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들 허리 펼 날이 없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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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 우편물에 만성적 인력부족으로 '쩔쩔'…요금 二元化 등 개선책 강구돼야

서울 영동우체국 주재집배원(임시직) 徐吉平(35)씨가 배달이 지연된 우편물 5백55점을 고물상에게 팔아넘겨 경찰에 구속된 3월26일 저녁. 경력 20년의 집배원 鄭順鎬(47)씨는 물먹은 솜처럼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서자마자 텔레비전 보도를 본 중학생 아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빠, 비싼 소포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편지를 팔아먹었지." 그순간 鄧씨는 20년 집배원 생활에서 얻은 관절염과 허리 디스크와 한쪽만 심하게 비뚤어진 어깨, 박봉에도 불구하고 가졌던 최소한의 자부심까지 다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수난을 당한 것은 집배원들만이 아니다.

 전국의 우체국들은 "소중한 편지를 맡은 집배원들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시민들의 빗발치는 항의전화와 민원세례에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체신업무 종사자들은 이번 사건이 '고개를 들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우편물 홍수를 못따라가는 심각한 인력부족'에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사건을 저지른 徐씨만 하더라도 정식 집배공무원이 아니라, 폭주하는 우편물 처리에 일손이 달린 우체국측이 일당제(6천9백50원)로 임의 고용한 '주재집배원'이라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전국체신노동조합 서울청지부의 李鍾晩부지부장은 "우편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집배원은 겨우 산술급수적으로 충원되고 있어 허리가 휠지경" 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우편물의 폭증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체신부에 따르면 지난해에 취급된 우편물은, 그 전해인 88년에 비해 무려 14.2%나 늘어난 물량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국 우편물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우편물 집중지역'인 서울의 경우는 폭증현상이 더욱 심해 88년의 20억5천만여통에서 25억여통으로 20% 이상 늘어났다. 우편물 폭증의 주범은 뭐니뭐니 해도 백화점, 기업체 등이 고객유치 수단으로 이용하는 우편광고물 (DM)이다. 체신부의 한 관계자는 "실질적인 구매력을 갖고 있는 소비자만 선별해 광고물을 보낼 수 있고 경비도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지난 2~3년 사이에 DM 발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밝힌다.

 

늘어난 우편광고물이 '폭증'의 주범

 특히 대형백화점들이 한곳에 몰려 끊임없는 고객유치 경쟁을 벌이는 데다 비교적 고가품을 살 구매력을 가진 층들이 모여사는 서울 강남지역의 '우편광고 홍수'는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체신부의 '88년 우편센서스' 결과만 보더라도 서울 강남구 주민들에게 도착되는 1인당 연평균 배달건수는 1백42통으로 도봉구의 35통, 강서구의 26통, 은평구의 43통에 비해 월등히 많다.

 서울 영동우체국의 한 집배원은 "지금은 훨씬 더 심할 것"이라며 "아침에 의욕적으로 출근했다가도 산더미처럼 쌓인 광고물을 보면 '야, 오늘도 죽었구나' 하고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이 지역 백화점들이 일제히 바겐세일이라도 하는 기간이면 아파트 한 단지 수천세대에 각각 서너통씩의 광고물이 겹치기로 쏟아진다. 이번에 徐씨가 고물상에게 넘긴 우편물 5백55점 가운데서도 백화점 광고물이 2백38점, 카드 구매서가 1백50통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집배원들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것은 DM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전 세대주들에게 발부되는 의료보험 청구서, 세원 발굴로 각종 세금이 새로이 개발되면서 부쩍 종류가 많아진 세금고지서, 급격히 늘어난 신용카드 청구서, 언론자율화 이후 우후죽순격으로 쏟아져 나오는 잡지들도 우편물 폭증에 단단히 한몫을 한다.

 서울 광화문우체국의 한 집배원은 "늘어난 양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점점 부피가 커지고 무거워지는 우편물의 질 문제"라고 지적한다. 예전에는 우편물 1점당 평균무게가 20g  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최근에는 50g 정도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만큼 집배원의 배달부담도 가중된 셈이다.

 이같은 우편물 폭주에 비하면 집배원의 증원은 그야말로 '언발에 오줌누기'식으로 이루 어지고 있다. 즉 지난 88년에 1만6백47명에서 89년에 1만8백44명으로 1.8%인 1백97명이 늘어난 데 그치고 만 것이다. 서울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해, 88년의 2천9백1명에서 89년에 3천15명으로 1백14명이 늘어났을 뿐이다. 우편물 증가를 따르지 못하는 인력수급은 자연히 '업무가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집배원의 근무시간은 하루 8시간(속달 집배원의 경우는 하루 10시간), 1일 배달건수는 7백통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이런 규정은 있으나마나다. 인원부족으로 하루에 2~3천 통을 배당받는 게 예사인 데다 '그날 배당받은 우편물은 가능한 한 당일내로 처리해야 한다'는 근무수칙에 따라 우편물 배달을 완전히 끝낸 시각이 '근무종료시각'이 되기 때문이다.

 "새벽별 보고 나와 저녁별 보며 퇴근하는 게 일과"라는 집배원 경력 15년의 李成宰(38) 씨. 그는 아침 8시까지 근무지인 광화문우체국에 나와 같은 組 동료들과 함께 우편물 분류작업을 한 뒤 자기 구역의 우편물을 행낭에 차곡차곡 담는다. 헐하게 담으면 한 행낭에40~50kg 정도 들어가는데, 대개 서너개쯤 배당받게 된다. 행낭 하나는 직접 메고 나머지는 이륜차에 맡겼다가 한 행낭을 다 돌리면 중간중간 기착지점에 맡겨둔 행낭을 찾아 돌린다. 일반우편물과 함께 등기우편물 1백50통 가량을 일일이 수령자 확인 도장을 받아가면서 배달하려면 일이 끝나는 시각은 빨라야 7~8시. 그렇다고 그의 하루 일과가 끝나는건 아니다. 배달장 정리하고 등기수령증 확인까지 끝내고 나면 밤 10시를 넘기기도 한다. 그러나 李씨는 그나마 "4대문 안은 편한 셈"이라고 말한다. 우편물이 폭주하는 강남지역이나 행정구역개편으로 인구가 급증한 탓에 배달 일손이 달리는 안양, 수원, 영동, 하남, 오산, 구로, 강동, 성동, 양천지역은 체신 관계자들 사이에 '취약지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인천의 ㅂ우체국처럼 연말연시가 아닌데도 집배원들이 숙직실에서 자면서 근무하는 곳도 있다.

 

“동료들 미안해 아플 수도 없다" 

 업무과중은 직업병이라는 후유증을 낳기도 한다. 체신노조의 한 관계자는 "하루종일 걸어야 하는 격무 때문에 관절염, 허리 디스크를 호소해오는 조합원들이 많다"고 실정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집배원들 사이에선 "체부생활 10년이면 삭신이 녹아내린다"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한다. 하지만 아프다고 맘놓고 앓을 수도 없다. 다른 일손이 보충되는 게 아니라 같은 조(1조당 대개 10여명) 동료들에게 자기 일이 떠맡겨지기 때문이다. 한 집배원은 "동료가 아프다고 하면 건강 염려보다는 맡을 일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선다"고 말한다. 심지어 58세 정년퇴직 직전에 30일씩 보장되는 퇴직휴가조차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기 어렵다'고 스스로 반납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박봉에 과중한 업무, 직업병까지 겹친 만큼 집배원들의 이직률도 높아 지난 88년에 공채로 입사한 3백명의 집배공무원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편물 폭증과 이를 못따라잡는 만성적인 인력부족은 집배원들만 골병들게 하는 게 아니다. 이번 사고처럼 아예 우편물이 실종되는 일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만성적인 우편체증' 현상을 낳아 이용자들에게 불편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강남지역은 우편물소통에 10~15일씩 걸리는 대표적인 '만성체증'지역으로 손꼽힌다.

 체신부는 이런 현실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반응이다. 한 관계자는 "업무 폭주는부인하지 않는다"면서도 "집배원 증원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정부의 전체적인 공무원수급조정 정책과 연결된 것이므로 체신부로선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조심스레 밝혔다. 즉 '만년적자부서‘인 체신부가 그렇지 않아도 공무원 증원 억제방침을 고수하려는 총무처와 기획원의 방침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편물 요금을 올려서라도 인원 확보를 하자니 '체신업무의 공익성'과 '물가파급 효과'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지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체신 관계자들은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들 말한다. 상업성우편물과 일반우편물의 요금을 二元化해서, 상업성 우편물은 '수익자부담원칙'을 적용해 비싼 요금을 물리는 요금조정방식을 택하는 것도 한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렇게되면 헌법상의 '통신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상업성 우편물의 지나친 범람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고, 늘어난 수입으로 집배원을 증원해 '우편체증' 현상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당국은 예산타령만 할 게 아니라 "날이 갈수록 여건이 나아지기는 커녕 어깨가 더 무거워진다"는 집배원들의 고충을 해소하고 우편의 흐름도 원할하게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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