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협주의와 ‘사랑의 무기’
  • 해남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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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金南柱,≪한길문학≫ 창간기획 문학기행에서 ‘나의 삶,나의 시’밝혀

“해가 있을 때 고향 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던 金南柱시인(43)은 지난 3월3일에도 해가 진 뒤에야 고향인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닿았다. 그러나 이날의 還鄕은 그가 70년대 초반 시와 변혁운동의 무기력에 빠진 채 어둠을 틈타 깃들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의 생가 마당에는 멍석 여섯장이 깔리고 모닥불이 피워졌다. 시인의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한바탕 잔치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3월 하순에 창간되는 새 월간문학지 ≪한길문학≫(한길사 발행)이 그 창간기획으로 마련한 ‘한길문학기행’의 첫 번째 작가로 김남주시인을 선정,시인의 고향을 찾아간 것이었다. 대학생, 주부, 상인, 직장인, 교수, 교사 등 다양한 계층의 독자 여명과 작가 朴泰洵, 시인 김형수씨 등이 동행한 ‘김남주 문학기행’은 전남 해남, 강진, 광주, 전북 정읍의 황토현 등 김남주시인의 생가였다. 전형적남도 농가인 그의 집 마당에서는 마을잔치처럼 풍물이 울려퍼지고 막걸리 잔이 돌았다.

  그의 생가를 떠나 이날 밤 해남 대흥사 대중큰방에서 독자들을 앞에 두고 그는 자신의 삷과 문학을 털어놓았다. 그는 시를 낭송하고 그 행간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중의 구체적 삶을 토대로, 그 삶에 직 · 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사회 · 정치문제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시가 가장 바람직한 시”라고 시에 대한 관점을 밝힌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이킬 때 부모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무식한 농투성이 부모, 어머니는 아버지가 머슴살이하던 부잣집의 딸이었지만 눈 한쪽이 불편한 불구자였다.


농투성이었던 아버지와 “나의 꿈”

  그 아버지는 아들 성천(김남주의 아명)이 커서 ‘금판사(판검사)’나 최소한 면서기라도‘ 되기를 바랐으나, 아버지는 ’내가 부자들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화병으로  79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피붙이의 소망을 채워주면 그들 나름대로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피붙이를 시달리게 했던 원인에 적개심을 가겼다.” 그는 이와 같은 생득적 인식과 성장한 수 사회과학 독서를 통한 지식으로 관리가 되길를 거부하고“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결심은 피붙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동반했다. 대학시절 이후 ’차마 부끄러워‘늘 밤에 고향을 찾았다.

  흙의 정서를 지녔기에 도시학생들이 가진 시멘트문화를 견뎌낼 수가 없던 그는 65년 광주제일고를 자퇴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들의 기대에 못이겨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가지만 학교수업에는 무관심하였다. 4학년 2학기가 되자 갈 곳이 없었다. 그해, 73년, 10월유신이 발표되자 “권력의 폭거에 모기만한 소리라도 내자”며 그는 ‘소리’를 냈다. 이것이 10월유신에 대한 최초의 항거인 ‘함성지 사건’이다. 서울에서 체포돼,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그해 연말 풀려났다.

  졸업장도 없던 그는 농촌 · 도시 어디에도 소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곤비한 영육을 소속시키기 위해, 그리고 변혁운동의 이념을 전파시키기 위해” 시를 썼다. 74년 여름 계간≪창작과 비평≫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에서도 변혁운동에서도 성과가 없던 78년, 그는 광주에서 서점을 하는 친구 방에서 생활의 방편으로 학생들에게 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그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그 방을 수색했다. 그 길로 그는 서울로 몸을 피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 위원회’에 가담했다. “전 생애를 바치는 조직적 혁명가가 없이는 변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직에 가담했다”고 지하조직에 참여한 배경을 밝힌 그는 “그러나 이 조직은 反유신활동밖에 다른 한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만 재정문제 때문에 모 재벌집에 찾아가 자금을 강요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자본의 비인간성을 지적할 따름”

  “노동하는 사람들이 제 노동의 주인이 되는 세상”이 그가 바라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는 “자본가에게는 유감이 없다. 다만 자본의 비인간성을 지적할 따름이다”라고 밝히고 “우리사회가 인간화되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삶과 문학을 마주하면, 그에게선 두 개의 세계가 극렬라게 대비된다. 그러나 그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비타협주의와 민중(조국)에 대한 애정이 그 두 세계이다.

  작가 박태순씨는 ‘개땅쇠와 민중의식’으로 김남주의 문학세계를 압축했다. “한 시대를 위에서 아래로 누르눈 것이 정치라면 문학은 아래에서 위를 보는 것”이라면서 박씨는 “김남주 문학은 아래에서 치받치며 올라가는 민중문화의 정신적 무기”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김남주 문학이 “한국사회 모순의 가장 깊은 골에서 시작하고 거기서 본령을 이룬다”고 평가하고 “김남주의 ‘사랑의 무기’는 권력의 폭력과 맞선다”고 말했다. 박씨는 해남 지역의 산하와 문화가 김남주시의 건강한 힘과 굳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시집 ≪애국의 계절≫의 시인 김형수씨는 김남주 문학이 지금까지 어떤 관점에서 비판받고 있는지를 밝히고 그 비판들이 지닌 허구성을 지적했다. 김씨는 “정치적 관점에서 김남주의 시는 찬양, 비판적 지지, 비판, 비난 등 네가지 입장에서 평가된다”고 정리하고 “애국자와 매국노만 우리사회에 있다는 시 ?어머니?에 동조하는 부류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한다”고 분석했다.

  두 번째인 비판적지지 부류는 “우리 사회가 애국-매국이 아니라 보수-진보, 좌익-우익 등 다양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김형수씨는 주장했다. 세 번째 비판의 입장은 “애국-매국은 시인이 경직되고 도식화된 것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분류”라는 것이다. 김형수씨는 “옳은 것을 옳다고 표현하지 않는 침묵은 ‘공범관계’라는 김남주 시에 공감한다”면서 김남주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김남주의 시가“서정성이 탁월하고 아울러 무구의 시보다도 뛰어난 구체성으로 대중의 삶을 그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남주 시의 흐름을 70년대 시와 80년대로 구분하는 그는 “김남주시인의 일관된 시정신은 비타협적 애국주의”라고 정리했다.

 
김지하의 생명사상 비판

  “김남주씨가 김지하시인을 비판한 글을 읽었다”며 질문을 던진 한 독자는 “변혁운동의 당위성에 문학을 접맥시킬 때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김남주씨는 지금까지 김지하시인이 이룩한 성과의 위대함을 인정한다고 답한 뒤“김지하시인의 현재 삶이 70년대와 거리가 멀다고 해서 비판할 단계가 아니며 예우 측면에서도 그렇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남주씨는 “그가 둥지라면 가차없는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또한 김지하의 생명사상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생명의 존엄성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농부의 발에 달라붙는 거머리는 어쩔 것인가. 착취자의 생명말이다”라고 반문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일반은 없다. 계급적 시각에서 보지 않는 생명사상에는 문제가있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요즘 “물질적인 힘으로 세워진 벽을 퍼물기 위한 물질적 힘”과 “변혁운동가로서의 시와 민족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근황을 밝혔다.

  이튿날 문학기행팀은 해남의 땅끝마을과 강진군 도암면의 다산초당을 찾았다. 김남주씨는 “지배계급의 피해자에서 리얼리즘의 승리자가 된 다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자신의 시 ?田論을 읽으며?를 낭송했다. 이어 일행은 전북 정읍군 덕천면 ‘황통현 전적지’를 찾아 全琫準의 생애와 동학현장을 답사했다. 동학의 무대는 “조국을 생각할 때마다 찾아오던 곳”이라고 그는 말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독자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들었다”는 질문에 김남주시인은 “지난 1월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金土日이라고 지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일주일에 최소한 3일은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해 일행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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