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후손이 재산찾기라니”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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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보도후 전화 빗발 시민들 “응징”으름장에 이씨가족 피신



 이완용의 증손자가 유산 수천만평을 되찾겠다고 나선《시사저널》148호 보도는 잠재해 있던 국민들의 민족의식에 불을 붙인 결과를 가져왔다. 기사가 보도되자 편집국에 걸려온 전화는 하루 수십통에 달했다. 많은 수의 독자는 “민족정기가 이지경에까지 이른 데 대해 절망감을 느낀다”고 호소했고 ‘의협심’에 불탄 일부 국민은 “응징하러 나서겠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8월22일 이완용의 증손부로부터 걸려온 다음과 같은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는 국민의 분노의 수위가 어디까지 다다랐는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이 밤낮으로 죽이겠다고 협박해온다. 남편은 충격으로 병원에 실려갔고 나도 보따리를 싸 집을 나왔다. 전화번호를 바꾸러 가는 길이다.《시사저널》에서도 신변을 보호해달라.”

 그는 이어 “지금도 유럽에서는 아시아가 하나로 합쳐야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완용 가문을 그 모양으로 보도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았느냐”고 나름의 역사관을 끄집어내 보도내용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완용 땅 수억평…당대 제일 부자“《거부열전》기록

 이같은 국민의 노여움과는 다리 보도내용을 ‘이권’의 정보로 생각하고 달려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자신이 이완용 명의로 남아 땅을 알고 있으니 그 후손의 연락처를 가르쳐달라는가 하면 중간에 다리를 놓아달라는 주문도 여럿 있었다. 또 골동품 수집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모씨는《시사저널》편집국에 직접 찾아와 두루말이 그림과 글씨를 펼쳐보이며 “이완용씨 작품인데 그 후손에게 팔고 싶으니 다리를 놓아달라”고 간청하다 낮을 붉히며 되돌아가기도 했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완용 후손의 재산상속 직업을 “민족정기를 짓밟은 행위”로 간주해 공분하면서 두가지 집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이완용의 재산이 얼마나 되며 지금 시점에서 가장 올바른 처리방식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직계 증손 이윤형씨가 말한 ‘수천만평’ 운운은 지나치게 막연했다. 그런데 이완용이 한일합방 전후에 조성했던 재산 규모를 수록한 자료가 있다. 지난 76년 간행된 《거부열전(巨富列傳)》제 6권에는 이완용을 당대 제일가는 재산가로 규정해놓고 있다.

 “1924년 학교비문제가 나왔을 때 경성부 학교비평의회에서 이완용의 재산을 3백만원으로 추정했는데 자세히 추적해보면 이 평가금액은 실제 재산보다 훨씬 적은 액수였다. 이완용은 한일합방을 실현하던 1910년 당시의 재산 조사로도 무려 4백만원이 넘는 조선 최대의 거부였다.”

 한일합방 무렵 이완용의 재산이 4백만원이었다는 증거는 1910년 6월24일자《대한매일신보》의 다음과 같은 보도로도 뒷받침된다.

 “총리대신 이완용씨의 재산을 모처에서 조사한 즉 4백여만원 가량이라더라.”

 그러면 이 액수를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당시 금 1돈쭝은 1월8전이었다. 지금의 금 1돈쭝은 4만5천원선. 금값으로 따지면 1910년 이완용의 4백만원 재산은 요즘 시세로 무려 1천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당시 이완용이 전국 각지에 조성한 엄청난 토지는 액수로 볼 때는 요즘의 거래가격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작다. 따라서 이완용의 토지소유 내역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것은 그의 재산 규모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거부열전》에 나타난 이완용의 토지 관련 기록이다.

 “학부대신 이완용씨가 그 令男(이항구)을 인솔하고 전라남도 목포로 떠났는데 연전부터 소작을 내준 7백석짜리 전답도 시찰한다더라.”(1907년)

 “여산·익산 등지에 있던 약 3만석 거리의 땅을 둘러싸고 윤경중과 시비를 벌이다.”(1905년)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진남포 등지에 수만원 가치 되는 地■을 堤■키 위하여 시찰중이더라.”(1910년)

 “이완용씨는 경상북도 지방에 천여석 추수하는 田庄을 사기 위하여 자기 문객 박모로 하여금 주선하는 중이더라.”(1919년)

 “이완용 백작은 전라북도 만경군에 나락 6천석 거리를 수확할 전답을 두었는데 令息 이항구씨는 기계를 가지고 만경군으로 내려가서 배수시험을 행한다더라.”(1912년)

 “백작 이완용, 자작 조종응, 남작 조의연씨는 경상남도 진주군 前坪의 3만5천정보(약 1억5백만평)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얻어 개간공사에 착수하였더라.”(1911년)

 “경기도 김포군에서 대지주의 부력을 비교하여보면 2백정보(약 60만평) 이상을 가진 사람은 김포군 사람 김주연과 경성의 이완용 2명이었다.”(1924년)

 《거부열전》은 이외에도 전북 군산, 경기도 수원·고양, 황해도 해주·곡산·천곡, 전북 진안 등 전국 곳곳에 걸쳐 이완용 명의의 땅이 엄청나게 널려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만도 무려 10여채나 되는 대저택을 지녔는가 하면 한성은행이 이완용 소유였다는 내용도 밝히고 있다. 1909년 12월22일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고 대한의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완용에게 들어온 위로금은 2만1백27원에 이르렀다니 이완용의 재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돈은 요즘으로 치면 10억원에 상당하는 액수이다.

 어쨌든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조성한 땅은 수천만평 정도가 아니라 무려 수억평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을 차지했던 논밭은 이미 소작인들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완용과 장손 이병길의 사망 이후 주인없이 방치된 임야와 대지가 전국에 무수히 널려 있고 이완용의 증손도 바로 그런 땅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해방후 일제하 매국노 및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에 관해 아무런 법적 처리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완용의 땅이라 해도 실정법상으로는 지금도 후손에게 ‘상속 가능한 땅’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뒤늦게라도 정부에서 반민족행위자의 남아 있는 부동산에 대한 특별조치법 같은 것을 만들지 않는 한 국민의 민족의식만이 이완용 후손의 떳떳치 못한 재산권행사의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을 따름이다. 어렵게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장학기금이나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사업 등에 이완용의 나라를 판 ‘대가’가 되돌려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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