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아누이 초대 주한 EC대사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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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 EC공부 필요하다"

1992년 EC통합을 앞두고 우리 기업의 EC진출과 對EC 경제협력 가능성 모색이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3월26일 주한 EC대표부 정식개관을 앞두고 질 아누이 초대EC대사를 만나 한 · EC 경제현안과 전망을 들어보았다. 아누이 대사는 한국시장이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열려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EC통합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EC의 시장개방 압력이 더욱 가중될 것임을 시사했다.

 

●최근 대사의 주요 활동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일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EC의 한국시장 진출에 관한 것과 한 · EC간의 무역관계 증진을 위한 노력이다. 그 가운데 酒類에 대한 관세인하와 지적 소유권보호를 위한 한국정부와의 접촉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포도주 · 위스키 등 주류의 가격은 높은 관세와 각종 세금 때문에 최고 세율이 적용될 경우, 수입원가보다 무려 7배가 넘게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정부에 주류수입을 막는 각종 세율을 낮추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는 지난 87년 지적 소유권 보호를 위해 법을 통과시켰지만, 이 법은 아직까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적 소유권에 대한 추가적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 약품이나 비료 등 화학제품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약품이 시장에서 팔릴 때까지는 오랜 연구와 시험 등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적 소유권은 상품도용이나 가짜상품을 만들어내는 문제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에게는 양보를 하면서 EC에게는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 소유권 보호를 보장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나 행정지침을 한국정부가 마련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 · EC간에는 문제만 존재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양국간의 현안을 해결해가면서 한 · EC는 상호 투자를 통한 산업협력을 모색해야 한다. EC는 12개국, 3억2천2백만의 소비자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이다. 이는 미국의 2억4천6백만보다 훨씬 큰 만큼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가 절실하며, 산업협력은 합작투자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환경문제를 위해 협력할 분야도 많이 있다고 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얼마전에 발표한대로,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 가는 수출국으로서(EC를 단일 국가로 보았을 때) 세계에서 중요한 플레이어이고 따라서 EC회원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각종 협상 테이블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어나가야 할 필요도 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점은, 92년 EC통합과 함께,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혁명적 상황이 한국 등 EC의 경제협력국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긴밀한 의견교환을 통해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도 통상관계 증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새화되는 EC'우려의 불식을 위한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이 미국을 특별우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對美 무역흑자 축소 노력 등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의견은?

 미국이 한국의 가장 큰 시장이고, 오랜 정치적 · 군사적 관계로 인해 미국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적할 것은 국제거래는 다자간의 것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대우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과 EC의 상호 인식의 발전은 지난해말 盧泰愚대통령의 유럽순방을 계기로 급진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에 대한 유럽에서의 이미지는 '제2의 일본'이라는 인식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경계와 감시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아직까지 유럽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이 일본제품만큼 눈에 띄지는 않는다. 막연한 경계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떠한 구체적인 실례로 나타난 것은 없는 줄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상호간의 시장개방과 덤핑문제이다.

●한국의 덤핑문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동유럽에서 들어오는 덤핑제품이 더욱 골치 아픈 문제이다.

●한국 기업가나 정부 관리들이 EC통합을 앞두고 그에 따른 법령개정 등 투자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 강하게 대두되는 점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동의한다. 내가 이곳에 부임한 뒤로 줄곧 한국 기업인들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들의 숙제를 하라"는 것이다. EC통합을 위한 각종 법령 등은 공개적이다. 제도나 법령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현지에 진출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일례로 현지조달률(local content)에 대한 오해가 많을 것으로 알고 있다. 현지조달률의 취지는 반덤핑관세를 피하려고 우회수출을 하거나 부품을 들여와 단순한 조립공정을 거쳤음에도 유럽産이라는 상표를 붙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일 뿐이다. 현재 적용되고 있는 40%의 현지조달률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유럽의 현지부품이 아닌 일본 · 대만 등 제3국의 부품을 조달해도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덤핑과 관련되지 않은 현지조달률에 대한 일반적인 규제는 사실상 없다. 특히 지난 57년 로마에서 제정된 로마백서 제58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조항에는 "회원국의 법에 의거해 역내에 설립된 회사는 회원국가의 국민과 동일한 대우을 받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조항이나 제도에 대한 인식이 이곳에서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동유럽의 개혁과 함께 統獨을 위한 양독의 구체적인 노력이 국제무대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최근 유럽의 변화와 통독의 영향은 어떻게 보는가?

 아무도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선 유럽인들은 최근의 동유럽사태를 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있기까지에는 무엇보다도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이 가장 컸고, 두번째는 공산주의에 대항한 동유럽국가 국민들의 용기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활기차고 자유스러운 서유럽의 번영이 이러한 변화를 촉발했다고 볼 수 있다. 소위 '유럽 비관주의'가 팽배했다면, 이러한 변화가 과연 가능했을지 의심스럽다. 동유럽 개혁을 촉진시키기 위해 EC회원국들은 식량원조 · 기술공여 등 다각적인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고, 헝가리 · 소련 · 동독 · 체코 · 루마니아 등은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원조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들 국가에 대해 EC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현재 진행되는 변화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통독은 주변국가들에게 여러가지 의문점을 던져주고 있다. 따라서 통일된 독일은 새로 태어나는 유럽의 테두리 안에서 정립됨으로써 주변국가들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우려를 불식시켜야만 한다.

●주변국가들이 왜 그토록 불안해 하는가?

 유럽국민들은 지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은 강하고 활기찬 국민성과 첨단기술을 가진 유럽 최대의 경제강국이다. 당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과 동침을 한다면, 그가 꿈을 꾸면서 몸을 뒤채다가 당신을 깔아뭉갤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일면 통독을환영하면서도 주변국가들의 우려는 상당히 심각하다. 따라서 통일후 독일은 유럽 안에서의 독일이 되어야지 독일주도의 유럽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겠다.

●유럽의 모든 관심이 동유럽에 집중됨으로써 동유럽의 급격한 변화가 오히려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는데?

 그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EC는 세계무역량의 20%를 차지하고 역내교역을 합하면 전세계교역량의 40%를 차지한다. 이러한 경제규모는 바로 미국 · 일본 · 한국 ·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의 경제교류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근 한국경제는 매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귀하의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한 · EC관계 전망은 무엇인가?

 국민총생산 12%의 고속성장에서 6%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6% 수준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EC는 3.5%만 경제가 성장해도 다행으로 여긴다. 한국경제는 값싼 노동력 등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에 치중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생산성 높은 기술인력을 이용해 첨단산업위주로 빠른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본다. 오래전 일본상품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것이었다. 일본시계를 갯수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근수로 살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들의 제품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성장을 해오지 않았는가. 한국도 이러한 질적 향상을 이룩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 근거로 한국은 우수한 자질을 갖춘 헌신적인 노동력이 있다. 한국만큼 문맹률이 낮은 국가도 많지 않다.

 마지막으로 한 · EC의 협력관계는 현재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계속 발전해나갈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감정을 다치지 않으면서 현안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상호 합작투자 등을 통한 기술교류 · 인적교류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우수인력의 미국유학 편중에서 탈피해 유럽지역에 대한 더욱 활발한 관심이 요망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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