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고 ‘핏줄’ 끊는 사람들
  • 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06.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 대만 입체 취재 / 두 도시 韓僑와 화교들 ‘한 맺힌 국적 포기’ 사연

대만 기륭(基隆)시 중정로 500호에 있는 기륭 한국교회.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에서 북쪽으로 약 75km떨어진 곳이다. 한국 교포(韓僑) 신자들이 모인 지난 5월29일의 주일 예배 역시 평소처럼 한국 · 중국 · 일본 세 나라 말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온 金東烈 목사의 한국어 설교가 끝나자, 이 교회 집사인 사청매 할머니(69)가 일본어로 기도를 인도했다. 사집사는 일본 태생이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사는 곳이 대만일 뿐이다. 일본어만 유창할 뿐 한국어나 중국어는 서투르다.

한국 사람끼리 3개 국어 쓰는 기륭시
 교회 강당 뒤쪽에는 1.5평 크기의 작은 방이 하나 있다. 통역실이다. 올해 40세인 鄭永一씨가 예배 내용을 중국어로 통역해 내보낸다. 한국말과 일본말을 못 알아듣는 일부 교포 신자들은 헤드폰을 끼고 정씨의 통역을 경청한다. 한국인끼리 3개 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항구 도시 기륭. 대만 거주 한국 교포들의 애환이 절절히 묻어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통역을 맡은 정영일씨는 한국어보다 중국어와 일본어가 더 유창하다. 직업은 택시 운전기사. 대만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온 이국 생활이 올해로 40년째다. 그러나 정씨는 올해 안에 중화민국 국민이 된다. 지난 5월 ‘국적 상실 신고서’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에 제출했다. 한국 국적으로는 대만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어 오랜 망설임 끝에 내린 선택이다.

 국적을 바꾸는 대만의 한국 교포들. 92년 8월24일 한국과 대만의 국교가 단절된 이후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교포 수는 더 늘었다. 지난 2년간 접수된 국적 포기 신청 건수만 해도 48건에 달한다. 단교 이전 2년 간의 23건에 비하면 두배에 달하는 수치다.

 94년 6월9일 대한민국 인천직할시 선린동 32번지. 한때 청관(淸關)으로 불렸던 일명 차이나타운. 자유공원에서 부두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골목에서 짐보따리인 듯한 가방을 둘러메고 발길을 재촉하는 한 중국인을 만났다. 閻明騰씨. 올해 37세의 화교다. 그는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 2천5백여명(실제 거주 인구는 1백50명 안팎으로 추산됨) 화교 중 한 사람이다.
 염씨는 인천-위해를 운항하는 배를 타기위해 여객 터미널로 가는 길이다. 중국 위해로 가는 화교. “배에서 이틀 밤을 잔다. 위해에 내렸다가 두 시간 후에 인천으로 오는 배를 다시 탄다.” 그는 인천에 다시 오기 위해 위해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한국 거류증이 없다. 지난 81년에 거류증을 포기했다. 지금은 대만과 한국을 오가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한국 체류 허가 기간은 15일뿐. 오늘이 체류 마지막 날이다. 위해에 갔다 오면 또 15일 동안 한국에서 장사를 할 수 있다.”

 염씨는 인천 북성동에서 태어난 화교 2세다. “아버지는 열여덟 살 때 인천으로 배 타고 건너와 벼루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차이나타운에 정착했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올해 쉰아홉인 어머니는 지금도 북성동에서 산다. 아버지는 선린동 차이나타운의 ‘전설적인’ 중국요리집 共和春에서 15년 동안이나 월급쟁이 생활을 했었고, 강원도 정선으로 옮겨가 짜장면집을 하기도 했다. 내 나이 네 살 때였다.”

 화교 친구인 ㅊ씨(39)는 염씨의 고교 동창이다. 염씨처럼 역시 대만에서 대학을 나왔고, 지금은 소규모 사업을 하고 있다. ㅊ씨는 “대학 졸업하고 인천에 돌아와 중국 식당에서 8년 동안 일했다.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한다. ㅊ씨는 친구 염씨와는 경우가 다른, 이른바 ‘F2' 거류증을 소지한 정상적인 화교다. 3년 동안 한국 거류가 가능하고, 3년이 지나면 거류 기간을 또 3년 연장할 수 있다.

 ㅊ씨의 친구인 한국인 ㅅ씨는 화교였다. 대만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한 경우다. ㅊ씨는 국적을 바꾼 친구 ㅅ씨를 이해할만하다면서도 “핏줄은 못 속인다. 나는 귀화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물만두집을 하면서 ㅅ씨는 큰돈을 벌었다. 사업을 키우려면, 또 재산을 보호하려면 국적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ㅅ씨는 한국으로 귀화해 지금까지 한국에는 없었던 ‘ㅅ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ㅅ씨 외에도 국적을 바꾼 화교의 예는 또 있다. 서울 소공동에서 중국음식점 취영루를 경영했던 곡덕영씨의 경우 지금은 서울 논현동으로 자리를 옮겨 냉동만두 사업을 하는 등 기업체를 운영하는 한국인이 되어 있다.

 서울과 타이베이, 그리고 인천과 기륭의 1994년. 두 도시들의 짝짓기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수도와 항구 도시라는 지리적 공통점만이 아니라, 현재는 단교 상태이지만 두 나라의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교민들의 삶의 모습은 서로 떨어져 있는 분신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92년 8월14일 한국과 대만이 단교하자 대만의 한교협회와 한국의 화교협회가 4개월 만인 그 해 12월14일 자매결연한 것은 동병상련의 한풀이 같은 예식이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할 수 없었다”
 국적은 핏줄이다. 대만에 사는 한국 교민 정영일씨는 그 핏줄을 바꾸기로 결심하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무엇이 그를 20년 동안이나 망설이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핏줄을 ‘부인’하게 만들었는가.

 정씨가 걸어온 삶의 궤적 40년에는 온통 파편뿐이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아버지(鄭用錫)는 해방 한 해 전인 44년 ‘여권도 없이 국내 여행하듯’ 배를 타고 대만에 건너와 기륭에 정착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공습을 받고 바다에 가라앉은 비행기를 끌어올리는 막노동이 첫번째 일이었다. 아버지 정씨는 기륭에서 일본 여자와 결혼해 55년 아들을 낳았고, 그가 정영씨이다. 정영일씨의 어머니(미야시로기쿠 · 71)는 현재 일본 오키나와에 산다.
 정영일씨는 70년 고급중학(고등학교)을 중퇴했다. “당시로서는 큰돈인 등록금 4만5천원이 없어서였다. 상선을 탔다. 키잡이였다. 2천t짜리에서부터 4만5천t짜리까지 안 타본 배가 없고, 중국과 소련만 빼고는 안 가본 데가 없다. 싱가포르에서 6개월 체류하는 동안에는 배수리 작업을 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배에서 내려 결혼한 것이 82년. 아내는 대만 여자였다. “결혼 후에는 전자기판 절단 작업을 하는 전자공장에서 3년, 식당에서 그릇닦기로 5년, 식당 지배인도 해봤다. 또 2년 간의 레코드 세일즈맨 생활도 했다. 먹고살기가 빠듯했다. 외국인 거류증을 가지고 있는 한 내 꿈인 기술공무원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세일즈맨 생활을 청산하고 택한 택시 운전대도 더 이상 잡기가 힘들게 되었다. 외국인 취업복무법 때문에 취업허가증인 ‘工作허가증’이 없이는 일을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큰아들 琦龍이가 벌써 아홉 살, 소학교 1학년이다. 열 아홉 살 때 딱 한번 가본 한국에 피붙이라고는 없다. 있다해도 누군인지를 모른다. 뿌리 내릴 곳은 내가 나서 자란 대만이다.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디에서든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임장달이라는 친구가 충고도 해주었다. 큰일은 천천히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중국 부인을 얻은 그 화가 친구는 대만 정부에서 다섯번이나 문화상을 받은 유명한 문화계 인사다. 생활에 어려움이 없으니 한국국적을 버릴 이유가 전혀 없다.”

 정씨는 한국말을 잘 모르는, 교민 3세 아들 기룡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공부를 많이 하든지, 돈을 많이 벌든지 둘 중 하나다. 그래야 산다. 아니면 국적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94년 6월 현재 대만의 타이베이 · 기륭 · 고웅 등지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교포 수는 천여명이다. 유학생 1천5백여 명, 주재상사 직원과 그 가족 5백여 명을 뺀 이른바 순수교포이다. 교포 1세들은 20년께부터 대만에 발을 붙이기 시작했다.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전쟁물자 운반선의 선원, 인삼장수, 기술자, 노동자, 학도병 등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만5천명에 가까웠다. 광복후 재력이 있거나 한국에 연고자가 있는 사람들은 귀국했고, 연고자가 없거나 경제 사정이 여의치 못한 사람은 눌러앉았다. 한국전쟁은 이 잔류 교민들의 가냘픈 귀국 희망마저 앗아가버렸다.

 대부분이 막일꾼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국에서 건설업과 태권도 관계로 대만에 오는 한국인 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80년대에는 국제 결혼한 사람과 유학생이 많아졌다. 순수 교포와 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의 대만 교포사회는 70년대 이후 대만 땅을 밟은 이들이 주도해 간다. 대만에서 태어난 교포 1세 문씨 할아버지(75)는 이들을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문씨 할아버지 내외는 자식도 없다. 국적을 바꾸면 양로원에도 들어가고 연금 혜택도 받을 수 있다. 문씨 내외는 “아직은 (국적을 바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장담하지도 못한다”라고 한마디 보탠다. 문씨 내외 같은 1세들의 진정한 아픔은 이제 비로서 시작되었다. 경제적 고통이 아닌, 국적 포기냐 아니냐의 기로에 선 ‘핏줄 땡기는 아픔’을 겪기 시작한 것이다.

“따뜻한 눈길만 있으면 그만”  
 한국에 사는 일부 화교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없는 화교가 한국의 화교’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일제 때 한국 땅의 화교는 10만명까지 추산된 적도 있었다. 이들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때가 제일 격감한 시기다.
 지금 인천의 차이나타운에는 과거 화려하게 번창한 자취가 없어진 지 오래다. 공화춘 · 중화루 · 송죽루 등 유명했던 중국 요리집은 문을 닫았거나 명맥만 유지한다. 백년이상 된 중국식 건물과 군데군데 문 앞에 내걸린 바랜 彩球(붉은색 장식 종이등) 한두 개만이 바닷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차이나타운의 아리따운 화교 아가씨들이 드나들었던 목욕탕 華淸池도 지금은 용정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린동에서 金橋百貨라는 잡화상을 운영하는 화교 周?良씨(36)가 여태껏 짝을 찾지 못한 채 총각으로 남아 있는 것도 옛날의 차이나타운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주씨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는 화교가 늘고 있다. 이제는 화교 여자와 결혼하는 화교 남자가 이상할 지경이다”라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중국인 최대의 명절인 쌍십절에 학생손을 잡고 화교 학교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학생 어머니는 한국 여자다. 인천 북성동의 중국음식점 중화루에서 지난 1년 동안 결혼식을 올린 화교 신랑은 약 30명. 이중 단 한쌍만이 신랑 신부 모두 화교였고, 나머지는 한국인 신부였다.

 한성화교협회 외무부회장인 난신곤씨(67)는 韓中法務中心이라는 법률회사를 차려놓고, 국제결혼이나 부동산 매매에 따른 법률 관계 일을 보고 있다. 서울의 경우 화교 신랑들은 주로 여의도의 신동양대반점, 용산 크라운 호텔 별관, 남산의 동보성 등 중국음식점을 결혼식장으로 이용한다. 이들에게 결혼식장 안내도 해준다는 난씨는 “화교 신랑이 한국 아가씨와 결혼하는 경우는 약 70%”라고 말한다.

 한국의 화교와 대만의 한교는 점차 교민으로서의 응집력을 잃어가고 있다.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외국인’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현지 생활에 완벽하게 편입되지 못한 상태다. 대만 한교의 공작증 발급과 거류 시한 문제, 한국 화교의 사업장 평수와 음식값 제한 문제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양국 단교가 이들의 삶에 ‘가시’노릇은 했을망정 생존에 위협을 가할 만큼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만큼 이국땅에서 자국민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셈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정치적 배려도 경제적 지원도 아니다. 따뜻한 눈길만 있으면 그만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