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속셈은 다른 데 있다
  • 백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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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수준을 놓고 촌보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듯 팽팽하게 시작된 한일회담이 이렇다할 ‘야마??(山?핵심의 뜻) 없이 끝났다.   한 일이야 아니겠지만 어쩐지 맥이 풀린다.

 국가간의 관계란 우호라든가 협력이라든가 하는 외투를 입지만 벗겨보면 국가 이익이 첨예하게 맞부딪는 전쟁에 다름 아니라서 섣부른 감정은 금물이다. 그러나 유독 한일관계는 이런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감정이 늘 개입하는 특수한 관계다. 일제 36년의 한이 응어리져서 그런 것이라고 선량한 백성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쪽에서 과거를 묻어 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해서 정화될 그런 보통의 국가관계가 아니다.

 일본이 지금도 일제시대와 다름없이 특히 경제적으로 한일관계를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36년을 어떤 형태로든 합리화하려는 아무 아무개의 망언이 그 증거지만, 또 그런 논리를 기초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일관계를 특수하게 본 것은 일본이다.

 우리 경제가 일본경제와 특수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에서 자금을 일으키고 기술을 도입하고 부품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들여와 우리산업체제는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4마리 용은 일본의 분신에 불과
 서유기의 손오공은 강적을 만나면 털을 뽑아 분신을 만들어 적을 현옥시킨다. 한국이나 대만 홍콩 싱가폴을 언젠가부터 4마리 용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손오공(일본)과 그 분신이다. 미국이 몇 년 전부터 ‘아시아적 무역구조??라고 포괄해서 부르고 있는 일본과 이들 4개국 ??특수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우리 경제의 참모습, 따라서 우리 정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2차대전 직후 미국은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킴으로써 제품의 가격을 인하시켜서 이것을 수입하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일본과 그 분신국가의 역할분담이 미국경제의 헤게모니를 보장해줬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서 미?일?한 삼각관계가 마찰의 관계로 변질한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어쨌거나 이 한·일·미 체제 속에서 일본은 한국에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대미무역전략에 동의한 것에 불과하다. 같이 미국에 제품을 팔아서 이익을 보지 않았느냐 할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국제체제가 마련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89년말까지 한국의 대일적자누계는 5백20억달러가 넘는다. 심하게 말하면 일본이 한국 경유로 수출을 해서 5백20억달러를 벌였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이른바 일본산업의 고도화에 한국이 기여한 것이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다시 지식산업의 일본의 산업구조는 계단을 오르듯 순조롭게 이행해갔다. 일본이 새 기계를 장만해야 할 시점이 오면 어김없이 한국이나 대만이 낡은 기계를 사갔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일본의 오늘은 한국이나 대만 홍콩 싱가폴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노베이션이나 산업구조개편에 대한 사회적 저항, 정치적 저항은 다른 자본주의 선진경제에서는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같은 사회적 저항에 부딪힌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산업순환체계 때문이다.

 미·일·한국의 이 국제적 고역체계는 80년대에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세계경제의 성장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상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되듯이 일사불란했던 한·미·일의 삼각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미국과 일본은 사실상 경제전쟁상태이고 한국은 80년대 중반에 중화학공업과 가전 그리고 일부 첨단산업을 일본으로부터 ‘기술이전??받은 후 기술적으로 정체 상태이다. 일본이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경제가 부딪히고 있는 난국은 총체적으로는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한국제품은 일본제품은 물론 일본이 새로운 산업순환파트너로 기용한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에서 만든 일본제품의 협공을 받아 탈진상태다. 전통적이 대미흑자도 하반기에는 적자로 반전될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일회담이 열렸던 것이다. 정부로서는 산업구조조정협의체 같은 것을 제안해서 기술이전도 다시 시작되고 일본에 대한 적자도 좀 줄도록 일본이 수입문호를 개방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일본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다.

일본경제의 위기·정치적 난기류가 수입될까 걱정
 2조달러가 넘는 대외채권을 가지고 있고 기술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일본은 지금 나라안팎에서 위기의식이 높다. 일본으로 집중된 세계의 富는 증권시장과 부동산 가격을 턱없이 끌어올려 일본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한편 미·소가 냉전 이후체제로 전면적인 군축에 들어가면 종래 미국의 핵우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일본의 경제력과 정치·국사력간의 불균형이 노출된다. 일본이 이번 한일회담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앞으로 동북아시아정치에서 중요한 지역이 될 한반도문제에 이니셔티브를 확보함으로써 국제적인 정치영향력을 얻어보려는 의도이다.

 일본경제의 위기, 일본정치의 난기류가 세계에 민감하게 영향을 줄 것은 물론이다. 일본이 이런 위기, 이런 난기류나 수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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