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인민군 부총참모장 李相朝씨
  • 편집국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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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상호 승인이 필요"

전조선의용군 제3지대장, 인민군 중장(부총참모장), 조선정전위원회 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 수석위원, 소련대사.

 이것은 李相朝씨가 기자에게 내민 명함에 적혀 있는 경력사항이다. 이상조. 1915년 3월15일생. 주소는 소련 백러시아 민스크市.

 《시사저널》과 MBC 공동후원으로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이 주최한 ‘한국전쟁 발발 40주년기념 참가자국제회의' 참석차 6 25 이후 두번째 서울에 온 이상조. 전쟁 당시 김일성 휘하에서 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지낸 그가 지금은 김일성이가, 김일성이는' 하면서 김일성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6 25 '전범'으로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사죄할 의향이 없느냐는 물음에는 '항일 애국자를'전범'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언성을 높인다.

 약 2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필담을 이용해 질문해야 할 만큼 그의 귀는 어두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기억력은 '초롱초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주 '남조선'이라고 했다가 '한국'으로 고쳐 말하기도 했으나 어휘는 꽤 정확했다. 인터뷰 일시 : 1990년 5월26일 오후 3시. 장소 : 본사 편집국 회의실

 먼저 이번 6·25 발발 40주년을 기념 국제회의에 참가하게 된 이유와 회의를 마친 뒤의 소감부터 말씀해주십시오.

 전쟁발발 40주년을 맞아 전쟁의 참혹성·발발 원인·동기·과정·결과 등을 재조명하는 데 시기적으로 성숙됐다는 점이 참가한 이유의 하나입니다. 40년이라면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바뀌는 세월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세대를 위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자는 의도에서 참가하게 됐습니다. 나로서는 이번 회의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케 하는 데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는 이번 회의에서나 작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나 ‘6?25는 남침??이라고 거듭 강조하셨는데 구체적 증거는 무엇입니까?


 나는 남침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전쟁 개시 전에 북쪽의 주요 병력이 개성을 중심으로 집중돼 있었습니다. 준비가 완전히 됐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공격 날짜의 선택이 전쟁에서는 ‘패북'(패배)과 승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이겁니다. 어느 나라 군대를 막론하고 일요일에는 군인 군관들이 외박을 할 수 있고,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북쪽은 이 날을 공격일로 선택했습니다. 개전 초기에 북에서 결정적 우세를 점했고 타격을 받은 것은 남쪽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직후 쌍방은 사단급 이상의 병력으로 싸웠는데 사흘도 못돼 수도 서울이 함락됐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느쪽에서 전쟁의 불씨를 키웠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 시작 전에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만났습니다. 이것은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고, 그 내용을 보면 내 확신이 틀림없습니다.

 전쟁 당시 선생의 진정한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선생께서는 그것이 인민해방전쟁이라고 확신하셨습니까?

 그 당시에 이것이 ‘해방전쟁'인가 '침략전쟁'인가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전쟁에 참가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 군복을 입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방어해야 된다는 겁니다. 무기와 군대는 이 경우에 중립일 수 없습니다. 이쪽도 중립일 수 없고 저쪽도 중립일 수 없습니다. 군대란 무엇인가, 군대는 명령과 복종에 의해 유지될 분입니다. 군복을 입었느냐 입지 않았느냐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란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전쟁 주모자의 한 사람이고 작전계획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건 모르는 소립니다. 낙동강까지 내려갔을 때 김일성이가 나를 불러 부총참모장 겸 작전국장에 임명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상업성에서 일하고 있었지요(상업성副相). 중국에서 혁명에 참가한 후 빨리 오라고 해서 돌아왔더니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최고사령부에서 작전을 좌지우지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선생을 사실상의 6·25전범으로 규정하여 선생께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죄나 유감표명을 하지 않은 데 대해 분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한 국민에게 사죄할 의향은 없습니까?

 한국민들 가운데 나를 전범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한평생 혁명가로서 싸웠습니다. 일본군대와 싸웠습니다. 중국전선에서도 싸웠습니다. 싸우기 위해서 군대도 조직했고 지휘관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전범자로 만들려고 합니까. 누구를 위해 그게 필요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애국자를 전범자로 몰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의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이 한마디로 그치겠습니다(이 부분에서 이상조씨는 어성을 높였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고향인 동래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삼랑진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후, 1932년에 奉天으로 가서 광동군관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의 사정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내 군사경력에 대해 묻는 말인 모양인데, 문과에서 공부하던 중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만주사변), 전쟁이 일어나니까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항일전쟁에 참가하자는 그런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그쪽으로 갔던 겁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만주군관학교를 나왔다고 하는데 혹시 그 당시 만난 일이 있었습니까? 나이도 2년 차이밖에 안되는데….

 일본군의 장교로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반대쪽에서 싸웠으니까 그 사람들과 만날 기회 같은 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혁명적 군대가 돼서 ‘대위?소위?중위??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중대장이면 중대장, 대대장이면 대대장이었지요. 국가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까부터 혁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슨 혁명입니까?
 

한국의 실정이나 북쪽의 실정에서 인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민주주의를 넓혀야 합니다. 말하자면 인민이 주인인가 ‘수령'이 주인인가 하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인민이 주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자기들 맘대로 인민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용서하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롭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치적 환경, 난 그걸 위해 싸운 겁니다.

 김일성을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1964년 8월이었을 겁니다. 내가 북만주에서 군사활동을 하고 있을 때 당중앙에서 빨리 오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에서 일하게 된 직후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와 친한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서먹서먹한 관계였다고 기억됩니다.

 그의 첫인상은 어떠했습니까?

 젊다고 느꼈습니다. 문화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 나라를 움직여나갈 만한 경험이나 정치적 입안력이 그 사람에겐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 내가 잘못 본 것이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사람을 깎을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언제부터 실망을 느꼈습니까? 그에 대한 신뢰를 버린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신뢰를 없앴다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자와 신뢰를 끊었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가 축소되고 개인독재가 강화되는 것, 그것은 나와 대립되는 것입니다(이씨는 소련대사 시절이던 57년 反김일성 쿠데타 음모와 관련, 중앙당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불응, 소련에 망명했다).

김일성이 죽은 후 김정일의 권력승계는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고 보십니까?

 현재 상황으로는 그자가 들어설 것이 분명합니다. 북쪽은 세습왕조라고 하지 않습니까. 김일성이가 죽으면 아들이 들어서는 건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쯤 오래 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향후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통일은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지금 형편으로는 남북통일이 단시일내에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평화통일에 방해되는 것부터 제거해야 됩니다. 최대의 방해물이 무엇이냐 하면 그건 김일성입니다. 김일성체제를 부셔야 합니다. 남쪽에서 평화통일을 성사시키고자 한다면 미군철수가 선행돼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양측의 개념, 이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밝은 것이 되지 않고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러니까 남한에서는 북쪽에 있는 제도를 공식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고 저쪽에서도 남쪽에 대해 불만이 있더라도 현상황을 그대로 승인해주는 것, 이런 것 없이 무슨 담판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말해 남쪽에 있는 당들이 북쪽에서 정당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반공??이라는 것, 이것이 있는 한 통일을 위한 담판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미군철수가 전제되야 한단 말입니까?

내가 보기에 그것 없이는 안됩니다. 저쪽에서 동의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방과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데 유독 북한만은 변화의 바람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북한의 현체제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개방정책은 사회주의 국가에 있어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권력을 몇명의 개인이 장악하고 자신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체제, 왜 그런 것이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주인이 감독할 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없었기 때문에 독재자가 나타났고 그런 정치가 그대로 계속돼나간 겁니다. 이것을 타도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나왔는데 나는 그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 부족한 점이 있고 또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잘 될 것입니다. 이 투쟁이 아직 인민들로부터 완전히 동의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옳기 때문에 전도가 있다고 봅니다. 김일성으로서는 포탄이 옆에 떨어진 것과 같은, 충격적이고 끔찍한 소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겁입니다. 김일성이는 아시아의 차우셰스쿠 입니다. 차우셰스쿠는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고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이 누구냐 하면 바로 김일성일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실현될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가는 길은 반드시 한 길밖에 없습니다. 김일성은 세습왕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습왕조와 사회주의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세습왕조가 민주적 자본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옷을 입든 민족주의의 옷을 입든 그것은 처벌받아야 합니다. 김일성 개인독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는 손을 잡고 싶습니다.

 선생께서는 자신이 어떤 사상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 이것이 다 내 사상에서 우러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와 같은 말은 필요 없습니다.

 6·25 당시 생각하던 미·소와 오늘의 미·소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졌으리라고 보는데요.

 정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군비경쟁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군비경쟁을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위험한 길로 끌고 간다 그겁니다.

 6·25 이후, 작년 9월5일에 처음 서울에 오셨었지요? 그때 박철언장관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습니까?

 그때 그쪽에서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아주 도의적이고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지금 얘기한 것들을 다 말했습니다. 반대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이번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기 나름대로의 복잡한 사정이 있지 않습니까?

 한국과 한국민에 대해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나는 한국의 인민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이 나중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남한이 경제적으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 와서 확인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은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위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소련 같은 데서 한국의 공업이 대단히 발전했다고 하고 전망도 밝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75세가 넘으셨는데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보내겠다는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그것도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집에 아이들이 여섯이고 손자들도 있습니다. 가령 여기 온다고 한다면, 첫째 집이 문제입니다. 몇억원씩 한다고 하는데 구입이 불가능합니다. 식구들을 데리고 오면 먹여살려야 하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원고 쓰는 것뿐입니다. 그걸 가지고 생활해나갈 수 있겠는가, 아이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살려 그 방면의 직업을 얻는다면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의사인 아이도 있고, 교수인 아이도 있으니까….

 혹시 회고록을 쓸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걸 독촉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직 착수하지 않았습니다. 자료수집은 대충 끝냈습니다. 고향에도 다시 가봐야 할 것 같고….

 고향에 아직 안 가보셨습니까?

 작년에 차를 타고 휙 한번 돌아봤을 뿐입니다. 어설프게 하룻밤 자고 그냥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얼핏 봐서 뭔가 인상에 남아 있는게 없습니다. 친구들도 못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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