 직원이 아닌 사람 간에 격차가 있다. 한마디로 ‘노랑 병아리’는 포항시민의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말이다.

 86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바로 포철에 입사한 차윤환씨(26·제강부)는 올 7월1일 입주금 2백만원을 내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10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그의 연봉은 약1천 3백만원이므로 매달 임대료 2만7천3백원·관리비 3만8천원을 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장래 꿈이 32p●聖인 차씨는 지난해말 노조에서 자진 탈퇴했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아도 먹고 살 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서히 포철맨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출근길에 오른 노동자들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모습을 ‘포항의 아침’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포철 홍보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몇 년 전 한 일간지 사진기자가 ‘자전거 출근 장면’을 찍으러 왔다가 발길을 돌린 일화가 전설처럼 입에 오르내린다. 포철 직원들의 출근 수단은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그리고 이제는 자가용으로 변화했다.

 현재 포철 직원 1만2천9백명(광양 제외) 중에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전체의 47.7%인 6천1백61명, 두 사람에 한 대 꼴이다. 드넓은 터를 자랑하는 포철이지만 주차능력이 모자라 승용차 3부제를 실시할 정도이다. 그것도 얼마전까지 2부제를 강행하다 직원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완화한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나오지 못할 때 직원들은 회사에서 출퇴근용으로 제공하는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자동차가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포항시민 중에 ‘포철 직원은 살 만하다’는 데에 토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근로자 반수가 자가용족

 포철 직원은 집 걱정을 하지 않는다. 포철측은 98년도까지 사원주택 보급률을 95%로 끌어올릴 예정이다. 직원들은 이를 ‘실현 가능한 약속’으로 받아들인다. 여지껏 포철의 복지정책이 그래왔다. 92년 7월 현재 포항시에만 효자동에 2천9백31세대, 인덕동에 2천9백87세대, 상도동에 4백54세대, 전체 5천18세대가 사원 주택단지에 입주에 있고 광양에도 5천7백36세대가 입주해 있다. 포철은 이안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춰놓았다.

 그중에서도 역사가 20년이 넘는 효자동 주택단지는 ‘포항의 비벌리힐스’로 불린다. 61만평 부지에서 녹지가 51%를 차지하는 효자동은 포철 직원들의 표현을 빌리면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안락한 휴양지”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곳을 둘러보고 “이상향에 온 것 같다”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포철 홍보실은 이 말을 빠뜨리지 않고 자랑한다. “부족한 게 있다면 교회와 절이 없어 교인들이 일요일마다 시내로 나가야 하는 것”뿐이다.

 대지 57평에 건평 20평짜리 단독 주택을 분양받은 손호근씨(49·주택관리)는 내년까지 매달 8천7백원을 내면 집을 완전히 소유하게 된다. 20년 전에 다달이 8천7백원을 붓는 것은 큰 부담이었지만, 이제는 푼돈이다. “남 부러울 게 없습니다. 가끔 외부에 사는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은근히 샘을 내곤 합니다.” 손씨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밤에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잘 수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이 스스로 경비대를 조직해 지키기 때문이다.

 포철의 사원주택 단지가 다 그렇듯이 효자동도 외부인에 대해 철저히 배타적이다. 이곳은 돈이 있어도 입주 할 수 없다. 부동산 거래는 오직 포철 직원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제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포항 시민들이 “자기네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산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포철 직원들은 은근한 자부심으로 느낀다.

 그만큼 효자동 주택단지는 완벽에 가깝다. 주택 교육 보건 의료 문화 체육 오락 쇼핑 등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이 안에 있다. 특히 교육시설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고등학교부터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는 단지내 거주자 자녀만 입학할 수 있다. 만약 회사측에서 장의업만 한다면, 포철이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글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된다. 효자동 주택단지 안에있는 시설만 대충 훑어봐도 △영화 연극 연주회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효자음악 당 △회비 1만4천원에 온가족이 1년간 이용하는 실내수영장 △진료소 전시관 볼링장 당구장 목욕탕 쇼핑센터가 함께 들어있는 효자종합복지회관 △축구전용구장 테니스코트 배구장 농구장 헬스클럽에 미니 골프장까지 갖춘 각종 체육시설이 있다.

 이런 모든 시설은 오직 포철 직원만을 위한 것이다. 홍보실 직원 하재룡씨는 “효자동안에 포철 소유가 아닌 게 있다면 소방서와 경찰서”라고 말한다. 주택 소유 여부에 따라 의식 자체가 달라지는 우리나라에서, 집 걱정도 없이 생활의 여유를 누리는 포철 직원들은 일반 포항 시민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다. 현대사회연구소 박준식 박사는 효자동 주택단지에 대해 “노동자 생활세계의 전체를 회사가 전략적으로 통합한 곳이다. 일단 박태준의 기획과 전략은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1만9천명이던 노조원 49명 남아

 지난 3.24 총선 결과는 포철 직원들의 의식을 잘 보여준다. 무소속 허화평 후보가 6만9천3백95표를 얻어 5만9천7백64표를 얻은 민자당 이진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효자동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효자동 투표수 2천5백55표중 이진우 후보가 1천8백58표, 허화평 후보가 3백22표를 얻어 민자당 지지율이 무려 72%를 넘었다. 이처럼 포항 내에 포철 직원과 직원이 아닌 사람과의 정치적 성향도 뚜렷이 구분된다. 그래서 포항 시민이 포철 직원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효자동 주민들의 가장 큰 불편은 “택시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효자동이 포항시 외곽에 있어 미터요금만 받고 태워줄 수 없다는 택시기사의 횡포 뿐만 아니라, 포항 시민의 ‘노랑 병아리’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시기심이 작용하는 것 같다. 평생을 보장받게 된 포철 직원은 하찮은 불편에도 불만을 털어놓는 중산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몸뚱이가 재산이 노동자로서” 그들의 전투성은 사라졌다. 한때 조합원 수만 2만3천9백70명(포항만 1만9천여명)을 자랑하며 대기업 노동운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포철노조는 사실상 와해됐다. 92년 7월 현재 조합원은 47명, 그나마 집행부도 해체되고 노조 전임도 없다. 회사측의 집요한 와해공작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기업 노동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마다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 사람이 현실적으로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더 많다.

 물론 포철 직원이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급여는 대기업 노동자의 평균수준을 크게 넘지 않으며 사원 아파트 평수도 국민주택 규모에 못미친다. 그러나 생은 매우 쾌적하다. 효자동은 지금 노동운동의 전략적 자원을 기업에서 선점한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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