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민족 위한 옆으로부터의 혁명
  • 신금하 (서울대교수· 사회학)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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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부는 부정부패, 대중은 미성숙…진취적 지식인과 학생이 나서 반독재 · 반외세 외쳐

《시사저널》은 4월혁명 관계단체인 '무명회'가 주최한 '4월혁명 30주년기념토론회'(4월 11일. 프레스센터)를 후원하였다. 이 토론회의 주제발표문 <4월혁명과 오늘의 과제>를 발췌. 게재한다.

  4월 혁명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글들이 나왔고 여러가지 관점에서 그 역사적 성격과 의의에 대한 논급이 있었다. 그리고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큰 차이가 있는 해석과 평가가 가능했다.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 4월혁명은 '자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1948년 건국 때 우리사회는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헌법을 제정하여 이에 기초했다. 그러나 가치지향의 이념과 현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1950~53년의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 4 · 19를 맞을 때까지 현실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수립되었는가 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점 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 李承晩은 1952면7월 대통령 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소위 '발췌개헌안'이 라는 것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골간인 '의회'를 유린한 李承晩독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어 1956년의 대통령선거, 1958년의 민의원선거에서 계속적인부정선거를 자행했고 마침내 1960년 3월15일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제도의 골간인 의회제도와 선거제도는 자유당 독재정권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부정되었다. 국민의 기본적 자유권인 신체 ·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권은 역시 자유당 독재정권에 의해 근본적으로 침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깡패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부정되었다. 따라서 의회주의와 민주선거를 통해서 자유당 독재정권을 해체시킬 방법도 남아 있지 많게 된 것이다.

  4월혁명은 이런 상태에서 한국에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실제로 확립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참여하고 전국민이 일치하여 지지한 자유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다음으로 4월혁명은 경제적으로는 혼합경제의 경제개발계획 방법을 도입하여 자립적 국민경제를 수립 · 발전시키려고 한 민주적 민족주의 혁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들의 대학생 시절 한국경제는 1인당국민소득이 약 80달러 정도였는데 이것도 대부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경제였다. 미국의 원조는 거의 전부가 소비재 원조여서 국내 산업생산과는 관련없이 낭비적 소비성향을 조장했을 뿐이지 생산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생산시설의 빈약과 소비재 원조에의 기생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일부 재벌만 형성시켰고 광범위한 실업을 결과하여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거리에서 방황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농민들은 보릿고개에 시달렸다.

  이러한 경제상태에서 우리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아니라 혼합경제체제의 경제개발계획의 시작을 기회있을 때마다 강력히 요구했다. 자유당 정권은 이러한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경제개발계획'의 도입을 요구하는 세력은 공산당들이 아니겠느냐며 탄압을 가해왔다. 우리는 4월혁명을 통해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고 하루속히 혼합경제의 경제개발계획 방식을 도입하여 우리 자신의 생산시설을 건설하고 확충해서 미국의 원조경제에서 탈피, 자립적 국민경제를 수립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우리나라와 국민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민주적 민족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우리 4 · 19세대는 당시 崔文煥선생의 민족주의론의 영향을 심대하게 받았는데, 그는 당시 한국과 같은 후진국에서는 상층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위로부터의 혁명도 불가능하고, 대중의 미성숙으로 말미암아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불가능하며, 오직 현실의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은 진취적 지식인들과 학생들에 의한 '옆으로부터의 혁명'만이 독재와 외세의존과 침체를 타개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4월혁명은 학생들과 지식인이 선두에 서고시민들이 호응한 '옆으로부터의 혁명'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 혁명이었고, 민족주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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