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칼럼] 정치의 조갈증과 舊態
  • (본지 칼럼니스트 · 소설가)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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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를 다녀온 친지로부터 러시안 보드카 한 병을 선물로 받고 무척 기뻤다. 그리고 반가웠다. 기쁜 것은 말로만 듣던 원산지 보드카를 술에 잘 숙달된 혀로 음미한다는 뜻이요, 반갑다는 것은 러시아소설을 읽을 때마다 줄창 마주쳐야 했던 '그놈'과 마침내 實物로 대좌했다는 뜻이다. 한창 떠들썩한 소련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입맛의 일단으로 파악했대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에만 국경이 없을까보냐. 술에도 국경이 없을진대,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마시다보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될 건 없다는 심정도 조금 들었다. 그러나 기껏 보드카 한 병을 가지고 너무 요란을 떤다는 핀잔을 들을 법하다. '이해' 어쩌고 하는 것은 더 우습다. 어렸을 때 일본어 번역판으로 읽은 러시아소설을 통해 그들의 생활 가장자리를 겨우 더듬은 처지에 그건 턱도 없는 일이다.

 

미리 보드카에 취했나, 왜 그리 수선인가

 한데 가만히 생각하면 국가차원의 대소접근도 대충은 그런 수준이 아닌가를 떠올린다. 정치적 조갈증과 '한건주의'도 발견한다. 정부내에 그만한 대비와 연구가 있을 것으로 믿고 싶으면서도, 손발이 각각 노는 모양의 성급한 공다툼을 전해 듣노라면 걱정되는 대목이 많다. 누가 무어라 해도 한소교류의 첫 페이지는 한꺼번에 서론을 떼고 본론으로 들어간 느낌이며, 이 시점에서 거둔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 일행의 성과는 일단 평가하나, 아직은 불가시적인 행차 뒤의 변화를 지나치게 큰소리로 나발 부는데에 이런 의문은 단서를 두고 있다. 미리 보드카에 취했나? 왜 그리 수선이냐 이거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쪽에 대한 입력이나 노하우가 초라한 마당에 과대한 출력과 속도를 다그치는 건 문제다. 다소나마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 지적하거니와 가령 일본의 경우를 보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66년이었는데, 일본서는 1895년에 벌써 첫 번역판이 출간되었으며(역자 · 內田魯腐) 지금까지 10여명의 러시아어 전문가가 똑같은 소설을 제가끔 펴냈다. 부자가 2대에 걸쳐 러시아소설에만 매달린 집안도 있다. 《고요한 돈》의 역자 소도무라(外材史郎)와 에가와(江川卓 · 부자 모두 필명)가 그렇다. 특히 아들 에가와는《죄와 벌》연구에 집착하여, 주인공의 살인행위를 종교 · 철학적으로 묘사한 것으로만 읽으면 소설의 재미가 감소된다고 말한다. 라스콜르니코프의 풀 네임을 頭文字로 배열하면 PPP가 되고 그걸 거꾸로 뒤집으면 666이라는 숫자가 되는데, 이것은 ?示錄에서 말하는 안티 그리스도, 즉 악마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식이다.

 사소한 예를 들어 타국에 대한 한 나라의 지식의 깊이와 얕음을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분야의 '知彼'가 결국은 전체적인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고 인식했을 때, 우리는 필경 '곰'으로 비유되기도 하는 속모를 나라의 두꺼운 수족 바닥만 보고, 너무 일찍 무엇을 따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지를 저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국민들의 눈을 북으로 돌리게 한 후 지체없이 유신을 선포했던 때처럼, 안팎 속셈이 다른 '內攻遠交'책을 시도한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불행히도 그런 낌새가 차츰 노골화되어 하는 소리다.

 

'內攻遠交'의 시도라면 용서받지 못해

 정치면에서의 이와 같은 조갈증이나 舊態는 두 지역의 이번 보궐선거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대통령이 그런 일에마저 개입한 것은, 한계를 넘은 것이 아니라 너무 '낮은데로 임한' 본을 보인 셈이었다. 도덕성이나 체통은 고사하고, 좋은 의미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킨 셈이다. 그것은 누가 청와대 주인이 되든 국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믿어야 할 대통령이란 '자리'를, 市井의 흔한 '싸장'자리쯤으로 격하시킨 선례를 남긴거나 같다. 앞으로의 대통령이 지방의회 출마자에게 사죄를 종용한들 누가 그분을 나무랄 수 있으랴.

 야당 국회의원이 여당측 청년들에 의해 테러를 당한 사태는 안그래도 시세가 말이 아닌 정치의 '폭력적 裸身'을 전폭적으로 표현했다. 입만 열면 공정선거를 들먹이던 사람들의 구두선을 기억하는 건 부질없다. 싸잡아 정치에 대한 절망을 재촉하면서, 가도 가도 더했으면 더했지 나아질 줄을 모르는 선거풍토에 아찔한 무정부주의를 심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모두를 선거기피증환자로 몰 공산이 크다.

 청소년들간에 번지고 있는 '뻥이야' '황이야'의 유행어가 한층 기승을 부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는 신뢰의 끈을 싹뚝싹뚝 자르는 '말짱 헛것'의 세계를 초래하려나보다. 최근 '사랑의 전화'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뻥이야' 라는 말의 의미와 가장 가깝게 연관되는 인물로 응답자의 절반 이상(4백명 중 51.5%)이 정치인을 꼽았다는 사실은 따라서 보통 일이 아니다. 그 다음이 기업인(22.9%), 방송인(12.1%)이며, 소수나마 종교인(4.2%)도 끼었다든가.

 싫든 좋든 그래도 정치는 우리와 떨어질 수 없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데 화가 나는 것은 전자가 훨씬 많다는 현실이다. 하지만 모두 동시에 분통을 터뜨린 사실이 중요하다.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므로, 부도덕한 정치에서 돌렸던 등을 다시 돌릴 때 '역전의 희망'은 솟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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