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잠들지 않는 4 · 3의 넋
  • 제주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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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까지 금기시…문학작품 통해 알려지기 시작

제주 사람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가족 중에 4 · 3 피해자가 있다. 직계가족 중엔 없더라도 3촌, 멀어도 5촌 이내에 그때 죽은 이들이 있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제주도 인구 30만 중에서 10% 이상인 3만~4만명이 죽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사망자 수에는 이견이 많아서, 최고 8만여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근거와 추정이 있다.

 4 · 3. 올해로 마흔두돌을 맞는 이 사건이 차츰 제주도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8년 玄基榮씨의 중편 <順伊삼촌>을 비롯, 4 · 3의 참상을 다룬 문학작품이 발표되면서부터였다(작품목록 참조). 87년 6월과 대통령선거를 지나면서, 그리고 국회 광주청문회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80년대 중반까지 금기시되어 줄곧 묻혀왔던 4 · 3은 '수면 위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체험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폭동 · 반란이냐. 무장 · 민중항쟁이냐

 48년 4월3일 새벽 무장봉기로 시작된 제주 4 · 3은, 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의 7년 6개월 18일간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로 일단 윤곽지워지지만, 45년 해방부터 48년 4월에 이르기까지의 '예열기'가 있었다. 제주 출신 문인들은 4 · 3이 삼별초 항몽투쟁과 연결되며, 가까이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이어진다고 해석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리고 학문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4 · 3의 원인과 성격은 폭동, 반란, 사태, 무장항쟁, 민중항쟁 등 여러 시각에서 조명되고 있다. 경찰에서는 그 원인을 공산세력의 남로당 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김점곤교수는 "남로당의 무장투쟁 노선에 따라 제주도당부가 당조직을 전면동원한 예외적인 무장투쟁"으로 보고 있다. 한편 4 · 3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인 존 메릴(현 미 국무부 관리)은 "자연발생적이었던 대중봉기" 에서 빨치산운동의 성격을 띤 반란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상이 우익의 시각이다. 소장학자들의 윈인분석은 위의 견해들과 대립된다.

 박명림씨(고려대 정치학과 박사과정)는 이번 4월에 창간된 월간 《민족지평》에서 "4 · 3의 본질적인 대립축은 이 시대의 보편적 · 본질적 모순을 반영한 미국 · 미군정 대 남한 민중, 그리고 분단세력 때 분단반대세력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4 · 3연구로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양한권씨는 "제주도민의 역사적 경험과 해방 당시 제주에서 전개되었던 사회 · 경제적 상황 및 미군정의 대한반도정책에서 파생된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발발했다"고 주장한다.

 특별취재반을 편성, 3년간의 취재를 거쳐 89년 4월3일부터 <제주신문>에 연재됐던 '4 · 3의 증언'(이 시리즈는 <제주신문> 폐간으로 중단되었고 그 기자들은 현재 <제주도민신문>창간을 앞두고 있다)에 따르면, 48년 4원3일 이전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 직후부터 47년 2월까지의 인민위원회 주도기와 47년 3월부터 이듬해 4월3일까지의 좌익세력 검거기로 나뉜다. “당시 주민들의 지지를 받던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 단체가 아니었다"고 <제주신문> '4 · 3의 증언' 취재반장이었던 <제주도민신문> 양조훈부장은 말한다.

 48년 5월10일 남한에서는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는데 제주도에서만 유일하게 투표거부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47년 3월1일 제주시에서는 3만여명이 운집, 3 ·   1절 기념식을 갖는다. 식에 이어 일어난 군중시위 때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나면서 제주도의 민심은 흉흉해진다. 곧이어 인민위원회 주도로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부터 제주도는 '빨갱이의 섬'으로 알려지는 것과 함께 육지로부터 군경과 우익조직(서북청년단)이 증파된다. 서북청년단 등 우익조직의 횡포가 극심해지는 이같은 상황에서 제주도는 48년을 맞은 것이다.

 제주도 남로당은 48년 4월3일 새벽을 기해 제주지역의 지서와 우익인사를 공격한다. ‘4 · 3의 증언'과 고창훈교수(제주대 행정학과) 등 학자들은 기존(관변) 자료에 허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4월3일 당시의 무장대 무장 수준, 피습 지서, 사망자 수에서 차이가 나며 남로당중앙당의 지령을 받았는가의 여부에서도 관점이 다르다. 고교수는 "4 · 3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립 · 독자적 노선에 의해 결행되었다"고 주장한다.

 4 · 3은 4월28일 무장대 지도부와 군과의 평화회담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5월1일 제주시 오라리에서 '원인 모를'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시 격화된다. 그후 4 · 3은 49년 3월에 이르는 유혈기간을 거친다. 이 시기에 중산간 마을은 소개령이 내리면서 초토화되고 집단학살이 자행되면서 4 · 3 전기간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4 · 3채록집을 펴낸 작가 吳成贊씨는 "이 시기의 진압은 무모한 양민학살이었다"면서 "당시 증언을 듣다 보면 인간성 자체에 회의가 간다"고 말한다.

 조천 와흘리도 이때 피해를 입은 중산간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소개령을 전후해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토벌대로부터는 빨치산과의 내통 혐의를 받으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빨치산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았다. 이를 피해 자연동굴이나 숲으로 숨어들던 마을 주민 들은 대개 '도피자'로 몰렸는데 이들은 토별대에 체포돼 거의 몰살당한다. 물론 도피자를 둔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48년 10월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소개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이른바 '전략촌'으로 강제이주당해, 전략촌 주위로 높이 3~5m 에이르는 石城을 쌓았다. '산사람'들의 인적 · 물적 보급선을 원천 차단한 것이었다. 조천선흘리에는 지금도 그때 쌓은 석성 일부가 남아 있다. 그 석성 바로 안쪽에서 살고 있는 高성양(78)할머니는 48년 말 집앞에서 남편과 큰아들을 토벌대의 총탄에 잃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죽였다"고 말하는 고씨할머니는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현기영씨의 <순이삼촌>의 무대가 된 조천읍 북촌리도 이 무렵 4백~6백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북촌리 주민들의 집결지였던 북촌국민학교 뒷길에서 만난 金斗玉(72) 할머니는 유채꽃이 가득한 밭 너머를 가리키며 "동서와 큰딸이 이유없이 끌려가서 총살당했다"고 당시의 참상을 전해주었다. 이 시기에 죽어간 이들은 "억울한 마을 주민들뿐"이었다.

 49년 3월부터 在山者들의 귀순을 유도하는 기간을 거치면서 6 · 25 직전까지 제주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가 6 · 25가 일어나고 '예비검속'이 시작되자 다시 다수의 희생자가 나온다.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 '百祖一孫之墓'는 당시의 참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50년 음력 7월칠석날 대정 · 안덕 지역에서 예비검속된 1백30여명이 송악산 기슭에서 몰살당한다. 그러나 유족들은 군이 접근을 막는 바람에 3년간 시체를 찾으러 갈 수가 없었다. 3년 뒤 유족들이 시체를 찾았으나 신원을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그 뼈들을 1백20여구로 나눠 무덤을 만든 뒤 "어느 것이 자기의 조상인지 모르므로 후손들은 이 무덤들을 모두 자기 조상으로 받들라"는 뜻에서 '백조일손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이 비석은 세워진 지 1년만인 1961년 철거된다. 그 묘지 앞에서 만난 김희준(48 · 안덕면 사계리)씨는 "고종사촌이 끌려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김씨의 고종사촌이 그 묘지에 묻혀 있다.

 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 되면서 4 · 3은 일단락된다. 그리고 30여년이 넘게 4 · 3은 한동네에서 같은날 모셔지는 제사상 앞에서나 '조용히' 이야기되어왔고 42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정확한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한라산> 2부를 준비하고 있는 시인 이산하씨를 비롯한 작가와 소장학자들은 80년 광주를 예로 들면서 "4 · 3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4 · 3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문인들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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