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東기질로 부딪쳐 닫힌 땅 문 열었다”
  • 글·사진 김광억 객원편집위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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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光億 교수 중국 미개방 농촌 현장생활기



산동성 동촌 마을서 2백50일간 머물며 조사활동

 중국을 더욱 깊이 알아야 할 때다. 중국을 올바로 이해하자면 그 속에 들어가 살아보는 것이 가장 좋다. 《시사저널》객원편집위원인 서울대학교 金光億 교수(인류학)는 90년부터 최근까지 중국 山東省 桓台縣을 아홉차례 방문하여 2백50일을 ‘동촌’마을 중국 농민과 살며 인류학적 현지 조사를 했다. 대통령의 중국방문으로 한·중교류가 더욱 왕성해진 터에 인류학자 김교수의 깊이있는 중국농촌생활기는 중국의 체질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사저널》은 이 특집에 이어 앞으로 매주 김광억 교수의 ‘살아있는’ 컬럼 “중국농촌 현장생활기”를 연재한다.<편집자>

 금년 여름 그동안 8차례에 걸친 방문 조사의 마무리를 위한 보충조사를 위하여 중국 산동성 동촌이라는 마을에 갔을 때 화북지방은 40년만의 대가뭄과 싸우고 있었다. 90일째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황하는 마침내 그 붉은 바닥을 다 드러내었고 節水口號를 써붙인 담벼락 사이로 당간부와 행정요원은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매일 계속되는 38~39도의 높은 기온이었지만 건조한 관계로 차라리 무덥지가 않았다. 이따금 미풍이 스치면 마른 들판에는 황색먼지가 천지를 가득 채우고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하얗게 퍼붓는 눈부신 태양 아래서 나는 긴장된 눈으로 벌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검붉게 탄 등어리를 내어놓고 옥수수밭에 김을 매고 노인들은 겨우내 입었던 두터운 검정색 솜옷을 아직도 걸친 채 말없이 밀을 넣어서 말리고 있었다. “내가 7살 때도 큰 가뭄이 들었지. 두 살 난 여동생은 굶어 죽었고 열두살짜리 형은 삼촌을 따라서 동북(만주)으로 밥벌이 떠났지… 올해야 뭐 밀도 풍작이 되어 먹을 것이 넉넉하니까.” 78세인 전노인의 덤덤한 말과 표정을 대하면서 새삼 농민은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산동에서 보냈던가.

공산화 이전의 중국세계에 들어선 듯

 내가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은 1990년 4월 중순이었다. 복건성 사회과학연합회 주최인 ‘?祖신앙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위한 사전탐사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시골 버스역 같은 福州 機場에 도착하니 깡마른 체구에 목덜미를 덮은 장발의 젊은이가 “南朝鮮 金光億 敎授”라고 붉게 쓴 종이를 뻗쳐들고 밖에 나와 있었다. ‘접대조’라고 쓰인 명찰을 단 그 청년은 이내 켄트 담배를 나에게 권하며 회의개최지인 ?田市는 거기서 80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말했다. 레코드 로얄 중고차가 택시로 사용되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흙탕물로 가득한 ?江을 건너서 福州-泉州 길을 시속 50마일로 ‘질주’를 하는데 (식사시간에 닿지 못하면 우리는 저녁을 굶게 되는 것이다) 곳곳에 브레이크 파열이나 엔진고장을 일으킨 노후차량이 서 있었다.

 한시간 반을 달리는 동안 길 옆에는 끊임없이 하늘로 빠르게 치켜올라간 처마장식의 지붕을 한 넓고 잘 정돈된 집들이 모여 있는 아름다운 농촌풍경이 나타났고 산 위에는 계단식 茶재배지와 평지에는 莉枝,琵杷,龍眼 등의 과수들에 의하여 경계지워진 논이 펼쳐져 있었다(烏龍茶와 鐵觀音이라는 차와 위의 세가지 과일은 福建省의 대표적인 특산물 이며 주요 수출품목이다). 짚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역시 짚으로 만든 비옷을 걸친 맨발의 농부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집 안으로 누런 황소를 몰고 사라지는 모습도 정겹게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에게 아침의 집단적인 체조(또는 춤)나 산보, 점심 후 2시간의 우쉐이(牛睡:나는 이를 중국 전체가 낮잠에 빠진다는 의미로 國睡라고 불러야 한다고 농담을 하곤 하였다), 생각나는대로 의자에 앉은 상태로 한쪽 다리를 떠는 것, 이 셋은 슈시슈시(休息休息)라는 말과 함께 일상화된 건강관리법인데 낮잠자는 시간에 혼자 나와서 돌아다니며 본 호텔 주위의  모습이 주는 첫인상은 마치 공산화 이전의 중국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갖게 해주었다.

입장 곤란하면 “硏究 硏究”

 회의 도중 나는 복무조의 사람들에게 부근의 농촌을 보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어떤 요구이든지 일단 “커이커이 매이요우 원티”(可以可以 沒問題)라고 했는데 뒤에서 外事處에 보고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 요청에 대하여 며칠씩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거나 그 다음날 길이 나쁘다든가, 차가 없다든가, 그쪽의 접대할 사람이 마침 출타중이라든가 하면서 “옌쥬옌쥬”(硏究해봅시다)라고 하는데 이는 외국인에 관한 교류 등을 관장하는 外事處나 族遊局 중 어디에선가 곤란하다는 결정이 났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말들이었다. 나의 요구 중에서 몇 개는 받아들여져 공식회의 일정이 끝난 후에 그들은 市長의 차에 나를 태우고 동네와 공장, 그리고 농촌과 관광지에 데려갔다.

 중국은 모든 지역이 개방구와 미개방구로 분류되어 있는데 개방구란 외국인의 방문이 허용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마조여신(선원과 어부, 바다를 수호하는 중국의 해양신)이 태어난 賢良村에 있는 祠堂과 그가 승천했다는 眉洲섬의 마조궁을 방문하였다.

 미주행 배를 타기 위하여 문갑이라는 곳으로 갔다. 이 일대의 길을 메우며 하루에도 수십대의 관광버스로 들이닥치는 대만사람들은 진바지에 허리에는 보조주머니를 찬 채 최신 카메라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I Love New York”이나 “Hard Rock”류의 글자가 찍힌 티셔츠와 UCLA 혹은 황금색 월계수를 수놓은 운동모자를 쓰고 있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안개비가 띄엄띄엄 내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대만사람들은 털스웨터와 번들거리는 천으로 만든 잠바를 꺼내입으며 춥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승객이 편히 쉴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며 화장실은 너무나 불결하다고 큰소리로 불평하였다. 현지주민들은 색바랜 런닝셔츠 바람으로 비를 맞으며 떡이나 음료를 팔고 있는데 누군가 원래 위생관념 없는 사람들인데다가 만든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저 음식들은 필경 병을 일으킬 것이라며 사먹지 말라고 큰소리로 제지하였다. 그러자 청년 하나가 “씨팔 돈 있는 놈은 좋긴 좋구나”라는 말을 내뱉고 돌아서면서 침을 뱉었고 곧 대만 관광객과 말다툼이 벌어졌다. 경찰도 관리직원도 누구 한사람 그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60년대 한국 시골 관광지와 일본 관광객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眉洲 마조묘은 문화혁명 때 거의 파괴되었는데 1980년에 대마의 마조묘에서 보내오는 원조금으로 복구가 시작되었고 1985년에는 정부에 의하여 국가문물로 지정되어 재건이 천명되었다. 그 이래로 이전의 것을 거의 복원하였고 이제는 더욱 많은 현대식 시설을 가미한 건축물을 한창 짓고 있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경비는 물론 해외, 특히 대만의 신자들로부터 충당되는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대만의 방문객들이 개인적으로 낸 헌금액이 3백여건 정도 벽에 공표되어 있었는데 한건당 최소 미화 3백달러에서 최대 1만8천달러였다. 따라서 대만의 참배객과 이 묘의 관계는 단순히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관계인 것이다. 이 지역은 ‘대만동포’의 자유로운 투자를 위한 경제특구이며 현재 대단위 관광시설이 정부와 대만 기업의 공동투자로 건설중에 있다.

 마조묘의 董事長은 이 지역 인민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을 겸하고 있었다. 주석이라함은 곧 그가 공산당 고위간부임을 말한다.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국 기업들이 투자상담을 할 때 상대측에서는 공장장과 두어명의 간부가 합석한다. 그들은 결론이 날 때까지는 결코 공개적인 토론을 하지 않으며 모든 의견교환은 공장장을 통해서만 한다. 공장장은 그후 배후에서 당위원회 서기들과 의논하다. 따라서 시간은 지연되고 몇 번씩이나 협상이 되풀이되는데 이 경우 한국 기업인은 조급해져서 이것저것 협상카드를 다 내어보이고 심지어는 경쟁회사의 험담가지도 늘어놓게 된다. 어느 정도 확실한 입장이 정리되었을 때 비로소 서기가 주석에 앉은 연회가 마련된다. 그러므로 연회의 풍성함이나 외교적 찬사보다도 최후에 누가 식탁에 앉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서기는 ‘스스칸마’(試試看?:한번 해보지 뭘)라고 공장장에게 권하는 형식으로 긍정적인 암시를 하면 공장장은 다그치는 한국 기업인에게 “삐에 자오지”(別燥急 : 조급하게 서두르지 맙시다)라고 한다.

한국식 기업운영법 중국선 안 통해

 어쨌든 내가 보전시 구역에서 가장 경제가 발달한 이 지역을 보고 싶어하자 외사처에서는 아주 기뻐하며 기꺼이 협조해주었다. 아침 일찍 역시 시장의 차를 타고 한시간 정도 떨어진 江口鎭으로 갔다. 넓고 푸른 들을 가르며 흐르는 물줄기에서 피어오르는 아침안개와 그 안개 속으로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출근길의 자전거 행렬과 삼륜차와 트럭들은 커다란 한폭의 수채화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하였다. 길옆으로는 리복이나 나이키 등의 신발공장과 장어양식장들이 있다. 이는 모두 대만과 일본인들의 투자로 세워진 것이고 장어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면적 79㎢에 1만6천호의 인구 6만8천명으로 이루어진 강구진은 특히 台胞(대만동포), 港澳居民(홍콩과 마카오동포) 및 싱가포르와 말레이지아 등의 南洋華僑의 투자가 많이 되어 있는데 鎭長은 화교의 존재가 공업 및 경제발전의 기본적인 여건이라고 강조하였다. 화교들은 공장뿐만 아니라 고급중학, 초급중학, 소학 등의 학교도 세웠는데 중국정부에서 설립한 학교보다 시설이 월등히 좋으므로 입학경쟁이 심하다고 한다.

 나중에 나는 다른 지역에서 한국인 투자기업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같은 중국문화를 가지고 있고 현지사정에 정통한 이들 화교와 달리 한국 기업인들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많은 농촌이나 지방정부는 한국 기업을 유치하는데 열성을 보이지만 일단 계약을 체결한 후에는 자국의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방어본능을 강력하게 행사한다. 즉 일단 지역주민이 고용되면 그들에게 주택, 식량, 전기, 수도, 자녀교육비, 보건위생비, 후생복지비, 여행과 체육회 등의 유락활동비, 퇴직상여금 등등의 비용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부담할 것을 요구하며 해고라든가 감봉처분을 회사측이 행사하지 않도록 강력한 제재를 해온다. 생산성 제고를 위한 差等報酬制라든가 破三鐵(鐵飯碗,鐵椅子, 鐵工資)運動은 그들만의 운동이며 한국 기업체에서는 그리 쉽게 실천되지 못하는 것이다. 감독관의 고압적인 권한과 권위에 기반한 우리식의 기업운영은 이내 그들 노동자뿐만 아니라 지역행정관리나 당간부의 항의에 부닥치기 일쑤이다. 이런 일은 즉흥적이고 정확하게 체결하지 못한 계약 때문인지,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우월감 때문인지, 아니면 흔히 말하는대로 자본주의 체제에 생소한 그들의 관념과 작업태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러한 문제의 발생은 한국 투자 기업체에서 특히 많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북경 관리 소개장도 지방에선 별무효과

 황하유역의 중심지인 산동성은 南船北馬라는 말 그대로 노새와 수레가 많고 추운 겨울 때문인지 농촌의 집들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낮고 작았으며 창문도 크지 않아서 안은 언제나 어두었다. 처음 省의 수도인 濟南에 도착했을 때, 미리 연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동대학 초대소로 가지 못하고 齊魯賓館이라는 일급호텔로 안내되었다.

 사실 중국은 외교와 국방에 관한 것은 중앙정부가 관장하지만 그 외의 대외경제활동을 비롯한 많은 사업과 업무에 있어서는 각 성이 자율권을 행사하는 체제이다. 다라서 현지의 인간관계의 망 앞에 북경 관리가 준 소개장은 그 관리가 특별한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 한 그리 효과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현지사람을 소개받아 대동하고 내가 석사학위 논문에서 취급하였던 濟南市 교외의 한 농촌에 대한 비공식적인 방문을 ‘불법적’으로 감행하였다. 레닌과 마르크스, 그리고 모택동의 사진을 크게 걸어놓은 낡은 벽돌집 사무실을 가진 50대 후반의 작달막한 키의 마을 서기는 북경에서 온 듯한 말씨를 쓰는 나를 반신반의하는 눈초리로 대했으며 외부인의 돌연한 방문에 대한 당황함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관계기관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으므로 그는 결국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기가 나서지 않고 대신 나더러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고 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70세가 되는 노부부가 손자를 안고 있는 작은 집으로 들어갔는데 진흙이 굳어진 바닥에 작은 평상을 놓고 그 위에 솜이불이 널려 있는 방에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사진이 찍힌 달력을 한 장씩 오려서 붙여놓았고 손바닥만한 접는 나무의자를 내어놓았다. 내가 모택동 사진을 가리키며 저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무뚝뚝한 말씨로 저“저사람이 우리에게 토지를 줬오”하고 대답하였다. 농민들은 지극히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 품을 팔고 밥을 빌어먹던 이야기, 일본군에게 잔혹한 취급을 받았던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이었다. 적어도 解放은 화북지방 사람들에게 만큼은 더의미심장한 역사과정이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晩婚晩生優育” “沒有共産黨 沒有新中國” 등의 구호가 흰 페인트로 크게 씌어 있는 골목을 돌아 그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집으로 안내되어서 차 대접을 받았다. 주인은 31세의 젊은이로 인근 시장에서 전기제품 수리점을 하는 個體戶였다. 그의 집은 새로 지은 것으로서 장방형의 넓은 공간에는 전화, 彩視(컬러 텔레비전), 세탁기, 전축, 전기밥솥, 조잡하지만 난방용 라디에이터, 소파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펌프 대신 자가용 수도도 설치되어 있다. 그는 한달에 2천5백元의 수익을 올리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데 그의 형은 세탁기 공장의 助理工程師로서 대학교수와 같은 1백70元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제남을 떠나면서 나는 산동대학의 교수들과 만나서 농촌에 대한 종합적인 현지조사를 공동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고 그들은 머뭇거리면서도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중국에서 사회학이나 인류학은 제국주의 학문으로 매도되어 1958년에 폐기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서 회복이 된 관계로 지극히 초창기의 학문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회학자는 거의 없으며 현지조사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매력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해 7월에 약속대로 다시 산동을 찾았고 곧 몇몇 교수들과 농촌답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靑島, 威海, 煙臺 등의 연해지역이나 대도시 교외의 지역과 같이 부수입이 많아서 부유한 지역이나, 내륙에 위치하여 빈궁을 벗어나지 못한 지역을 제외하고 중국 전체에서 중등수준의 농촌을 하나 선정하여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조사를 할 것을 제안하였다.

 우리는 산동성의 중부에 위치한 지역을 답사하였는데 그 지역 공산당 현위원회의 경제부장 직책을 가진 30대의 여자간부의 ‘지시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누차 나의 관심은 보편적 수준의 농촌이라고 호소하였으나 그는 아주 예절바르고 조직적으로, 다시금 발전의 과정이 한눈에 보이는 마을이나 기업가의 흥미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공장으로 데려가곤 한다. 내가 집안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서성거리면 그는 시간이 없다고 짜증이 날 정도로 재촉과 제재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촌락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한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개방적이라 하더라도 외국인이 ‘조사’활동을 위하여 방문한 것이 이지역 역사상 처음인 관계로 한편으로는 어떤 것이 적절한 안내가 되는지 확실한 방침이 서지 않은 까닭이다. 더욱이 그 외국인이 정식수교도 없는 ‘남조선’ 사람이며 그가 원하는 곳이 미개방 구역임에랴. 나는 그들에게 현실에 대한 엄정하고 구체적인 파악만이 진정한 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생활 속에서 같이 자고 먹고 일하고,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인류학자로서 나의 조사 연구가 중국 인민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산동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에 일부러 이 지역을 찾아왔다는 점을 ‘웅변적’으로 설득하였다. 피곤도 하고 열도 받쳐서 나는 毛主席도 ‘下馬看花’(꽃을 제대로 보려면 말에서 내려라)하라고 말했으며 중국이 낙후된 것은 바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담하고 위험한 말까지 해대었다. 그리고는 속에서 불이 나는 술을 거침없이 퍼마시고는 뻗어버렸다.

농민들 습성대로 생활하며 ‘동고동락’

 이틀 뒤 나는 처음으로 현의 서기가 초대하는 식사에 나가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처리방침이 긍정적으로 결론이 났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이틀 동안 뒤에서 간부회의를 한 것이다. 서기는 내가 직설적이고 호탕하며 山東大漢과 같다고 칭찬을 했다. 술을 신나게 퍼마시고 아무데서나 퍼져 골아떨어지는 수호지의 호걸이 바로 산동사람들이 말하는 대장부라는 것인데 이러한 기질을 두고 상해사람들은 조야하고 미련한 산동사람이라고 평하며 이에 대하여 산동사람들은 상해사람을 꽤 많고 쩨쩨하다고 되받아친다. 어쨌든 다음날부터 나는 내가 선택한 한 마을에서 내가 선택한대로 농가에 유숙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늘 20여가지나 되는 희귀한 요리와 비싼 술로 즐기던 식사와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깨끗한 호텔방을 떠나서 먼지로 뒤덮힌 채 바다처럼 출렁이는 옥수수밭에 둘러싸인 촌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더위와 먼지와 어두움과 스러져가는 흙담의 습기찬 냄새의 세계를 의미하며 가난과 인내와 검약의 고통스러운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꿋꿋한 중국인의 현실적 역사의 장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마을에서의 약 40일간의 생활은 단조롭고 제한적이며 배고프고 힘이 들었다. 나는 그들과 때때로 오리똥과 빨래때가 진흙바닥에 깔려 있는 동네 앞의 못이나 개울에서 목욕도 하고 거기서 잡은 고기를 볶아 먹으며 밭일을 돕거나 먼 시장터에 따라가기도 하면서 ‘놀았다’. 그들은 나에게 대답해주기보다는 나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어쩌면 태어난 이래로 똑같이 되풀이 되어 왔을지도 모르는 자신들의 단조로운 생활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파격을 나로 인하여 즐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의 습성을 따라 40일간 속옷을 4번, 겉옷을 2번 갈아입으면서 습관이 되면 그런 식으로 ‘충분히’ 살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떠난 후 그해 10월에 다시 갔을 때 산동대학측에서는 처음으로 외사처 주임과 교장, 그리고 외사담당 부교장이 합석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교장은 국가교육위원회로부터 산동대학이 자율적으로 나를 초청하여 공동연구를 진행해도 좋다는 허가 공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그동안의 나의 ‘행적’에 대한 관찰과 보고를 바탕으로 관계 당국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다시 갔고 12월에서 1월 말까지 40일을 보낸 후 91년 2월 春節(음력설) 무렵에 또 가자 그들은 정말로 감동을 하였다. 내가 그들에게 말한 것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친지가 한데 어울려 보내는 이 명절에 자기집을 떠나서 이역만리 중국의 하찮은 농촌을 찾아온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감동적인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산동대학에서는 나를 객좌조교수로 임명을 해주었는데 그것은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에 중국 국내에서는 국내 교수의 신분과 자격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 했다. 91년 여름 약 50일간의 체류를 위하여 갔을 때 촌 서기는 나의 농촌에서의 생활에 관한 기자의 방문기사가 게재된 인민일보를 유리액자에 끼워서 자신의 집무실에 걸어놓았다. 나의 연구계획서는 국가교육위원회에 접수되어 일급 연구과제로 선정되었다면서 산동대학측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을 해주었다. 이제는 외사처 주임과 수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중국 바로보기’ 필요성 절실히 느껴

 지난 겨울에 이어 금년 여름까지 도합 아홉번에 2백50일이 걸린 방문조사를 통하여 이제 그들과 서로를 ‘친구’라고 말할 사이가 되었고, 중국의 현실에 대한 조금의 감각을 갖고 몇 명의 ‘친구들’과 토론하기도 하였다. 내가 그간의 경과를 늘어놓는 이유는 중국인과 ‘친구’가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되풀이되는 만남과 복잡한 체계적 과정을 거쳐야만 된다는 경험을 말하고자 함이다.

 중국의 한국관계 기관에서는 한국의 주요 일간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또 參考消息이라 하여 외국신문을 발췌 번역해 기관과 고급인물들에게 배포하는 것에는 한국의 정치, 경제, 기업 등에 관한 기사가 실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중국을 다녀간 많은 인사들이 무책임한 글을 신문에 써서 중국 당국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중국은 그동안 한국에 관한 한 데모나 관리의 부정부패에 관한 뉴스만 보도하면서 일본과 북한에 관해서는 우호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식을 전하여 왔다. 이런 속에서 농촌에 있으면 한국인이 단독투자하여 설립한 공장에서의 분규이야기라든가 아무런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意向書 한 장에 모든 것을 기대했다가 문제가 발생한 한국인 투자가의 이야기 같은 게 지방 간부들 사이에 전해진다. 북경대학의 외사처장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과 중국이 아직 미수교상태인데 어떻게 중국의 대학이 본국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을 수 있으며 북경대학이 언제 “한국인을 최초로, 정식으로 초빙 교수로 불러서 한 학기 강의를 부탁했느냐”고 하면서 그러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한국의 일간신문들을 내 앞에 내미는 것이었다. 보다 큰 나라와의 연관성을 내세워 자기 위상을 높이려는 후진국적 행태를 보는 듯하여 부끄러웠다. 문제는 이런 식의 중국보고문은 두 나라 사람에게 서로 오해하는 데만 기여할 뿐이다.

 조사를 마치고 귀국할 때 약통과 두루마리 그림으로 가득찬 짐을 든 채 중국에서 겪은 여러가지 불편함과 부당함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사업을 위하여 고생을 하며 중국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귀국하는 지친 모습의 중소 기업인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중국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과 한·중 간의 올바른 인식을 위한 노력이 지금 확립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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