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감염자가 나섰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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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 간증’ 새 출발 김형철씨 밀착취재 / “더 방치할 수 없는 사회문제”

약혼녀와 함께 벅찬 가슴으로 신혼을 설계하던 92년 3월초, 보사부직원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김형철씨(가명 · 40)는 ‘보사부에서 무엇 때문에 나를 찾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찍어누르며 서울 시내 약속장소로 나갔다. 보사부 직원은 다짜고짜 김씨를 을지로 어느 술집으로 데려가더니 밤 늦도록 술을 권했다. 영문도 모르고 술을 마시던 김씨는 자기를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보사부 직원은 말을 빙빙 돌릴 뿐이었다. 그는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야 김씨에게 에이즈 감염 사실을 통보했다.

어렵게 구한 월세방에 사무실 차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더라고요. 보사부 직원은 ‘당장 죽는 것은 아니다, 곧 치료약이 개발될 테니 희망을 잃지 말라’ 아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죠. 나는 이제 몇 달 밖에 살지 못하겠구나, 오직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술에 취해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떄 내가 밥은 제때 먹었는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당시 경기도 북부 지역의 큰 요정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던 김씨는 약혼녀와 2개월째 동거하고 있었다. 넉넉한 수입에 살림 들여놓는 재미가 제법이던 김씨의 생활은 그날 이후 급전직하했다.

 김씨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러 약혼녀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헤어졌다. 두달간 동거를 했지만 국립보건원에서 검사해본 결과 약혼녀는 감염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사회에 동성연애자도 많고 나보다 성관계가 문란한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지,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세상이 온통 원망스러웠어요.”

 지금도 보건 당국은 에이즈 보균자나 환자를 발견하면 에이즈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를 역추적하고, 감염 이후 성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불러 피검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게 역추적한 결과, 김씨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은 91년 가을 무렵이었다. 속칭 ‘용주골’이라 불리는 경기도 파주군 사창가를 찾았을 때였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만 원래 나는 돈을 내고 성관계를 맺는 매춘을 싫어합니다. 혼자 살고 그러니까 회식하던 날 업소 사장님이 용주골로 데려갑디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떠밀리다시피 들어갔어요. 미군을 상대하는 여자가 많은 곳이라 꺼림칙했지만 술도 취했고 해서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내 기억으로 세 차례 그랬어요. 그때 덜컥 걸려 버린 거죠.”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안 직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김씨는 술에 만취해 자기가 근무하던 요정 사장에게 항의했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지만 그때야 하소연 할 사람이 사장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를 며칠째, 김씨는 공갈협박 혐의로 경찰에 잡혔갔다. 집행유예로 풀려 나기까지 진주교도소에서 2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에이즈 공포만 있지 예방 교육은 없다”
 옥살이를 하고 다시 바깥 세상에 나왔지만 김씨는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살아갈 의욕이 사라졌으니 생활을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한동안 거리를 떠돌았다. 돈은 떨어지고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일자리를 얻었지만 곧 쫓겨나곤 했다. 어렵사리 취직한 요식업소의 사장 귀에 김씨가 에이즈 감염자라는 얘기가 들어간 것이다.

 “본래 그 바닥은 소문이 빠르게 돕니다. 요리사 경력 20년에 이미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졌었거든요. 더 이상 희망도 없는데 차라리 잘됐다, 이제는 될대로 되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때부터 2년여 김씨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또 스스로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철저한 고립무원의 삶을 택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걸식을 하기도 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기도 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외로움과 절망감에서 벗어나려고 수면제를 잔뜩 털어놓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마저 실패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밤에는 정말 미치도록 외롭고 두렵습니다. 일단 발병만 하면 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온 몸이 썩어들어가는 에이즈로 죽어야 한다는 생각, 죽어서도 저주를 받는다는 생각, 그래서 차라리 깨끗하게 스스로 목숨을 끓는 게 낫다는 생각에 잠을 못이루죠. 에이즈 감염자는 아마 공통적으로 불면증에 시달릴 거예요. 소주라도 몇 병 마시지 않으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웁니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들조차 무슨 벌레 보듯이 할 정도니까 본인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길을 걸을 때도 아는 사람 만날까 봐 고개를 숙이고 다녀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건 바로 대화입니다.”

 김씨는 에이즈 보균자(김씨는 아직 환자가 아니다. 보통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5년~10년이 지나야 증세가 나타나며, 그전에는 정상인과 똑같다)로서 2년이 넘도록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삶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절망해 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불면의 밤뿐이라는 빠듯한 계산 때문이 아니다. 에이즈 감염자인 자신이 직접 세상을 향해 에이즈의 위험성에 대해 발언하고 예방 활동에 나섬으로써,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걷어내고 감염자들이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도록 구심점 노릇을 하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씨는 요즘 에이즈 감염자 중에서 가장 바쁘게 의욕적으로 살아간다.

 “에이즈 확산을 막기위해 우리들 감염자가 직접 나서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감염자가 당당하게 나서서 환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고 에이즈 예방 교육에 힘쓰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감염률이 줄어드는 추세 아닙니까. 감염자가 에이즈 예방 활동에 직접 뛰어드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지금까지 에이즈 공포만 가득했지 제대로 된 예방 교육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그렇지 조금만 조심하면 막을 수가 있어요. 나도 무지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요.”

 김씨는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서로를 위로하던 또 다른 에이즈 감염자 오한규씨(가명 · 31)와 함께 지난 6월 둘째주 내내 자신의 사무실 겸 숙소를 마련하느라 뛰어다녔다. 6월10일 김씨는 어렵게 구한 돈 3백만원을 이리저리 쪼개서 구로공단 근처에 월세방을 마련해 전화와 팩시밀리를 가설하고 낡은 타자기 한대를 들여놓았다. 드디어 그들만의 ‘쉼터’를 일구어낸 것이다. 그곳에서 김씨는 벼랑 끝에 몰린 에이즈 감염자들의 절박한 사례들을 모아서, 세상을 향해 에이즈의 고통을 설득하고 에이즈 예방법을 전파하는 중개자 노릇을 할 예정이다.

“또 피해 볼지 모른다” 얼굴 공개 번복
 그러나 에이즈에 관한 사회의 통념상 아직 감염자가 직접 나선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것 같다. 지난 6월7일 《시사저널》 취재진과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김씨는 소설가 김홍신씨와 13대 국회 보사위 의원 이철용씨가 자신의 활동을 지원하기로 한다면, 《시사저널》지면에 얼굴을 완전히 공개하기로 했었다.

 《시사저널》이 주선한 자리에서 김홍신씨와 이철용씨는 김씨의 용기를 격려하고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대담기사 참조), 김씨는 취재 끝 무렵에 처음의 결정을 뒤집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사진은 내더라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간신히 둥지를 튼 쉼터에서조차 쫓겨나 또 다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에 들어가야 할지 몰라 두려웠던 모양이다.

 김씨가 이처럼 결정을 번복한 배경에는 바로 에이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공포와 완고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면, 에이즈 감염자와 악수만 해도 병이 옮는 것이 아니냐는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 따위다. 그러니 뻔히 알면서도 에이즈 감염자를 한 동네에 두고 보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정보가 만들어 낸 편견이다. 지금까지 인류를 괴롭혀온 숱한 전염병 중에 에이즈만큼 감염 경로가 명확히 밝혀진 병도 드물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오직 정액과 질분비액, 그리고 혈액에 의해서만 전염된다. 그밖에 다른 경로는 아직 보고된 사례가 없다.

 가령 도둑이 언제 어디로 침입할지 미리 알면 범행을 사전에 막을 수 있듯이, 에이즈 또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주의해서 행동하기만 하면 비록 주변에 감염자가 있거나 심지어 함께 생활하더라도 완벽한 예방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과학적 근거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수혈이나 태아 감염을 빼고 문란한 성적 접촉으로 감염된 대다수 감염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려놓은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염자가 세상에 자기 신분을 드러낸다는 것은 비록 대의명분이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말처럼 쉽지 않다.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는 다음에야 우리들은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뭐가 두렵겠습니까. 까짓것 남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에이즈 예방 활동에 얼굴 내놓고 나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내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계획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게 뻔하니까 망설여지는 거지요. 당분간 얼굴 없이 활동하다가 멀지 않아 다 드러낼겁니다.”

내국인간 접촉 감염 단계 ··· 무방비 사회
 그래서 김씨는 6월18일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청소년을 위한 에이즈 예방 콘서트에 직접 출연할 예정이지만, 거기서도 얼굴은 가리기로 했다.
 에이즈 예방 활동에 나서기로 한 김형철씨조차 이 정도라면 다른 감염자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주변에 감염 사실이 드러날 경우 도덕적 돌팔매질에 질식당할 것이 뻔한 한국 사회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노출된 경험을 한 대부분의 사람은 기필코 국가의 관리망을 피해 숨어든다. 전문가들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지점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증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94년 5월말 현재 보사부가 공식 발표한 한국의 에이즈 감염자는 3백53명. 그러나 이것은 허황한 숫자 놀음이다. 3백53명은 한국의 전체 인구 중에 에이즈 검사를 받은 특수업종 종사자 등 1백60여만 명에서 추출한 숫자이다. 형식 논리대로 이 비율을 현재 대한민국 인구에 그대로 대입하면 에이즈 감염자는 만명에 육박한다. 물론 이것은 정확한 계산이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의 에이즈 감염자가 보건 당국이 발표한 숫자보다 최소한 10배는 된다고 본다. 그렇게만 따져도 3천명을 넘는다.

 그럴 만한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약 10만명으로 추산되는 동성연애자들, 그리고 전화 한 통화면 어디서고 매매춘이 가능한 섹스산업,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더욱 몰려들 것이 뻔한 외국인들, 한마디로 에이즈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무방비 상태다.

 한국은 수혈이나 외국인과의 성적 접촉에 의한 감염 양상을 넘어서, 이미 내국인간 이성 접촉으로 감염되는 단계에 지나면 에이즈 감염자는 사회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한국 사회는 지금 그 문턱 앞에 서 있다.

 도덕적인 비난을 피해 음성적으로 퍼져가는 에이즈 바이러스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서든 숨어 있는 에이즈 감염자를 국가의 관리망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사회가 감염자의 고통을 포용하는 것만이 음성적으로 번지는 에이즈 바이러스를 막는 지름길인 것이다. 김형철씨는 지금 에이즈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과 감염자를 기피하는 현실 사이에 끼여 있다.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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