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영향력 퇴조 논쟁
  • 안재동 (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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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드라마의 사이드라인" "세계 변화속의 미국지도자들 마비증세" "미국 수도의 자부심과 영향력 하강은 일시적인가 영구적인가" "미국 열등의식의 치료…" 이 표현들은 최근 미국언론에 보도된 워싱턴의 영향력 퇴조론에 관한 글의 제목들이다. 베트남전 이후 미국문명 쇠퇴논쟁은 너무 자주 있어서 이제는 진부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지성인들이나 필자의 <워싱턴 포스트> 동료들은 가끔씩 자학증세에 빠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 극치에 달한 것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폴 케네디교수의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이었다.

  최근 하버드대학의 조셉 나이 2세 교수가 위의 주장에 도전하는 미국의 지도자 역할의 부활에 관한 책 (Bound to Lead : The Changing Nature of American Power)을 쓴 것이 재미있다. 낙관론자는 이밖에도 많은데,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호에서 "미국은 아직도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수많은 숫자를 열거해서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의 특파원들도 이와 관련 여러가지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뉴스 초점이 미국 밖의 다른 곳이어서 흥이 안난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베를린, 루마니아, 하벨, 바웬사, 만델라, 북경…. 이런 식으로 電流가 다른 곳으로 흐르니까 워싱턴은 신바람이 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AP통신> 워싱턴 지국장은 워싱턴은 외국뉴스에만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한국적 유행어로 표현해서 '賣勢'가 없다고 불평한다. 또<중앙일보> 韓南圭특파원은 이렇게 말한다. “3년전 부임했을 때 한국정세에 관한 美국무부 반응은 한국서 뉴스거리였다. 지금은 국무부 논평을 송고하면 본사 데스크가 웃게끔 되었다. " 물론한국 위치의 상대적 상승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시사저널》 李錫烈특파원이나 필자도 워싱턴 뉴스를 본사에 상의하면 국제부장은 공산권 뉴스 때문에 지면이 없으니 '노 댕큐"라고 가볍게 퇴짜를 놓는다. 어쩌다 워싱턴이 이 꼴이 되어 저널리스트는 모두 모스크바 지국 파견을 지원하게 되었는가.

 

“부시가 조용하니 美수도도 조용할 수밖에”

  <위싱턴 포스트>의 한 기자는 여러 사람과 인터뷰한 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이유의 큰 부분이 부시 대통령의 외교스타일에 연유한다고 쓰고 있다. 부시는 역사를 진두지휘하는 것을 피하는 사람이다. 동유럽의 폭발적 사태에 대응하는 스타일도 그랬다. 이 때문에 영도력 부족이라고 힐난하는 언론도 있고 우유부단해서 민주주의 팽창의 호기를 놓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야당의원들도 있다. 대통령이 조용하니 워싱턴이 조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영향력이 감소된다고 미국 기자들은 떠들어대는 것이다. 레이건은 텔레비전 뉴스에 얼굴을 내미는데 급급했는데, 부시는 그와는 극히 대조적이다. 취임 첫해 레이건이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한 것은 3천4백6회였으나 부시는 2천10회뿐이니 워싱턴 언론의 불평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워싱턴포스트>는 일주일 동안 워싱턴발 텔레비전 뉴스를 계산해본 결과 부시 취임 이후 크게 줄어들고 있다고 보도한다. 워싱턴을 떠난 전직 정치인들은 워싱턴 영향력 감퇴를 늘 흥미있는 연설자료로 삼곤 한다.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2세는 워싱턴의 영향력 감소를 두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첫째는 초강대국시대는 종료되었고 대군사력이 곧 한 국가의 영항력과 일치하던 세월은 지났다는 의미이다. 과연 그럴까. 논의의 여지가 있는 명제이다. 2차대전 직후 세계역사를 미국이 요리하던 때도 있었다. 마셜플랜, 나토 창설, 공산권 봉쇄정책, 후진국 원조…. 로마와 그리스 이후 워싱턴은 세계의 수도, 우주의 총본부 행세를 했던 것이다. 둘째는 재정적 저력과 역량이 있으면서도 지금은 미국이 가난한 나라로 자처하는 시기이고, 숨은 능력을 총동원해서 세계 지도자가 되기를 꺼리는, 즉 자신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미국인의 심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논의의 여지가 많은 명제이다.

 

20여년간 엄청난 탈바꿈

  중요한 영향력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넘버 원! "이라는 주장은 개인이든 중학교 운동팀이든 한 국가든 간에 비슷한 심리상태에서 오는 것일 터이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책 《일본 넘버원 !》의 저자는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현금이 많아서 부자인 도쿄가 워싱턴을 누르고 세계역사의 지도적 중심부가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아직 동· 서양의 근세역사를 오판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 퇴조논쟁은 시기적으로 아이로니컬하다고 보는 글도 있다. 세계는 사회주의의 퇴조기에 들어갔으며, 미국의 '복합적 정치이념'(political pluralism)과 자유시장원칙은 여러나라의 동경과 모방의 대상이 되고 있는 때이다. 경제강국으로 성장한 독일과 일본도 바로 그렇게 되게끔 노력한 미국 외교정책의 성공 때문이라고 전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말하고 있다.

  영향력이 퇴조하고 있다는 워싱턴은 지난 20여년간 엄청난 탈바꿈을 조용히 해왔다. 시민들의 문화생활이 활기차게 영위되고 있으며 도시는 한결 더 국제화되었다. 맛있는 것 먹을 곳도 많아지고 구석구석 재미있는 곳도 많이 늘었다. 연방정부의 돈이 늘 흘러들어와 경기침체나 공황을 모르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미국서 시설좋고 살기좋은 도시 중 으뜸 자리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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