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적 경제개혁 건의했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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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劉彰順회장 인터뷰]

3당 합당 발표후 6개 경제단체 중 유일하게 공식입장을 밝힌 단체가 전국경제인연합회(全經聯)였다. 정계개편으로 정국안정, 경제활력을 다시 얻고 노사화합을 기대한다며 조심스럽게 환영의 뜻을 표명한 것이다. 앞으로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재계와 민자당은 어떤 궤적을 그려갈 것인가. 좀더 가깝거나 먼 시기는 있었지만 政과 經의 유착 구조는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해왔다.

전경련이 다시 따가운 시선을 받게된 것은 정치자금의 흐름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의 자금수수는 보다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 경로도 더욱 정교해지리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재계가 ‘돈’을 무기로 정경유착을 공고화, ‘정치훈수’가 보다 강화될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면서 금력은 단순한 이권 차원에서 경제정책 자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되기도 한다. 일본과 같은 금권정치의 폐해가 우리에게도 더욱 깊은 ‘병의 뿌리’를 내리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앞서고 있는 것이다. 전경련 劉彰順회장을 만나 앞으로 政經구도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 이번 민자당 창당에 전경련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재계총리’로서 진위 여부를 밝혀주시죠.

 재계총리란 말을 개인적으론 좋아하지 않아요. 의혹 말씀하셨는데 이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지난해 기업인들은 각자 정치인들과의 公私모임을 통해 다들 보수세력인데 왜 여야로 갈라져서 다툼을 벌이느냐고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좋은 법안도 못만들고 결국 정국불안으로 치닫게 해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한다는 요지였지요. 어떤 식으로든 합쳐야 한다고 압력을 넣은 건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인들이 어떤 정치인과 접촉했다는 것도 알고 잇지만 전경련이란 단체 차원에서 합당하라는 로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인들이 이러니까 눈치가 있는 정치인들도 이런 여론이 있구나 하고 알아 차렸겠지요.

● 지난해 연말부터 재계와 정치권의 활발한 공식 비공식 접촉은 재계의 입김을 강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잇는데요. 금권정치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요?

 국민들이 볼 때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재계의 잦은 정치인 접촉은 입김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경제상황이 나빠지니까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걱정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전경련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하시오’는 아니었지요. 주료 경제관료들을 만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당수뇌들도 만났지요. 마침 이 때 3당합당이 되고 보니 어떤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인데 오해가 섞여 있어요. 물론 기업인들의 개별 접촉은 다른 목적이 아주 없었다고 하긴 어렵겠지요.

● 일본 자민당 모델을 따왔다는 근거를 들며 전경련이 일본 경단련과 유사한 행로를 걷지 않겠느냐고 보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금권정치’라는 일본 정치운용형태가 우리에게도 밀려들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정치자금 문제가 다시 쟁점화되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돈주고 이권을 받는 정경유착 구조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기업인들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공공연히 이를 조장한다면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금권정치를 구사하는 일본도 리쿠르트스캔들 등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고 잇는 형국 아닙니까.

● 그러나 돈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또 정경유착이 강화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는 견해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선거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에 드는 자금을 조달하려고 재계에 손을 내밀게 될텐데요.

 ‘돈 적게 드는 선거’ ‘조용한 선거’를 하자는 것이 세계적 추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지요. 그리고 이젠 국민의식이 엄정해 돈뿌려 당선할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정치자금 문제 해결은 그렇게 복잡하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현재 정치자금양성화법으로 후원회를 만들 수가 있게 돼 있죠. 정치권은 재계에만 기댈 게 아니라 국민전체 차원에서 정치자금을 조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재계에서 정치자금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또 제 생각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인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겠지요. 가령 여당에만 주느냐, 야당에도 주느냐 등의 문제입니다.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돈 안드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주장하고 있으며 전경련은 국민전체 차원에서 이의가 없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사안에 대해서만 자금을 풀게 될 것입니다. 또 과거보다는 재계에서 돈을 모아 특정당이나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은 차츰 없어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재계가 앞으로 정치판을 뒤흔들 것이다. 종전보다 목소리의 강도를 높여 정책에 개입하게 될 것이라는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재계가 ‘킹메이커’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목소리’ 운운하는데 저는 솔직히 목소리의 의미는 알기 어렵습니다. 재계는 체제수호와도 관계되지만 국민경제를 올바로 끌고 가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면 부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계가 정책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돈을 주는 것은 이미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또 ‘돈대면 목소리 커진다’는 것은 너무 도식적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 지난 2월 있었던 정기총회에서의 유회장 발언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경련이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등 경제개혁조치의 후퇴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총회 때 내 태도가 달라졌다고 심지어는 변신을 했다는 얘기도 합니다만 저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경제를 위해 방향이 잘못되고 있다고 판단이 되면 수시로 건의 형식이나 사석에서도 얘기를 많이 해 왔습니다. 토지공개념 등 경제개혁 조치도 그렇습니다. 저는 88년에 대통령의 경제구조조정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이 때 대통령께 올린 최종보고서에서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 문제는 경제에 줄 충격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급격히 추진하려는 데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경제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경제정책을 펼 때는 이 법의 규제를 받는 경제주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이념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점진적으로 끌고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또 사실 부동산투기를 막는 것은 현행 법규 갖고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재계에서는 행정력 부족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법도 활용 못하면서 屋上屋을 만들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실명제도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가명과 실명의 적용 세율이 다르고 매년 올라가는 추세 아닙니까. 금융자산 소득에 대해 종합소득세를 최고로 매길 때 71%에 이르는데 이렇게하면 가명구좌에 대해 행정력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불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경제에 손상을 주는 조치는 배제돼야 합니다. 경제개혁 조치의 후퇴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죠.

● 분배문제는 우리경제의 최대 현안으로 인식되고 있는데요….

 6공의 경제정책 목표는 국제화와 개방화, 산업구조조정, 형평입니다. 그동안 성장위주 정책이 낳은 그늘진 계층을 더 이상 놔둘 수 없다는 것을 정부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점진적으로 형평제고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업인들도 이 대세를 거슬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 성장이냐 안정이냐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옳지 않겠지요.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느 쪽은 다소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저는 중앙은행 총재를 가장 오래했는데 어느 한쪽을 버려야 한다는 의견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성장이 있어야 분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매년 취업인구가 몇십만명씩 고용시장에 쏟아지지 않습니까. 현대국가는 복지를 중시하는데 복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요체는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죠. 성장과 형평은 동시에 추구돼야 합니다. 세인들은 3당합당후 3공당시 경제장관하던 사람들이 재등장하게 되니까 3공식의 성장우선 정책 회귀로 보는데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죠.

● 경제상황은 여전히 ‘잿빛’입니다. 악화요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성장드라이브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분명히 대기업들이었습니다. 이제와서 혜택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죠. 저는 이들이 그동안 기술개발로 생산성과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과제를 게을리한데 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이제 와서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되죠. 저는 미국 미시건대 케네스볼딩교수의 “윤리가 없는 경제학은 받침없는 지렛대”란 표현을 떠올리게 됩니다. 기업가들이 잃어버린 윤리를 되찾아 책임을 통감하고 경제활력을 복원해야 합니다. 물론 근로자들도 지나친 자기몫 찾기는 조금 자제해야겠지요.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기업인들이 세계상황 관찰을 등한시한 것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국제경제상황이 급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 대기업집단이 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다고 보십니까?

 불신을 받을 만한 기업가가 있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업의 경제공헌도까지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되죠. 일부이긴 하지만 기업인들은 투기해서 쉽게 돈벌 생각말고 본업에 충실해야 하며 근로자들과 ‘노사한몸’이라는 인식갖기에 노력, 어려운 국제경제환경에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기업이 기업다울 때 비판은 사라지겠죠.

● 전경련이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재계의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전경련의 바람직한 위상에 관해 소신을 들려주시죠.

 과거 강력한 정부주도 아래에서 재계가 리더십을 가진 적이 있느냐고 우선 묻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는 전경련의 모습은 다른 경제단체들과 협의해 우리경제를 위해 바람직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기관으로 남고 싶은 것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노력할 것이며 이는 전경련이 추구할 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 지난 한해 동안 자기목소리를 극도로 내지 않았다는 불만이 재계에선 있었습니다. 여건을 고려해 자제하신 것인지요.

 그렇게 봐줘서 우선 고마운데요. 기업인들은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일부에서 자기목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동안 끊임없이 대정부 건의를 해 왔습니다. 경제를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구상을 개진한 것이죠. 앞으로 이는 변함없이 꾸준히 할 것이며 전경련의 역할이라고도 자임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이해를 얻으려고도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과거와 같이 신문광고를 내는 등으로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키진 않을 것입니다.

● 경단련의 정치대응자세를 전경련이 연구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전경련과 경단련은 발생단계부터 다르고 무엇보다 일본과 우리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달라 맞비교는 곤란합니다. 또 경단련은 전문 경영인들이 움직이지만 우리는 아시다시피 오너체제 아닙니까. 또 그들의 지배계층은 재계지만 우리는 군관계인 등이 잡고 있는 구조여서 지배계층이 다릅니다. 지나치게 일본의 정경유착구도로 우리상황이 전개되라는 해석은 무리가 따르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바쁜 일과중에서도 다소 짬이 나면 경기도 안산에 있는 농장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다는 劉彰順회장은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하고 재계로 돌아온 후 19년만인 지난 82년에 국무총리로 기용된 원로경제인. 지난해 2월엔 非오너로 전경련회장에 선임돼 ‘크레믈린’인 전경련에 민주화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이런 중간평가를 받았던 그에게 임기를 11개월 남겨두고 ‘건강한 재계 만들기’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부하되고 있는 셈이다. 정경유착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은 가운데 재계총 본산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해 주목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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