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실명제 약속 정부신뢰성에 먹칠
  • 김재일 편집위원보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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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 막는다” 연기 명분에 “또다른 정경유착” 비판

금융실명제 실시와 관련해서 두 가지의 상반되는 결과를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금소유자의 실체가 파악됨으로써 지하경제의 근원이 축소되어 경제가 깨끗해진다. 즉 비실명통장을 이용한 사채거래나 부동산 투기자금, 정치자금 등 음성적 자금거래를 밝힐 수 있고 주가조작과 내부자거래가 어려워진다. 또한 금융자산 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로 현재의 공평하지 않은 조세부담을 어느 정도 고르게 해 저축의욕과 근로의욕을 북돋운다. 다른 하나는, 엄청난 규모의 비실명 자금이 금응권과 자본시장에서 나와 부동산쪽으로 몰리거나 해외로 빠져나간다. 결국 증시가 침체하고 자본시장이 붕괴, 경제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첫번째 것은 물론 금융실명제의 긍정적 효과이고 두번째 것은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를 수 있는 부작용이다. 그러나 이제 실명제의 효과와 부작용은 따질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정부여당은 원래의 계획을 바꿔 이 혁명적인 제도의 실시를 연기쪽으로 방향을 굳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실명제실시의 부작용을 어떻게 돋보이게 하여 정치적 부담과 국민에게 줄 충격을 최소화하고 내년 실시 예정이던 실명제를 다시 거둬들이느냐 하는 문제만 남은 셈이다.

 

정치환경 변화에 편승한 반대 목소리

 이에 따라 지난해 4월 재무부의 국장급을 단장으로 하여 36명으로 구성된 금융실명제 실시준비단은 해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고 직원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陳棟洙총괄과장은 “실명제와는 실제로 관계없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실시를 전제로 홍보해왔는데 다시금 그들을 상대로 해서 어떻게 번복을 납득시키느냐가 어려운 문제”라며 논리전환에 따르는 고충을 털어놨다. 또 실명제를 준비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점에 맞닥뜨려 실시시기가 적절치 못하다고 느끼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위에서 아직 큰 그림을 안 그려준 상태에서 무어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해 실시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문제점이 발견되지는 않았음을 시사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은 종합과세 실시방안과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보완대책을 이미 마련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할 시기이다. 이달부터 12월까지는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7월부터 연말까지 준비상황을 종합점검, 예행연습까지 거쳐 내년 1월부터는 실명제와 종합과세를 전면 실시하기로 계획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실명거래 관행의 진전, 높은 경제성장과 금융시장의 양적 · 질적 성장으로 인한 경제체질의 강화, 금융기관 전산화 완료 등을 들어 실명제실시의 여건이 성숙돼 있음을 홍보해왔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던 실명제는 정치환경의 변화에 편승, 증폭된 반대의 목소리에 의해 주춤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정사실화된 실시가 연기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금융실명제란 은행예금이나 주식매매 등 모든 형태의 금융거래를 자기 이름으로 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여러 종류의 소득을 모두 합산해서 그 액수의 크기에 따라 누진세율로 종합과세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은행이자나 주식매매 차액 배당 등 금융소득만은 분리과세를 하니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금융소득을 분리과세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명화가 안돼 예금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 세제상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은 최고세율 63.75%가 적용되고 은행이자 · 주식배당 등은 세율 16.75%가 고작이다.

 실명제는 87년 대통령선거시 노태우후보가 91년 실시를 공약했을 정도로 명분이 있었고 토지공개념제도와 더불어 경제정의실현을 위한 6共 개혁의지의 핵심이었다. 지난해 경제 기획원 산하 국민경제제도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는 국민의 80%가 실명제실시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조치의 성격은 순기능과 역기능이 대조되어 보이게 마련이고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부작용은 금방 눈에띈다. 이 시점에서 실명제실시의 당위성은 논쟁의 초점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실명제실시로 우리경제가 침몰할 것이냐 아니면 충격을 극복하고 더욱 굳건해질 것이냐이다. 좀더 좁히자면, 실명제가 몰고올 충격을 우리경제가 과연 감내해낼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견해는 첨예하게 대립돼 있다.

 성균관대 金泰東교수는 우리경제는 실명제실시로 인한 충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명제실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위험, 즉 부동산투기, 자금의 해외유출, 주가폭락, 성장억제, 저축의 위축 등이 이론적으로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실명제가 실시되면 사후에라도 자금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부동산투기를 억제하게 될 것이며 해외로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실명제는 예정대로 실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무려면 실명제가 지난 3년반 동안 계속된 환율절상만큼의 타격을 우리경제에 주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예상되는 부작용은 외환관리와 증권부문에 있어서의 단계적 조치 등 보완대책으로 충분히 커버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단기적 교란요인은 될 수 있으나 그 교란이 6개월 정도지 그 이상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閔丙均연구위원은 실명제가 실시될 경우 금융권에서 5조원, 증권시장에서 15조원이 빠져나가 부동산으로 전환, 상속 · 증여될 것이 확실하다고 내다본다. 그렇게 되면 증시가 침체하고 자본시장이 붕괴, 경제는 주저앉고 만다고 주장한다. 그는 "금융공황이 초래될 터인데 우리경제는 2주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장단점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한마디로 실명제실시는 이 시점에서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한다. 또 보완조치라고 하는 것이 자금이탈을 방지하는 장치인데 정부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투자자와 돈 가진 사람들이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따라서 보완조치가 실제로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경기침체를 이유로 실명제실시를 연기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실명제실시 지지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방침선회를 뒷받침하는 명분은 우리경제가 지금 좋지않다는 사실이다. 경제가 어려우면 그만큼 실명제실시로 인해 타격을 크게 입을 수 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상정할 수 있고 그래서 원래의 계획을 거둬들이기가 쉬웠다.

 한편 실명제실시의 연기가 객관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제반세력의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닌가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많다. 이와 관련, 경실련은 "실명제실시 연기방침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 익숙해온 재벌기업들의 이해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검은 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드는 것이 어렵게 될 것을 우려한 정치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실명제 연기방침의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기 전에 좀더 쉬운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3당합당이란 정치환경의 변화가 없었다면 9개월후에는 시행토록 되어 있는 실명제실시 계획이 뒤집힐 수 있었겠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실명제실시 지지론자든 반대론자든 '연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다만 반대론자들은 일단 실시하긴 하나 엄청난 혼란을 겪고 철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불과 1년전의 신문은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문희갑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금융실명제를 예정보다 앞당겨 실시할 계획임을 밝혔다. 지금은 실명제실시에 가장 강경하게 반발하고 있는 전경련까지도 <3고시대의 대응전략>이란 보고서에서 비생산부문에 자금이 몰리는 자금왜곡현상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금융실명제가 즉각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으나, 계속된 경기침체의 주범으로 차츰 금융실명제를 지목하기 시작했고 3당통합으로 세를 얻어 급기야 전세를 뒤집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 못하면 영영 불가능"

 금융실명제의 내년 실시가 연기된다면 다음에는 가능할 것인가, 또 예정대로 실시하지 않을 경우 생길 부작용은 무엇인가? 내년 실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금융자산 규모가 커지고 개방화될수록 부작용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이번에 못하면 실명제실시는 영영 불가능하며,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 자본시장이 예정대로 92년에 개방된다면 그 부작용 또한 엄청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년 실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상속 · 증여세, 종합소득세율 인하 등 보완조치를 법으로 하나하나 만든다면 돈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될 것이므로 보완책을 입법한 다음 실명제를 실시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명제 실시계획은 8년만에 또다시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 해프닝을 통해 정부는 아무리 보완조치를 설명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실명제실시 계획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버려 정부는 다시 한번 신뢰성에 스스로 먹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 계획이 현실적으로 시행하기에 무리한 것으로 판명됐다면 그것을 수정 · 변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도 없이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국민에 대한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한다면 그런 정부를 믿는 국민이 비정상이다. 실명제의 경우 국민은 가만히 있는데 정부가 먼저 들고나와 그 실시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앞장서 주장해왔으므로 꼴은 더욱 우습게 됐다. 뉴욕대 교수 마이클 토다로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어느 방향으로든지 경제적 · 사회적 발전은 한 나라의 사회 · 정치 · 경제제도에 있어서의 상응하는 변화없이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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