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먹고 자란 일본 우익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6.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성황후 시해에서 호소카와 피격까지 ‘100년사’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10일 16일 간의 일정으로 미국 방문길에 나섰다. 일왕이 태평양전쟁 때 교전국인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히로히토 전왕에 이어 두번째이다. 아키히토 자신도 왕세자 때에 이어 두번째 미국 방문이다.

 그런데 아키히노 일왕의 이번 미국 방문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첫째는 일왕이 하와이에 도착하는 23일 ‘오키나와 위령의 날’과 겹친다는 이유에서다.

 오키나와 위령의 날이란, 오키나와 상륙 전투 때 희생된 사망자 20만 명의 위령제를 지내는 날이다. 일왕 아키히토는 하와이에 도착한 다음날인 24일 현지의 태평양전쟁 기념묘지에 헌화할 예정이다. 그런데 일본 우익들은 왜 하필이면 그 날 하와이를 방문하느냐고 불만이 대단하다.

 두번째는 일왕의 하와이 방문 일정에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한다는 예정이 잡혀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애리조나 기념관이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 희생된 3천여 장병을 추모하여 세운 기념관이다. 일본 외무성은 전후사를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이 기념관 방문을 적극 추진해 왔다. 그 대신 내년 일본에 들를 예정인 클린턴 대통령도 히로시마 원폭투하 기념관을 방문토록 미국측에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난 3월 이 일정이 공표되자 일본 우익 단체들이 벌떼처럼 외무성과 궁내청을 공격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아키히노 일왕이 먼저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하면 ‘진주만 공격은 선전포고도 없는 비열한 기습이었다’는 미국측의 역사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들은 또한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희생된 미국인은 전투원에 국한됐으나 히로시마 · 나가사키에서는 무고한 민간인이 대량 살상되었다는 점을 들어 미국측 사죄가 먼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원폭 투하를 사죄한 적이 없는데 왜 천황이 먼저 진주만 공격을 사죄해야 하느냐 하는 얘기이다. 일본 우익들의 거센 반발로 외무성은 지난 5월 결국 일왕의 애리조나 기념관 방문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아키히토 일왕의 미국 방문에 앞서 5월30일 우익의 발포 사건이 있었다. 호소카와 모리히토(細川護熙) 전 총리를 노린 계획된 범행이었다. 호소카와 습격이 우발적사건이 아니라는 증거는, 작년 8월 이른바 ‘침략 전쟁 발언’ 이후 우익들이 벌여온 농성 · 총격 사건이 7건에 이른다는 점이다. 일본 우익단체들은 그가 총리 직에서 물러날 때를 기다려 습격 기회를 엿보아 왔다는 셈이 된다.

9백80여 단체에 회원 12만명
 전직 총리가 퇴임 3개월 만에 우익의 총탄 세례를 받고, 또 그들의 압력에 의해 일왕의 일정이 바뀌는 일본은 과연 우익들의 천국인가.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일본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일본 우익의 규모는 약 9백80개 단체에 12만명 가량이다. 그 중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수는 2만3천명 정도이다. 물론 한 사람이 여러 단체를 거느리고 있다든지 여러 단체에 중복 가입한 경우가 있어 경찰청도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익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익단체에 가입돼 있는 구성원은 2만1천여 명에 불과하다. 이른바 ‘본류 우익’을 자처하는 자가 3천명, ‘행동 우익’으로 분류되는 자가 1만5천명, ‘신 우익’인 자가 3천명이다. 그밖에 민족파 학생단체와 반공단체에 가입한 사람까지 모두 합해야 12만명쯤 된다는 것이다.

 그 중 본류 우익은 전쟁 전에 있던 玄洋社 · 黑龍會 등의 흐름을 이어받은 그룹이다. 주로 기관지를 통해 천황제국가 · 헌법개정 · 반공 · 군비증강 등을 주장한다. 자민당 정권 시절 막대한 정치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이 그룹의 큰 특징이다.

우익 전범들, 총리 · 막후 실력자로 출세
 현양사는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81년 야쿠자 출신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세운 비밀결사이다. 그후 정계와 손을 잡은 그는 초국가주의자로 변신해 반체제파를 탄압하는 선두에 섰을 뿐 아니라, 1895년 현양사의 1분대를 서울에 파견해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데 적극 협력했다. 현양사라는 이름도 따지고 보면 그의 출신지인 후쿠오카와 한반도 사이 바다를 가리키는 현해탄에서 따온 말이다.

 흑룡회란 도야마의 부하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1901년에 세운 단체이다. 우치다는 만주와 러시아 국경에 있는 흑룡강의 이름을 빌려 도야마가 조선 합방에 앞장섰듯이 중국 침략의 첨병 노릇을 했다.

 그들은 1919년 대일본국수회를 조직해 정우회라는 정당의 준 군사조직으로 암약하면서 총리 · 대장성 대신 등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도야마는 일본의 패전하기 직전인 44년 89세로 사망했으나, 지금도 우익 단체나 야쿠자 사무실에는 빠짐없이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만큼 우상 같은 존재이다.

 옛 우익, 즉 본류 우익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큰 시련을 맞았다. 군인 · 재벌과 함께 전쟁을 수행한 장본인으로서 미점령군 사령부에 체포되거나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일본공산당 등 좌익 세력의 준동과 한국전쟁, 60년 안보투쟁을 거치면서 옛 우익들의 복권과 함께 이들의 암약기가 도래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은 ‘A급 전범’ 트리오인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기시 노부시케(岸信介)이다.

 패전 직후 똑같이 ‘A급 전범’으로 몰려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온 이들은 고다마와 사사카와가 정계의 막후로, 기시는 자민당 총재 및 총리로 출세하면서 패전 전과 같은 우익과 정계의 검은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50년 기시를 주축으로 자유당이 결성됐을 때 고다마가 준비 자금으로 7천만엔을 제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72년 록히드 사건이 터질 때까지 자민당 정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고다마는 본래 도야마의 부하였다. 전쟁중에는 일본군의 물자조달 겸 첩보 기관인 ‘고다마 기관’을 창설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패전 후에도 그는 이 자금을 무기로 기시뿐 아니라 고노 이치로(河野一? : 현 자민당 총재의 부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등 당시의 세도가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우익의 거물 고다마와 자민당의 유착은 60년 일 · 미 안보조약 비준 파동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자민당은 6월 아이젠하워의 방일을 앞두고 방일 반대 데모가 극성을 떨자 그에게 호위 부대를 조직해 주도록 요청했다. 고다마는 자민당으로부터 8억엔의 자금을 지원 받아 우익 · 야쿠자 등 1만8천명을 동원할 예정이었으나 아이젠하워의 방일이 취소됨에 따라 그 계획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도호쿠 복지 대학의 호리 사치오(堀幸雄)교수는 “안보투쟁 때까지는 지배체제를 수호하는 폭력 장치로써 우익이 용인된 시대였다”라고 분석한다. 한 우익 단체의 회장도 “그때는 정치가를 찾아가면 군소리 없이 용돈을 집어 주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자민당과 우익의 검은 유착관계는 사실상 자민당 정권이 무너진 작년까지 끈끈히 이어져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한 예로 66년 제정된 ‘건국기념일’, 79년의 ‘원호법’, 81년의 ‘북방영토의 날’ 그리고 각종 학교에서 의무화하고 있는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제창은 모두 우익 진영의 주장을 자민당 정권이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다.

 또 87년 가을의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일어난 ‘황민당 사건’도 자민당의 친우익 체질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이다. 이 사건은 다카마쓰 지방에 본거지를 둔 ‘황민당’이라는 우익 단체가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를 ‘돈 잘 버는 다케시타를 총리로 보내자’고 공격한 사건인데, 이때 다케시타 진영이 수십억엔을 황민당측에 건네고 입막음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 사건은 그후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으나 당사자들이 부인하여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케시타는 그후 총리 재직 때에도 히로히토 왕의 수술 결과를 따지는 우익의 거물을 총리 관저로 불러들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옛 우익, 즉 본류 우익은 고령화와 사망 그리고 자민당 정권의 붕괴로 차츰 세력이 약해지고 있다. 대신 신우익이라 불리는 새로운 그룹으로 세대교체가 진행중이다.

 70년 11월의 ‘미시마 사건’이 바로 신 우익을 잉태한 계기이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자위대 연병장에서 헌법 개정과 재군비를 외치면서 할복 자결하자 민족파 우익 세력은 “일본 유신운동의 돌파구가 열렸다”고 이를 극구 찬양했다. 미시마를 추종하는 이세력들은 그후 본류 우익의 체제 옹호 자세를 부정하고 반체제 · 국가 혁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 본류 우익이 친미반공노선과 일 · 미 안보조약 견지 등 현체제의 유지 · 존속을 주장하는 데 비해 신 우익은 얄타 · 포츠담 체제에 의해 형성된 현 체제의 타파를 주장한다. 그들은 미 · 소 양대국에 의한 전후 세계의 분할 지배를 ‘얄타 체제’라고 규정한다. 또한 일본의 점령 체제가 ‘반 천황 · 반 민권 · 반 국가적 전후상황’을 잉태했다고 보고 이를 ‘포츠담 체제’라고 규정한다.

‘좌우 대립’에서 ‘우우 대립’으로
 따라서 일본 패전 후에 형성된 헌법 · 안보 · 정당 · 신 좌익 등은 모두 얄타 · 포츠담 체제로 파기하라고 주장하는 점이 본류 우익과 크게 다르다.
 이들 신 우익의 대표적 인물로는 一水會의 스즈키 구니오(鈴木邦男), ‘바람의 회’의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가 유명하다. 특히 노무라는 77년 ‘얄타 · 포츠담 체제타도 청년 동맹’을 결성해 재계의 총본산인 게이단렌(經團連)을 습격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우익의 표적은 주로 닛교소(日敎組)나 좌익, 천황 비판 세력이었는데 체제에 대해 처음으로 도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노무라는 결국 작년 10월 아사히 신문사를 찾아가 권총 자살을 결행했다. 《주간 아사히》의 풍자 만화를 둘러싼 마찰이 표면적인 이유이나 실은 체제 유지를 주장하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 자세에 대한 불만이 그 배경이다. 올 4월에는 이 권총 자살을 구실로 2명의 우익이 아사히 신문사를 점거하기도 했다.

 본류 우익과 신 우익이 ‘사상 우익’으로 규정된다면 나머지 우익 단체는 곧잘 ‘행동 우익’으로 분류된다. 확성기로 군가를 틀어가면 가두선전차를 몰아대기 때문이다.

 이 행동 우익은 법망을 피해 우익 단체로 위장하고 있는 야쿠자 조직이나, 기업의 주주총회를 돌며 돈을 뜯어내는 총회꾼 그룹 등 여러 그룹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들도 천황제 국가나 반공을 표방한다는 점에서는 여느 우익 단체와 다를 바 없다.

 호소카와 총리에게 공포를 발사한 범인이나 4년 전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은 있다”라고 발언한 모토시마 히도시(本島□等) 나가사키시 시장을 저격한 범인들이 바로 이 행동 우익 단체의 구성원들이다. 또 2년 전 북한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펼쳤다고 가네마루 신(金丸信) 전 자민당 부총재를 저격한 범인도 똑같은 행동 우익 출신이다.

 한·일 간에 마찰이 일어날 경우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 행동 우익들이다. 즉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 나타나 반한 구호를 외친다든지, 주일 한국 언론기관에 협박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대개 이들이다.

 일본 우익의 내일은 어떨 것인가. 신 우익의 대표적 논객인 스즈키 구니오는 “반공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실한 일본 우익들은 결국 ‘좌우 대립 시대’에서 ‘右右 대립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예상한다. 즉 극우와 온건 우파가 피의 항쟁을 벌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