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 대중가요 껍데기만 ‘화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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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게ㆍ랩 등 ‘장르’는 다양, 내용은 부실



 한국 대중 가요의 핵 분열인가, 음반업계의 불황 탓인가, 아니면 전체를 제압하는 강자가 없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든 간에 한국 대중 가요는 백화제방 시대를 맞고 있다. 94년 가요계는 다양한 장르가 각종 인기 순위 차트에 골고루 포진하는 보기 드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 가요계에 나타난 대중 음악 장르는 7개 정도로 나뉜다. 92년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대중 가요계를 덮다시피 했던 랩이 듀스ㆍ모자이크ㆍ노이즈 같은 댄스 그룹을 통해 명맥을 잇고, 김건모라는 스타를 앞세운 레게가 임종환과 닥터레게를 거쳐 ‘그룹 룰라’로 이어지면서 올 상반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들어 신승훈이 이끄는 발라드 장르는 이상우ㆍ신효범ㆍ윤종신이 배턴을 이어받았고, 주변 장르로 밀려났다고 평가되는 트롯도 <립스틱 짙게 바르고>의 임주리와 <밀회>의 최유나로 이어져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게다가 80년대의 ‘그룹 들국화’와 ‘봄여름가을겨울’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던 록이 ‘그룹 부활Ⅲ’과 김종서ㆍ강산에ㆍ전일식이라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지닌 가수들을 통해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중 음악 장르는 25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것 같다. 70년대 초반처럼 록음악 붐이 다시 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조용필은 새 음반에 록을 담겠다고 밝혀 록의 화려한 재등장을 예고한다.

 재즈풍 노래는 김현철이 부른 <달의 몰락>을 통해 바람을 일으켰고, 포크는 한동준이 대를 잇고 있다. 지난해에는 언플러그드 음악과 김수희가 등장해 댄스 음악 일변도의 대중 가요에 등을 돌렸던 성인층을 일시적이나마 가요계로 끌어들인 데다, 인공위성과 같은 아카펠라 그룹이 등장해 가요계의 장르를 풍성하게 했다.

 다양한 장르가, 그 질과 내용을 따지기에 앞서 외형적으로나마 가요계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는 현상은 보기 드문 것이다. 60년대 이후 트롯ㆍ록ㆍ포크 등 몇 장르가 공존하기는 했지만 장르 숫자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이문세가 등장한 87년께부터는 발라드가 가요계를 휩쓸다시피 했다. 발라드는 92년 랩을 대중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가요계를 평정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댄스 음악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가요계를 주도해온 발라드와 랩의 자리를 다양한 음악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가요 음반 제작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장르가 가요계를 휩쓸고 있을 때는 가수의 성향을 살리는 기획 자체가 원천봉쇄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최근 랩 그룹 룰라의 음반을 기획한 나인기획의 이상석씨는 “8년째 이일을 해왔지만 올해 같은 상황은 처음 맞았다. 지난해까지 가수에게 개성에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기 일쑤였다”라고 말했다. 신승훈과 김건모의 음반을 기획한 라인기획의 김창환 실장도 같은 의견이다. “각 장르를 이끌어나가는 유능한 가수들이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색깔로 승부를 걸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도 장르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졌고 자기가 하고 싶은 장르를 찾아 완성도를 높이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이다.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는 획일화에서 벗어나는 가요계의 판도에 대해 랩을 중심으로 흩어지는 바람직한 핵 분열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최근의 경향은 60년대말 미국 팝계와 아주 유사하다. 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정점을 사회성을 띠었던 록은 재즈 록ㆍ클래시컬 록ㆍ라틴 록 등 예술성을 담는 록으로 바르게 분열해나갔다. 구심이 해체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국악 음악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수요층의 기호가 변화한 데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임씨는 ‘한 장르의 독재’는 가요계의 병폐였다고 지적한다. 제작자와 가수들에게는 만들기 싫어도 주도 장르의 음반을 만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입맛을 지닌 수용자들에게는 한 장르의 음악만을 강요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그것이 음반시장에 불황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대중 가요는 ‘씹다 버린 껌’인가
 자기 주장이 강하고 개성을 최고로 가치로 내세우는 이른바 신세대의 다양한 입맛에 맞추다 보니 가요가 외형적으로는 다양한 옷을 걸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양성 자체가 92년 5월을 기점으로 시작된 음반시장의 불황에 연유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키즈 온 더 블록’ 소동과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뒤로 시작된 불황을 두고 “한국 음반산업 역사상 이렇게 침체가 심한 때는 없었다”라고 음반 제작자들은 말한다. 가요계의 다양화 현상이 사실은 내용 없는 춘주전국시대에 불과하다고 보는 동아기획 대표 김 영씨는 “겉보기로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질까지 다양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김씨에 따르면, 92년까지 레코드산업은 팽창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80년대에 소방차ㆍ김완선ㆍ박남정으로 대표되는 댄스 음악을 보면서 자란 어린이들이 음반 수용층이자 구매층으로 등장하면서 불황이 시작되었다. 20, 30대라는 탄탄한 구매층이 빠져나가고 음악성보다는 외모와 춤 솜씨를 앞세우는 ‘메뚜기 부대’가 가요계를 덮어버렸다. 가수들은 길어야 3개월밖에 존재하지 않는 반짝 스타들로 넘쳐나고, 가요는 자극적이고 빠른 템포만을 원하는 수용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음반을 구입하는 계층은 주로 국민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이다. 선별과 비판 능력이 없는 그들은 새로운 것만을 찾는다. 지금 나타나는 대중 가요의 다양화는 그들의 기호를 따라가다 보니 생겨난 일시적인 것이다. 지금은 가요계가 잠자고 있다고 보아야 옳다.” 김 영씨는 94년 현재 대중 가요 음반은 ‘단물이 빠지면 버리는 껌’과 같다고 본다. 겉으로는 장르가 다양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자기 음악 세계를 펼치려는 가수나 음반 제작자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 별난 것만 찾는 데다 단물이 빠지면 뱉어버리는 ‘꼬마 구매자들’의 식성을 맞추는 데서 나온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탕주의를 앞세우는 개인 음반제작자들이 음반업계를 주도하는 것이 이와 맞물려 있다고 김씨는 말해다. “대중 음악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시류에 영합해 단칼에 승부를 보려는 제작들이 음반업계의 90%가 넘는다. 보따리 장수인 그들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가요계를 떠나 버린다. 일확천금을 노려 자극적인 새로움만을 찾는 꼬마들의 입맛을 맞춰나가는 것이다.”

 새롭고 자극적인 것만 찾는 어린 수용자들이 음반 구매자로 등장한 것이 음반 시장 자체의 질을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된다. 겉으로는 음악이 다양해 보이지만 다품종 소량 판매에서 소품종 다량 판매로 시장 질서 자체가 바뀌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트롯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가요의 수용층은 적극적으로 음반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음악 평론가 강 헌씨는 “뛰어난 몇몇 개인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 음악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 반대로 지금 음악은 대단히 다양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장르라는 이름을 내세워 포장만 다양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록을 한다고 하지만 록 정신을 담은 그룹은 궤멸되었다. 포크를 한다는 한동준과 김광석 또는 발라드에 기대어 포크를 한다는 상품 카피로 쓴 것이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적 접근에 비하면 지금은 음악적 영감이 고갈한 시대이다”라고 강씨는 분석한다. 진정한 아티스트로서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실험에 축적하고, 그것이 여러 갈래로 터져나오면서 형성되는 것이 대중 음악의 발전을 이끄는 진정한 다양성이다. 문화방송 라디오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최석기 프로듀서는 이렇게 분석한다. “지금의 다양성은 거목이 없는 자리에서 자라는 잡초이다. 대중은 더 큰 스타를 기다린다.”

 가요는 대중 음악이라 불린다. 그러나 가요계의 대중은 지금 10대 초반에만 해당될 뿐이다. 대중 음악계에서 논의되는 다양성은 10대 성향에서 비롯되는 다양성일 뿐 음악 자체의 다양성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뼈를 깎는 수업기를 거쳐 개성 있는 음악성으로 모든 세대를 포괄하는 큰 가수가 드물기 때문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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