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40주년과 한소 정상회담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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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6월, 때마침 盧泰愚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실로 ‘역사적'인 사건, 이것은 뒤늦게나마 6?25전쟁의 참뜻을 이해하고 실질적으로 마무리짓는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국교가 없던 두 나라 정상이 손을 잡고 새시대의 문을 여는 것이고, 소련이 한때 경쟁국인 미국의 '식민지'라고 낙인찍던 시각을 버리고 한국의 존재와 지위를 사실대로 승인한 것이다. 그 뜻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거시적으로 조명할 때 한반도 분단의 본질인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스탈린주의가 손을 들었고 자유의 이데올로기가 이기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 그리고 바로 한·소 정상간의 해후라고 말하고 싶다. 돌이켜 회고할 때 6·25전쟁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게 패권을 노리는 冷戰構造속에서 공산측이 저지른 3년간의 ‘뜨거운 전쟁??이었다.

 물리적으로 미·소 두 나라가 인류를 몇십번 말살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가지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전쟁도 베트남 전쟁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국지제한전쟁으로 그쳤을 뿐 제3차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이것은 20세기의 원자력혁명이 강대국끼리 맞붙는 전통적 전쟁수단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이데올로기 사이의 ‘傳道戰爭'은 잠시도 멎은 일이 없었고 멎을 수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두 진영 사이에는 공업화 이전의 농업사회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심리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생명력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빛 잃어
 이 두 이데올로기 사이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 그 하나는 산업사회시대에서 시장경제 체제하의 자유로운 公企業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 통제하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택할 것인가의 싸움이고, 다른 또 하나의 대립은 개인의 자유를 국가에 앞서는  上의 가치로 삼느냐 아니면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중요시 하느냐, 이 두 가치관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고르바초프 혁명이라는 지각변동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의 종말이 왔으며, 냉전구조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공산주의가 생명력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빛을 잃고 있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나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의 행동은 이미 공산주의자로 보기 어렵다. 적어도 동서 냉전을 벌이고 한국전쟁을 일으킨 그런 공산주의자와는 판이하다. '오늘날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보편적인 인가의 가치를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러한 신사고에 입각하여 소련은 시장경제체제로의  宗을 선언하고 프롤레타리아 일당독재의 미몽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참모습이라고 강변하고 있는데, 잔인한 스탈린주의 관리체제에서 자유로운 서구사회민주주의에로의 대담한 전향을 뜻하는 것이 명백하다.

 오늘날 서구사회민주주의의 기본철학은 활력 있는 시장경제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지상가치를 두는 것과 사회정의에 역점을 두어 경제활동의 자유가 파생하는 빈부격차와 사회 갈등을 조절하려는 데 있다. 고르바초프가 내세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혁명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렇다면 동서간 이데올로기 전쟁은 원이 그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傳道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전도의 수단으로써 생긴 가공할 군비경쟁의 필요성도 그만큼 사라졌다. 고르바초프의 표현대로 “軍事主義와 그 위험은 파산지경에 도달한 것이 명백하고 또한 지구는 전쟁하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남북의 민주화가 평화통일의 선행조건
 이러한 신사고의 큰 흐름이 지난해 동유럽 민주화 혁명을 촉발했고 이제 동부아시아로 서서히 轉移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르바초프는 한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불가피한 일로 인정한 것이다.

 이른바 ‘북방정책'의 가치와 공을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가 미국과의 협조 속에 한반도로 상륙하고 있다는 흐름 속에서 노 고르바초프 회담이 성립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여야겠다. 北의 金日成과 아직 만난 일이 없는 고르바초프가 김일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盧대통령과 만나 한반도 평화정착을 논의한다는 것은 김일성의 스탈린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강한 제재를 뜻하는 것이고 40년 전 6 25전쟁을 L일으킨 스탈린주의의 과오를 암암리에 시인하는 것이요,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체제"를 무너뜨리는 실질적인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며칠 전 서울을 방문중인 韓마르크스 교수(모스크바 청년대학)가 한소 정상회담 소식을 듣고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에 인식변화를 가져온 결과??라고 논평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또한 그는 '한반도의 궁극적인 평화적 통합은 남북이 모두 민주화된 바탕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정곡을 찌르는 바른 말이다. 그럴수록 남한에서의 민주화가 시급한 과제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이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인지, 민주화의 실질적 조건으로 사회적 정의가 이땅에 실현되어 민족의 화해와 단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우리 모두 살펴야겠다. 그럼으로써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사상적으로 6·25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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