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쿠릴은 우리 땅‘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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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영토 강점”“포로 학살”…17세기 기록 들춰 자존심 대결



 맑은 날 훗카이도 최북단 노삿푸곶에 서면 러시아측 하보마이섬이 손에 잡힐 듯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앞이 구나시리·시코탄·에토로후섬, 활처럼 휜 형상의 쿠릴열도는 멀리 캄차카반도까지 이어진다.

 일본이 전후 47년간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이른바 ‘북방 영토’는 쿠릴열도의 이 4개 섬이다. 현재 러시아공화국 사할린주에 편입되어 있는 이 섬들의 총면적은 약 5천㎢로 제주도를 3개 합친 것과 같은 크기이다.

 17세기 이전에는 원주민 아이누족 이외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버려진 땅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일본과 제정 러시아의 영토 확장 야욕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新羅之記錄》은 1615년 아이누족이 물개의 모피를 도쿠가와 막부에 헌상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 기록을 근거로 17세기 초 아이누를 통해 일본과 북방 섬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있었다‘며 러시아측에 “북방 섬은 일본의 고유 영토”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해 왔다.

 

 서로 엇갈리는 영토 조약 해석

 한편 제정 러시아의 탐험대장 시판베르그가 일본 기록이 발견된 때로부터 1백여년 뒤 쿠릴열도에 나타난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1739년 시판베르그가 문제의 북방섬 에토로후 하보마이 섬을 발견하고 상륙한다. 옛 소련도 이 기록을 들어 일본의 영토 반환 요구를 묵살해왔다. 쿠릴열도를 처음 발견·개발한 것은 제정 러시아이므로 쿠릴열도의 영유권은 옛 소련에 있다는 논리이다. 옛 소련은 3년 전 시코탄섬에 ‘시판베르그 발견 2백50주년 기념비’를 세우고 쿠릴열도 4개 섬이 소련의 고유 영토라는 것을 과시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일본과 러시아가 이 섬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한 기록은 없다. 두나라가 영토 문제를 처음 거론 한 것은 19세기 중엽 통상우호조약을 맺으면서부터이다.

 1854년 도쿠가와 막부가 미국 페리 제독의 함포 외교에 굴복해 쇄국정책을 포기했고, 러시아의 프차친 제독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연안에 나타나 문호 개방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일본과 러시아는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양국 국경을 확정했다. 첫 국경선은 문제의 북방 섬 최북단 에토로후와 그 위쪽 우루푸섬 사이로 결정됐다.

 일본과 러시아는 바로 이 영토 조약의 해석을 둘러싸고 불꽃튀기는 설전을 벌여왔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러시아와 처음 맺은 조약 때 확정한 국경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국경선이라는 것이다. 또 영토 조약은 소유권 이전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한번 맺은 영토 조약은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영토관은 다르다. 즉 영토란 피를 흘린 대가로 획득한 것이며 한번 손에 쥔 영토는 전쟁에 패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놓을 수 없다는 태도이다. 그 예로 옛 소련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자 일본이 러시아에 불리한 포츠머스조약을 강요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병합한 사실을 들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측은 1855년의 통상우호조약을 언급할 자격을 상실했다며 일본을 견제해왔다. 러일전쟁의 패배와 남사할린 병합에 대해 지금도 일본에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러시아인이 많다. 이러한 반일감정이 실은 현재의 북방 섬 반환에 반대하는 ‘대 러시아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옛 소련은 2차대전 직후 40년 전의 러일전쟁에서 잃었던 것을 쿠릴열도 4개 섬 점령으로 되찾았다. 스탈린은 45년 2월 흑해의 휴양지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수뇌회담에서 참전의 대가로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분할할 것을 요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도상의 깨알 같은 점들에 불과한 쿠릴열도보다는 소련의 참전이 급했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간단히 수락했다. 일본의 항복 직후 스탈린은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로 국민 모두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일본이 분쇄되어 러시아의 오점이 일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라고 말했다.

 

4개 섬 반환에 2백수십억달러 경협 제의

 얄타협정에 따라 소련군이 하보마이섬까지 진주한 것은 9월3일이었다. 당시 쿠릴열도의 4개 섬에는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1만7천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일본인을 모두 섬에서 추방, 사할린 등지의 강제노역장을 끌어갔다. 소련군은 또 일본군 포로 60만명을 시베리아로 강제 송환했다. 현재 쿠릴열도 4개 섬의 거주자는 2만3천여명. 일본인은 한명도 없고 모두 소련군 진주 이후에 뒤따라 들어온 이주자들이다.

 쿠릴열도 주변 해역은 쿠릴해류와 일본해류가 부딪치는 곳이어서 세계 3대어장으로 꼽힐 만큼 어자원이 풍부하다. 또 북방 어장이 가까워 예로부터 북방 어업의 전진 기지로 각광받았다. 따라서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대부분이나 옛 소련의 전략적 군사 기지였던 관계로 군인 가족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다. 4개 섬에는 현재 지상군 1개 사단 8천명과 KGB 소속 국경경비대 3천명이 주둔해있고 에토로후섬에는 미그23 전투기 40여대가 배치되어 있다. 또 러시아의 방위상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협상이 난항을 거듭해온 것도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다.

 1956년의 일소공동선언에서 2개 섬을 우선 반환하겠다고 제의한 소련은 60년 일본이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자 2개 섬 반환 제안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일본이 미국의 소련 봉쇄 정책에 가담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또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1년 전인 1978년 일시적으로 철수시켰던 군대를 이곳에 재배치함으로써 일본을 크게 자극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국내에서는 “소련군이 홋카이도를 침공할 계획이다”라는 유언비어가 떠돌 정도로 ‘소련 위협론’이 들끓었다. 실제로 육상자위대는 이 사태 이후 전체 보유전차의 50% 이상을 홋카이도에 배치했으며 작년에도 최신형 전차를 홋카이도에 우선 배치했다. 이같은 양국 간의 불신의 역사가 영토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본인은 러시아에 관한 한 피해자이지 가해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때문에 일본은 “소련이 일방적으로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참전한 것은 중대한 배신 행위이며 시베리아에 60만명을 끌고가 그중 6만여명을 학살했고 게다가 북방섬까지 점령하고 언제 돌려줄지도 모른다”라고 비난한다. 러시아도 피해 의식이 강하다. 극동 러시아인들은 아직도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 저지른 만행을 잊지 않는다. 또 1939년의 ‘노모한사건’(소·만국경의 노모한에서 일본 관동군의 국경침범으로 발생한 무력 충돌)을 일으킨 관동군의 침략 행위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쿠릴열도의 ‘쿠릴’은 아이누족의 말로 ‘사람’을 가리킨다. 이 쿠릴열도 4개 섬에 소련인 이주자가 정착한 지 반세기가 흘러 지금은 2세,3세로 이어지고 있다. 작년 4월 방일한 고르바초프에게 자민당 정권은 4개 섬을 반환하면 2백수십억달러의 경제협력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때 일본의 영토 반환 요구를 ‘니에트(안된다)’라는 한마디로 거절했지만 대신 쿠릴열도 4개 섬과 홋카이도 주민이 비자 없이 자유 왕래하자는 제안을 했다. 올들어 고르바초프의 제안이 실현되어 일본인 성묘단이 방문하는 등 왕래가 이루어졌다. 일본과 러시아가 불신의 늪을 서서히 메워가는 것이 바로 영토 문제 해결의 첩경이라는 상호 간의 인식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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