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軍政 권유했다"
  • 김동선 편집위원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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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15사단장 증언 … 매카나기 대사 제의받았으나 거절

 계엄군은 왜 4·19 당시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경무대 앞 발포 책임자는 과연 곽영주였던가. 당시6관구 소속 헌병 2개 중대가 경찰과 함께 경무대를 경비하고 있었는데, 과연 경찰들만 시위대에 발포했을까….

  4월19일 경무대 앞 발포는 오후 1시40분경 이루어졌다. 洪雌基내무장관 요청으로 李대통령이 계엄선포를 결정한 것은 2시30분경. 그러나 이미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시작됐으므로 계엄 실시 시각은 오후 1시로 소급되어 발표되었다. 그런데 양평의 15사단이 출동명령을 받은 시각은 1시50분이었다. 대통령의 계엄재가가 나기 전에 이미 계엄을 전제로 부대가 출동명령을 받은 것이다.

  15사단은 의정부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뒤 도중에 육사로 집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가다시 중랑교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사단이 중랑교에 도착한 시각은 밤10시경. 이때는 시내에서 데모대가 거의 진압되었고, 고려대에만 시민 ·학생 1천5백여명이 모여 끝까지 항쟁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었다.

  趙在美 15사단장은 출동시 부대원들에게 △절대로 민간인 집에 들어가지 말 것 △민간인들에게 절대로 음식 기타를 얻어먹지 말 것 △여하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쏘지 말 것 △명령이 있기 전에 쏘는 자는 엄벌한다는 지시를 내려놓았다. 또 송요찬 계엄사령관도 서울에진주한 15사단에 △통금해제 전 거리청소실시 완료 △탱크와 병력을 철수시켜 시민 눈 에 띄지 않도록 하고 낮에는 보초병만 남기고 일체 외출하지 말 것 등을 긴급명령으로 내려놓았다 (《4월혁명자료집》 학민사편).

  조재미 계엄군 사단장은 20일 새벽 시위대가 집결해 있던 고려대에 무장을 푼 채 부관과 특무대장만 대동하고 들어가 담판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조재미 계엄진주군 사단장의 이러한 태도에서는 시위대에 절대로 발포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엿보인다.

  이에 대해 조재미(73)씨는 "물론 우리는 국민의 군대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결국 국민들인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계엄시 진압이란 발포를 전제로 되어 있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자가 "혹시 항설처럼 미국의 조종을 받아 이승만 제거계획에 동의했기 때문에 발포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묻자, 예비역 준장인 조재미씨는 불쾌하다는 빛을 감추지 않고 "우리가 미국 조종을 받아요? 매카나기 대사가 군정을 하라는 제의를 했습니다만 송요찬씨와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 말이 당신 뜻이요 본국 뜻이요?'라고 물었더니 매카나기는 문서를 꺼내며 본국 뜻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군정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그는 '없었던 일'로 하자며 문서를 불태웠지요. 좌우지간 우리가 발포하지 않았던 것은 '국민의 군대'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송요찬씨가 쿠데타 종용을 거절했는데 그분도 문민우위정신이 강했지요"라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경무대 앞 발포사건에 대해서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던 金在春씨는 "참모장인 내가 공포탄만 지급하여 2개중대를 파견했지만 경무대에도 실탄은 있었지요. 김정렬국방장관, 이규광헌병감 등이 당시 경무대 안에 있었으니까 진실은 그분들이 잘 알 겁니다" 라며 여운을 남기는 미소와 함께 더이상의 언급은 회피했다.

  4 · 19 직후 '경무대앞 일원 발포 사건' 재판기록을 보면 군관계자는 아무도 책임추궁을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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