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흘러도 ‘감정’은 남는다
  • 타이베이·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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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교 2년, 정부 고위층 · 지식인 반한 골 깊어… 한국과 항로 단절 기간 ‘최장’

 ‘韓따스’와 ‘韓따이표’. 92년 8월24일 대만 정부가 한국과 단교를 선언한 다음 단교 전과 후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호칭이다. 韓 따이표(代表)는 대만 정부 관계자들이 타이베이 주재 한국대표부의 韓哲洙대표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한대표는 88~90년에 주대만 대사를 지낸 적이 있다. 그때의 호칭은 韓따스(大使).

 단교후 양측은 서로 민간 차원의 대표부를 개설했다. 대표부(MISSON)는 외무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KA) 소속의 민간 기구일 뿐이다. 93년 12월 대표부가 개설된 이후 한대표는 대만 외무부의 錢復 부장(외무부 장관)을 만나보지 못했다. 서울 광화문빌딩에 입주해 있는 주한 대북대표부의 대표도 韓昇洲 외무부장관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양측 대표부는 자국민 보호와 비자발급 등 영사 업무를 보고 있다.

 한국에 청천백일기가 게양될 수 없듯이 대만에도 태극기가 걸리지 못했다. 중화민국 대외무역발전협회(CETRA) 건물 앞의 만국기 게양대에 태극기가 다시 나부끼게 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 일이다. 대만인의 반한 감정이 드높았던 단교 직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지금도 타이베이의 일부 택시 기사는 한국인 관광객의 승차를 거부한다.

 타이베이 교민 손복규씨(59)는 “대만인들이 겉으로는 단교의 아픔을 잊어버린 것처럼 허허대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에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중국인은 쉽게 잊는 기질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대표부의 한 관계자도 “아직도 정부 고위층과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반한 감정이 심하다. 실무자들도 행정 처리를 질질 끌면서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한다.

 한국에서도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수난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대만을 대접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한 중국대사관측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서울의 명동상가번영회가 주최한 명동축제 때의 일이다. 명동 곳곳에 만국기가 펄럭였다. 청천백일기도 휘날렸다. 중국대사관이 이에 항의했다. 대만기를 떼어달라는 것이었다. 청천백일기는 내려졌다. 화교 ㅎ씨는 이 일을, 한국인의 대만인을 전혀 대접해주지 않는, 그래서 결국 대만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이유야 어쨌든 이미 게양됐던 중화민국 국기를 떼어내는 것까지는 좋다. 한국의 입장도 이해한다. 그러나 밤에 슬쩍 떼든지 거두어서 한곳에 모아두는 정도의 아량이나 배려가 있어야 했다. 비가 오는 날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내 대만기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한국에 오는 대만 관광객이 한 해 평균 14만명이다. 한국의 화교야 그렇다 치고 그들이 한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익 챙기더라도 자존심은 안 밟았으면”
 주한 대북대표부의 한 관계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무리한 요구를 한국 정부가 요령있게 막아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대만인의 감정이나 상하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한국더러 자국의 이익을 챙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익은 챙기되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지는 말아달라, 조금만 신경을 써달라는 것이다.”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옆에 자리한 화교 소학교에는 지금도 대만 국기가 게양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대사관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인천 선린동의 화교학교에만 대만 국기가 게양되어 있을 뿐이다.

 서울-타이베이간 항공 노선이 끊긴 것은 단교 직후다. 대한항공 · 중화항공 등 4개 항공사가 취항했던 노선이다. 지금은 외국 항공사만이 이 노선을 운항한다. 타이베이 시 남동로에는 지금도 대한항공 타이베이지사가 사무실을 열어놓고 있다. 廉始宗 지점장을 비롯해 본사 직원이 3명이고 대만 현지 여직원과 영업부 직원 등 모두 20명이 근무하고 있다. 염지점장은 “대만인의 감정의 골이 깊어 원상 회복은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희망이라면 정상 상태를 되찾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대만은 단교한 경험이 ‘풍부’하다. 물론 항공노선 단절의 노하우도 많다. 일본 항공사 저팬 아시아는 일본이 대만과 단교한 지 1년 4개월 만에 도쿄-타이베이 노선을 복구했다. 노선이 끊긴 지 2년이 가까워오기까지 복구가 안된 채 장기화한 사례는 우리가 처음이다. 그 이유를 염지점장은 “단교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고 너무 껄끄러웠다. 그 때문에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 여기에는 한반도 정세도 한몫한다”라고 지적했다.
타이베이·李興煥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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