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蘇수교 '부푼꿈‘환상은 금물
  • 하창섭 기자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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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泳三 소련방문 '다리놓기' 성과 …경제협력 앞세우는 소련 의도 잘 읽어야

공로다툼 · 사대주의적 행동 노출 등 아쉬움 커 …상대에 허점 보여선 안돼

 소련과의 대사급 수교가 연내로 성큼 다가섰다. 한국전쟁 배후조종국, KAL기를 폭파 추락시킨 장본인 나라, 그래서 레이건 前美대통령으로부터 '惡의 제국'으로 지칭된 그 소련을 상대로 구한말 외교관계를 폐교한 지 1세기만에 다시 악수를 나누는 역사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7박8일간의 소련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金泳三 민자당 최고위원의 귀국 보따리는 당초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들을 풀어놓음으로써, 그의 이번 소련나들이는 정상외교에 버금가는 열매의 수확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록 친필사인을 넣지는 않았지만 고르바초프는 盧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답신을 통해 한· 소 양국의 국교수립에 원칙적으로 합의하며 한반도 안정을 위해 협조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바야흐로 한반도에도 해빙의 바람이 불어올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귀국 직후 열린 盧대통령과 金최고위원의 단독회동후 정부는 6개항의 발표문을 통해, 정부차원의 대표단을 5월중 소련에 파견, 수교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할 의사를 밝혔다. 李秀正청와대대변인은 발표문에서 "한 · 소양측은 모스크바에서 가진 회담에서 양국 정상 사이의 이와같은 첫 의견교환이 양국관계에 있어 획기적인 일로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고 말해 비록 친서형태의 筆談에 불과했을망정 이것이 사실상 간접적 정상회담임을 강조했다. 李대변인은 朴哲彦정무장관이 지난달 22,26,27일 3차례에 걸쳐 소련정부관리들과 회담을 가졌으며 1차회담에서 盧대통령의 친서가 전달됐고 2차회담에서 고르비의 답신을 전해받았다고 밝히고 "양국정상 간에 조속한 관계정상화 의향에 원칙적으로 합의가 이뤄졌으나 수교의 시기나 일정은 합의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

 한 · 소간의 수교원칙이 선 이상 이제 관심은 그 시기와 일정에 쏠려 있다. 訪蘇대표단의 책임자는 朴哲彦정무장관이 맡고 외무 · 경제부처의 실무급 인사가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朴장관이 5월초 소련을 방문해 본격적인 수교협상을 시작해 9월초순까지는 상주대표부를 교환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대표단 파견시기와 관련해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북방정책을 지켜본 한 고위 미국외교관은 "한 · 소수교는 늦은감이 없지 않다"며 "대세는 양국간의 수교로 가고 있으나 소련정부로서는 북한 등과 같은 전략적 고려사항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외교관은 그러나 "여러 상황을 분석해볼 때 소련정부는 한국과의 수교를 위해 이미 정치적 대가를 치르기로 결정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가 시사하는 소련의 정치적 대가란 소련 · 북한간의 기존 우호관계를 경제협력 또는 실무차원의 이해관계로 격하시키려는 시도로 풀이되고 있다.

 다만 대사급 수교에 대한 한국측 입장이 서두르되 신중히 접근한다는 명분 · 실리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반면 소련측은 좀더 신중히 접근한다는 입장만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대목이다.

 실제로 소련측은 한국과의 정치적 관계보다는 경제적 교류 및 협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서방외교관은 소련측의 대아시아 진출목적의 하나가 "한국과 같은 나라와의 상업베이스의 협력구축"이라며 "현재 소련정부는 한국과의 정치적 관계증진은 가능한 한 뒤로 미루고 우선은 경제협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金泳三 최고위원이 소련내 제2인자로 통하는 야코블레프 정치국원과 만나 수교얘기를 꺼냈을 때 야코블레프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자. 경제협력 등 실질관계부터 축적시킨 뒤 수교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느냐"고 입장을 밝힌 점은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또 당 중앙위 브르텐스 국제부 부부장이 현재 한 · 소간의 영사관계를 총영사급으로 격상시키자고 제안한 것도 소련측이 현재로서는 정치적 비중이 담긴 대사급 수교를 그리 급하지 않은 테마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 소수교가 앞으로 한반도정세에 끼칠 구체적인 영향은 무엇일까. 그리 큰 변 화를 기대하기는 힘든 실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실제로 미 · 소양국의 해빙무드에 따라 서유럽에서는 군비축소와 같은 가시적인 긴장완화 조치가 나타났지만 동북아시아의 경우 그러한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소련은 근래에 극동함대의 증강을 비롯, 이 지역에서의 군사력증강에 치중해왔다. 한 미국관리는 "한 · 소수교가 한반도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은 틀림없으나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며 "우선은 양국의 상업관계가 다소 활발해지는 정도로 본다"고 말하고 "북한도 당장은 화가 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빠르게 적응하리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다만 한가지, 이번 金泳三최고위원과 朴哲彦정무장관이 이끈 소련방문단의 업적은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나 6공 회심의 役事인 북방외교의 '功'을 두고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서울의 두 실세가 불협화음을 보였다는 점은 비난거리가 아닐 수 없다.

 

누워 침뱉기' 金 · 朴 불협화음

 출발전부터 '동행이냐 수행이냐'와 같은 극히 지엽적인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던 金최고위원과 朴정무장관은 결국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북방외교에서 그대로 드러냈다. 즉 金최고위원은 정치적 협상을, 朴장관은외교적목적협상을 노려 그럴싸한 팀웍을 이룬 듯했으나 막상 교섭과정에서 호흡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소련 측에 허점을 노출시켰다.

 이번 방소단의 주된 목표가 한 · 소국교수립의 '다리놓기'였음에 비춰볼 때 金최고위원이나 朴장관 모두 내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회동을 최우선 목표로 생각했음은 짐작할만하다. 결국 고르비 先占戰은 작년 6월부터 길을 닦아온 金최고위원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과정에서 金최고위원이 보여준 다소 조급한 행각은 정치지도자로서의 국가경영자상에 스스로 흠을 남기는 우를 범했다는 평이다.

 金최고위원은 현지시각 21일 오후 6시20분경 마르티노프 IMEMO(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으로부터 크렘린으로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서두르는 바람에 미처 朴장관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고 하나 자신의 표현대로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니 끝까지 현장에 남아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자들부터 찾았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朴장관이 친서를 휴대할 것임을 출국전 '청남대회동'에서 盧대통령으로부터 귀띔받은 것으로 알려져 친서부분에 대한 그의 석연치 않은 발언은 그의 정직성을 스스로 훼손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 소련측이 현재의 영사급관계를 총영사급으로 격상하자고 제안했을 때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찬성을 표시했다가 나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급히 부인한 것도 총영사급과 같은 중간단계없이 바로 수교로 간다는 정부의 방침을 사전에 숙독치 못했다는 비난을 샀다.

 朴장관측에도 문제는 있다. 金 · 고르비 회동에 대해 "5분 정도의 수인사를 가지고 회담이라고 볼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은 만남 자체와 거론된 내용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였어야 할 북방외교의 현장지휘관으로서 성숙된 시각을 갖지 못했다는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 또 朴장관이 KBS와의 회견에서 金 · 고르비 전격회동에 대해 "한 · 소수교는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金최고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도 '누워 침뱉기'식이 아니냐는 평이다.

 

“자존심 지키며 대좌 못한 것은 유감”

 정부측의 한 고위관계자는 "金 · 고르비 간의 면담시간과 내용, 영사처 승격문제, 친서전달문제 등을 두고 언론이 왜곡보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며 金최고위원과 朴장관이 하루에도 30분 내지 1시간 정도는 사전협의를 가졌음을 들어 "양자간에 불협화음이 없었다'고 항간의 '金 · 朴 불화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金최고위원의 역할에 대해 "소련 조야에 親韓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며 "그러나 金 · 고르비 회동이 급히 주선되는 바람에 민족적인 자존심을 지키며 소련측과 대좌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것은 유감" 이라고 말했다.

 한편 소련방문 말미에 鄭左文의원이 미국에 급히 달려간 것도 '사대주의적 발상'이란 비난이며, 특히 현지에서 美측 인사와 만나는 동안 우리측 대사관 직원을 배석시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번 민자당의 소련방문은 기대 이상의 소득을 올렸다는 게 중평이다. 외무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한 · 소수교에 상당한 밑거름이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청와대의 당국자도 "우리가 조금 더 의젓하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번 방소로 한 · 소관계가 반보 더 나갔으면 나갔지 후퇴하지는 않았다"며 "일부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소련방문단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한 고참 미국외교관이 밝힌 "그간 많은 외교적 교섭을 경험한 미국은 소련이나 중국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세련된 분석은 자칫 우리측의 다소 과열된 대소접근방식과 관련, 두고두고 음미해봐야 할 타산지석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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