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인기자’ 李珏璟의 첫 기사
  • 편집국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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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발굴/20년 7월1일 <매일신보>서 채용공고…9월5일 입사, 14일 첫 기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는 누구인가. 1924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근무했던 崔恩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과는 달리 4년 먼저인 1920년 9월에 <매일신보>에 입사한 李珏璟이라는 여기자가 있었다. 그가 공채로 신문사에 들어간 최초의 여기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막상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기자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필자는 言論史를 연구하면서 오랫동안 이각경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으며 그 무렵 언론계에 종사하던 분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실물사진을 비롯하여 그에 대한 자료가 당시의 <매일신보>에 상당히 많이 게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매일신보>는 1920년 7월1일자 신문에 여기자 공채 社告를 내고 우리나라 최초로 여기자를 채용하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이 사고에서 세계의 추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성해방이 요원함을 통탄하고 가정개량과 여성계의 개조를 위해서는 현숙하고도 박학한 여기자의 책임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응모자격은 家長이 있는 부인이라야 하며, 연령은 20세 이상 30세 이하이고, 학력은 고등 보통학교 졸업정도 이상으로 문필에 취미(문장력)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

그런데 여기자의 자격 가운데 첫째가 ‘가장있는 부인’이라야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결혼한 사람이라야 남녀차별의 사회구조와 여성의 지위를 체험할 수 있고 집안살림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가질 수 있다고 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명칭도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가 이각경이었다. 9월5일자 <매일신보>에는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의 부인사회를 위하야 건전한 붓을 휘두를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이각경의 입사를 알리고 있다.

“본사가 이미 천하에 고함과 같이 다년간 현안중이던 여자기자의 채용문제를 비로소 해결하게 되었는 바 이번에 부인기자로 입사하게 된 여사는 원래 경성 출신으로 엄숙한 아버지의 교훈과 따뜻한 어머니의 무릎 아래서 장중의 보옥과 같이 자라 黃口(어린아이)를 겨우 면한 때로부터 새로운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는 바 그 사람됨이 총명한 중에도 정숙하므로 항상 학교의 온 존경과 온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며 거금 13년 전에 관립한성고등여학교에 입학하야 대정 4년에 이르러 남보다 뛰어나는 조흔 성적으로서 영광스럽게 졸업하였다.”

기사는 이어서 이각경이 동경으로 건너가 공부했으나 가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귀국한 뒤 교육계에서 2년 동안 종사하였다고 소개했다. 한성여학교는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1908년에 공포된 고등여학교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관립 중등여학교로서 2년제의 예과와 3년제의 본과를 5년간의 과정이 끝난 뒤에 졸업하게 하였다. 1920년에 쓴 기사에 13년전에 입학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각경은 이 학교 첫 입학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사 주류는 ‘여성 계몽’

이 기사에 곁들여 이각경은 ‘입사의 변’을 썼다. 그는 우리사회는 예로부터 여자를 너무 멸시하고 무시하여 여자는 다만 남자의 종속적 물건으로 절대 복종하고 절대 무능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신문사업에 나선 것은 참으로 그 책임이 무겁다고 밝혔다.

그는 채용된 이틀 뒤인 9월14일자부터 부지런히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부인기자의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창덕궁 지밀여관(至密女官)을 방문한 기사에 이어서 9월15일자부터 9월21일자, 9월28일자, 9월29일자에 실렸다. 같은 해 12월5일자에는 ‘이백작저(李伯爵邸) 방문기’라는 기사를 썼는데 ‘이각경 여사’라고 이름을 밝혔다. 또 12월29일자에는 ‘신사회에 임한 자매여 어찌 그다지 허영심이 많고 교만한가 참 속히 고칠지라’는 글이 실렸는데 마지막에 ‘부인기자’라고 표시하여 이각경이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1921년 1월1일자에는 ‘본사기자 이각경 여사’라고 크게 이름을 밝힌 기명 기사로 ‘시년 벽두를 제하야 조선 가정의 주부께’라는 장문의 계몽적인 논설을 실었다. 그는 이 기명 논설에서 “우리 조선은 날과 달로 변하여 가는 이 시대를 당하여 지난 시대의 범절만 지킬 수도 없고 또 나날이 달라가는 풍조를 다 숭상할 수도 없다”고 전제하고 여성계의 개량은 전통적인 것을 지켜가면서 고칠 것은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시대와 신시대가 갈라지는 변화 속에서 ‘신여성’이라는 말이 신선한 의미를 가지고 자주 쓰이던 사회 분위기였지만, 여성운동의 최첨단에 서서 기수 노릇을 해야 했던 최초의 부인기자 이각경은 보수와 개혁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 여성들에게 첫째 시대됨을 알 것, 둘째 위생사상을 기를 것, 셋째 공덕심을 기를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장처(長處·장점)는 보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조선 여성이 전부터 전해오던 바와 오늘도 행하는 바 장점은 영원히 보존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는 조선 여성이 지켜야 할 장점으로 가정 안의 일은 여자가 다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책임관념에 투철하고 이에 대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름다운 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각경은 이때부터 여성을 위한 계몽적인 기사를 여러편 실었다. 이각경이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기사 말미에 ‘부인기자’라고 쓴 기사는 모두 이각경이 쓴 것으로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1월3일자에는 ‘자부를 둔 시부모여 며느리도 당신의 자식이어늘 왜 그리 노예시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4월 말까지 거의 이틀거리로 여성의 가정관리, 육아, 종교, 고부간의 갈등해소, 부인의 범절 등 광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각경의 기자생활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그는 최초의 여기자로서 앞으로 언론계에 입문할 여기자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는 여기자상을 심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수를 바탕으로 한 개혁론을 폈던 이각경에 뒤 이은 일제하의 여기자들은 이각경의 생각을 그대로 계승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와는 달리 기존 인습의 타파를 부르짖으면서 여성운동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하의 여기자들은 순수한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언론인 겸 문인 또는 사회운동가였다. 그러므로 여기자는 스스로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여성의 지위향상을 선도하는 선구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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