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칼럼] 脫冷戰정치를 바라며
  • (본지 칼럼니스트· 서울대교수) ()
  • 승인 199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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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시대정신은 1990년대 문턱에서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脫冷戰의 흐름을 타고 있는 민주개방정신이요 정화정신입니다. 그간 흉측하게 훼손되어온 국민과 권력간의 관계,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 사람과 자연간의 관계를 온전케 하려는 민주 · 평화정신입니다. 안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장치들을 해체시키고, 밖으로는 '공포의 균형'을 화해의 균형으로 전환시키는 정신입니다. 이 변혁의 정신은 역사의 바람이 되어 저 동유럽에서부터 세차게 불어닥치면서 전세계로 번지고 있습니다. 한반도라고 해서 예외의 孤島로 남아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평화의 바람은 일고 있습니다. 집권층의 일부 정책에서도 이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탈냉전의 민주개방성과 평화지향성이 오직 제한된 정책에서만 나타날 뿐, 다른 더 중요한 영역들에서는 오히려 반민주적이고, 반인간적이고, 반평화적 구냉전 관행이 시퍼렇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외교분야엔 훈풍. 국내정치엔 삭풍

  현정권은 외교분야에서는 눈부실 정도로 신해빙정책을 성공적으로 꽃피우고 있습니다. 며칠전에 집권당 최고위원이 전격적으로 고르바초프와 회담했다고 합니다. 정말 놀랄 일입니다. 게다가 한국은 체코와 불가리아와도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얼마전만해도 당국이 적성국가로 지목했던 나라들과 이제는 선린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이것도 놀랄 일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을 경멸하고 증오하도록 훈련되어왔습니까. 여러번에 걸친 전국민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아직까지도 국민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가 소련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소련과 우리는 올해 안으로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행운이요 업적이기도 합니다. 정부의 전방위외교가 평화와 개방의 물결을 타고 흐뭇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국내정치와 통일정책에 눈을 돌려보면 이같은 흐뭇한 흐름은 딱 끊어지고 맙니다. 예나 다름없이 냉전의 찬바람이 삭풍처럼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민주국민들은 지독한 냉전식독감에 걸려 아직도 않고 있습니다. 5공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확신범과 시국사범들이 이 시간에도 영어의 몸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민주개혁정치는 주춤할 뿐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여러 법률안을 보면, 이같은 반민주적· 반역사적 퇴행을 대번에 확인하게 됩니다. 군조직법은 날치기로 통과되었습니다. 보안법과 안기부법은 野大 때의 야당안보다 더 냉전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금융실명제는 가진자들의 반발로 제동이 걸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집권당내 요직안배 양상을 보면 반개혁적 수구세력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6공출범 이래 최대 개각이라는 것의 내용을 보면, 진부해도 너무나 진부한 냉전적 수구인사들로 짜여 있습니다. 당이나 내각의 어느 구석을 봐도, 과감한 민주개혁과 참신한 통일정책을 추진해나갈 얼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상당수가 냉전시대의 그 영용스러운 전사들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盧정권의 철학 빈곤과 경륜의 한계를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는 듯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래도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간 가장 오랫동안, 가장 억울하게 억압당해오고 차별당해왔던 이 땅의 씨알들의 그 고통을 정치적으로 들어주고자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의 발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껏 인권운동·통일운동·평화운동·환경보호운동·노동운동 등의 테두리에서 주로 활약해왔던 재야의 일부가 마침내 정당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 같습니다. 물론 인권운동 등은 계속 확대·강화되어야 합니다. 재야는 이 방면에 계속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냉전억압구조에서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을 확실하게 구원하기 위해서도 재야는 힘을 모아 국민적 정당으로 발돋움해야 합니다.

 

냉전 곰팡이 털어낼 진취적 정당 등장해야

  21세기 민주개방 평화정신이 파행적으로 왜곡되고 훼손되고 있는 이때에 새로운 민주변혁정치, 참신한 평화정치, 믿음직한 환경정치를 펼칠 정치적 대안세력이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냉전정치로 고통받아온 씨알들을 그 족쇄로부터 놓여나게 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민주정치 ·통일정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몸에 와닿게 보여줄 대체정치세력이 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외교에서나 內治에서나 일관성있게 냉전의 그 억압적인 곰팡이들을 깨끗이 털어낼 수 있는 정당이 나와야 합니다. 의회정치 광장을 탄력성있게 활용하면서 끈질기게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시켜나가는 진취적 정당이 등장해야 합니다.

  이번에 발족된 '민연추'가 이같은 역사적 소명에 부응하고, 이땅의 씨알들의 열망에 호응하려면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막연한 도덕적 지지와 정서적 호감을 구체적 투표로 연결시킬 수 있는 호소력을 지닌 대안정책을 구체적으로 선보여야 합니다. 지나친 계급적 극단론과 국민다수에게 생경한 과격론을 여과시킨 성숙한 민주 ·평화정책, 통일정책, 환경정책 등으로 국민을 안심시키면서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과 국민간, 국가와 국가간, 사람과 자연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면서 안으로 민주개방을, 밖으로 평화를 국민들로 하여금 몸으로 느끼게 하면서 마침내 자주통일로 이끌어갈 새로운 정당의 모습을 민연추는 보여주어야 합니다. 먼저 그들의 출범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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