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남성무용수가 아쉽다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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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에 힘 불어넣는 주연급 태부족…무용계선 "전문 교육기관 필요하다" 입모아

최근에 내한했던 볼쇼이발레단의 무대에서는 남성무용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알렉산드로 베드로프에서 마크 페레토킨까지 볼쇼이발레단은 남성무용수의 보고로 불릴 정도로 위대한 남성무용수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발레계에는 주연급 남성무용수의 부족현상이 심각해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남성무용수의 숫적 증가는 있었지만 질적 도약은 미미하다는 게 무용계인사들의 지적이다.


남녀 무용수의 역할분담 중요

  87년 2월, 예수가 고난을 당하던 마지막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무용극화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남성무용수로 대거 교체되어 꾸며졌다. 73년 이화여대 부활절행사의 일환으로 시작, 13년간 연속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끌어왔던 이 무용극이 '탈 여성'을 시도한 것이다. 안무가 陸完順씨(이화여대교수)는 "더욱 동적이고 생생하게 살아나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여성무용수들의 주요배역들을 대거 남성무용수로 교체했다고 그 의도를 밝혔다. 이것은 남성무용수들의 특징적 기능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한 예이다.

  발레에서는 삶의 극적인 순간이 남녀 한 쌍의 연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발레의 핵이 '2인무(Pas do deux)'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발레는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섬세함과 힘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예술이므로 남성의 도움없이 완벽한 작품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런 만큼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발레리노의 역할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 발레공연표가 거의 매진될 정도로 발레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단순히 여성의 동반자나 보조자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독자적 춤을 보여줄 수 있는 남성무용수에 대한 기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발레리노 숫자의 절대부족은 무용계의 구조적 모순과 맞물려 우리나라 무용계의 현실을 '축소판'처럼 보여준다는 게 대부분의 무용계인사들의 지적이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중 남성무용수의 부족이 가장 심각한 곳이 바로 발레분야, 50년대 일본에서 귀국한 林聖男씨가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고 공연을 함으로써 국내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발레는 그후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무용단이 창단되면서 적은 숫자나마 남성무용수를 꾸준히 키워왔고 84년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되면서 발레니노 숫자는 약간 더 늘어났다. 현재 발레리노는 주로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등 직업발레단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국립발레단의 경우 단원 50명 중 남성이 15명이다. 주연급으로는 민병수, 김긍수, 나형만, 정형수 등. 유니버설발레단은 여성26명에 남성 21명의 규모. 그러나 유니버설의 경우 수석무용수 5명 중 남성은 박재근 단 1명뿐이다.

  뛰어난 발레리노가 부족한 원인은 전문적인 무용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무용계 전체의 지적이다. 한국발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한 임성남씨는 "발레학교가 없어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국제무대에 진출할 능력이 없다"면서 "발레는 어려서부터 훈련이 필요한 만큼 '발레학교'의 설립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볼쇼이발레단의 경우 8~9세 때부터 받는 수업에는 기능수업은 물론 무대공학, 인문과학, 철학이 포함되어 있어 발레가 수준높은 예술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기능위주 차원의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소질이 있다는 것만으로 20세가 넘어서 시작하게 되는 발레는 고전발레가 요구하는 힘있고 민첩한 연기를 소화해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한편 현재의 체제에서 국립발레의 운영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여 산하에 국립발레학교를 세워 집중적으로 발레인을 육성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안이라는 의견도 있다. 현재 국립발레단은 구심점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등 활동이 저조한 편이다. 다른 직업무용단은 이따금 해외공연을 갖는 등 활발하게 움직여왔으나 27년 전통을 지닌 국립발레단은 지금껏 해외공연실적이 없는 상태. 게다가 국내공연의 경우에도 레퍼토리를 개발, 매 작품마다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존의 작품을 다시 반복하는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발레단이 매년 똑같은 레퍼토리, 예를 들어 <호두까기인형> ,<백조의 호수>를 반복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金敬愛씨 (《춤》誌 편집장)의 공격적 발언도 바로 그 때문이다. 국립발레단은 금년에 무대에 올리기로 했던 <백조의 호수>를 볼쇼이단의 내한공연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교체하여 작년에 무대에 올렸던 <카르멘>을 다시 손질하여 재공연하는 성의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산하 6개 공연단체가 나누어 갖는 국립극장의 1년 공연 예산이 13억에 불과해 새 발레작품을 제작하기에는 '역부족'이긴 하다.


생계 위해 무용교습소 차리기도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 생계불안 등도 발레리노들이 일찌감치 무용을 단념하고 직업을 바꾸는 요인이다. 볼쇼이발레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의 발레단들은 단장과 예술감독,  트레이너가 외곽에서 발레를 지원하고 무용수들 역시 주연급, 솔리스트급, 군무급으로 체계화해 무용수들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발레단이 단장과 지도자, 무용 단원으로 구성되어 경력에 따른 호봉수로 월급이 책정될 뿐, 무용수가 미래에 대해 꿈을 키워갈 그밖의 다른 희망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촉망받던 신인 발레리노   가 적당한 배역을 받지 못한 채 일찍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으며, 그 중에는 생계를 위해 개인무용 교습소를 차리거나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용평론가 金泰源씨는 발레계 침체의 큰 요인을 외적으로는 인식의 부족을, 발레계내부적으로는 발레에 대한 '철학의 부재'로 요약한다. 발레가 고급예술이라서, 서양예술이라서 배격하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뛰어넘어 발레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지적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발레'하면 '고전'하는 식의 편협한 사고방식은 깨어지게 되고, 나아가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그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은 모던 발레도 우리의 손으로 창작하여 우리의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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