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에 더 많은 자유를
  • 정리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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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 예전에는 하객을 가장하고 한끼 때우려는 사람들이 결혼식장으로 모였지만 요즘은 북한 연구 세미나장으로 몰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최근 3~4년 사이 시내 유명 호텔에서는 북한 연구 세미나가 계속 열릴 정도로 북한 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북한 연구 또는 북한학이 필요한 시대이지만, 실제 북한 연구 현황을 보면 새로운 연구 풍토가 절실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북한학은 통일 연구를 위한 학문에 치중되어 왔습니다. 이럴 경우 북한을 적대적인 집단이나 흡수 대상으로 설정하기 쉽습니다. 북한 연구가 통일에 대비하는 학문으로 규정될 경우 지나치게 정책 지향적일 뿐 아니라 규범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그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학을 통일 연구로서보다는 가치중립적인 지역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종석 : 상호 이질적인 체제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제도와 사회 운용 논리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또한 단일공동체로 발전하는 동북아 지역 연구에 필수 영역이지요. 북한 연구는 이데올로기와 체제 수호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실향민이나 정보 기관에 있던 이들이 북한 연구 1세대로 자리잡기 시작해 90년대 들어와서야 북한 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했지요. 지금은 과거의 왜곡된 연구 풍토를 바로잡고 북한학을 정치 수단의 영역에서 학문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과도기라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에 등장한 북한연구 3세대는 1세대와 절연된 상태에서 진보와 보수를 넘어 과학으로서의 북한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지식이 정설로 통해
전 : 결정적으로 ‘뿔난 도깨비’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도 50년대입니다. 57년 고려대에 아시아문제연구소가 설립되고 69년 국토통일원이 발족함으로써, 귀순자 증언이나 홍보 강연 차원에서 벗어나 연구지향적 성격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초 정부 지원을 받아 대학이나 언론기관에 부설 북한연구소가 생기고 북한을 다루는 잡지가 몇몇 출현했습니다. 연구비의 국가 의존도가 높을수록 북한 연구가 일방적으로 정부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할 여지가 많다는 폐단이 있습니다. 반독재 · 반미 운동과 함께 순수 민간 차원의 북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 90년대입니다. 이른바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원전을 처음 보기 시작하고, 주체사상이 소개되고, 방북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도 자진해서 북한 원전을 공개하는 등 맞불을 놓았는데, 그 결과가 91년 4월 북한 연구의 두뇌 집단 격인 민족통일연구원을 세운 것입니다.

이 : 분명한 것은, 과거에는 북한 연구의 중심이 해외였지만 지금은 국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을 쓰고 전업으로 북한 연구를 하는 전문가는 20~30명밖에 안됩니다. 큰 문제입니다. 통일 전 서독이 동독 연구를 엄청나게 했는데도 지금 저렇게 어려운데, 우리는 북한 연구를 돕는 사회 분위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학 정치학과에는 대부분 북한 정치 전임교수가 없습니다. 학부 수준으로는 동국대에 처음 북한학과가 몇몇 특수 대학원에 북한학이 설치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연구 분야를 통일관련학으로 내걸고 있는 연구소도 있으나 실상을 알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전 : 우리 사회가 북한 연구의 필요성을 얘기하면서 북한 연구를 한계의 비주류로 취급하고 북한 전문가를 졸속 양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 유명 대학 교수가 통일원에서 프로젝트나 몇 개 하고 나면 졸지에 북한 전문가가 되고, 이들이 유포하는 확인되지 않은 지식이 언론을 통해 재생산되어 정설로 자리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언론이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김일성을 얼마나 여러 차례 죽였습니까. 북한에서는 지금도 한국 사람들이 가짜 김일성 설을 믿고 있는 줄 압니다. 북한 연구가 학문이 아니라 정치라는 인식이 생긴 것도 그런 일들이 반복된 결과입니다. 보십시오. 북한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김일성은 저렇게 건재하고 있습니다. 통일원에서 1년에 수백 편씩 논문이 나오지만 다 똑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북한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중요하게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직전까지도 대부분 언론이나 급조된 전문가들은 ‘안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결정적인 순간 김일성이 택했던 실용적인 외교 노선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이런 예단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북한 역사나 관행을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보는 한 민족 통일의 과정을 투명하게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전 : 실정법과 학문 간의 마찰이 거의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것이 북한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나 정보가 독점되고, 이것이 정책의 독점을 낳음으로써 대안적 선택이 원천적으로 막히는 현실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 제가 가지고 있는 북한 관련 서적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적물이지요. 그리고 베끼기가 북한학처럼 심한 분야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인용했는지도 모른 채 정설이 되고 매스컴이 재생산하는 행태가 반복되는 거지요. 예를 들어 조선노동당이 언제 마르크스 레닌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아는 것은 북한 사회의 기본 논리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난 20년 동안이나 ‘노동당이 창당된 것이 46년이니까 으레 그때겠지’하고 그렇게 쓰였다가, 56년 3차대회 때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최근입니다. 북한 사회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46년설은 상식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 하나만 교정하는 데도 너무나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전 :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까지 북한 연구가 이론적 틀을 가지는데는 너무 취약했습니다. 북한이 ‘갈 수 없는 나라’임에는 틀림없지만 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아닙니까. 그리하여 비록 구미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개발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사회과학 이론과의 접합은 시도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김정일 승계를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북한 사회의 통합력을 뒤르켐과 파슨스의 이론으로 읽어낼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울러 북한의 특수성을 강조하기보다 북한을 비교역사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체사상을 모택동 사상과 비교해 보거나, 북한 사회의 변화를 중국이나 베트남과 비교해 보려는 시도도 이루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선 50년대부터 한국 연구
이 : 최근의 일부 북한 연구가 선호하고 있는 ‘내재적 접근’을 지적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재적 접근이란 북한의 처지에서 북한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지금은 북한이 어떤 상태인지 지도조차 그려지지 않은 실정에 비추어 볼 때 내재적 접근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고, 또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내재적 접근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내재비판적 접근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아까 북한 연구의 이론화 작업을 말씀하셨는데 북한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모델이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전문 연구자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실사구시적 연구 자세를 통해 자료 습득과 분석 능력을 키우고 역사 공간을 복원하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을 짙은 안개 속에 가두어 놓고 예단을 즐기는 무책임한 태도부터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매스컴이 북한 사회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와 경멸의 대상으로 심화시키는 데 일부 북한 전문가가 동원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전 : 몇몇 언론이 자기 식의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정부와 국민을 끌고 가려는 행태는 통일 과정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 연구가들이 이에 활용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료와 정보의 민주적 배분, 자유로운 연구 풍토, 북한 연구 주제의 다양화가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이 : 북한 연구의 빠른 발전을 막고 있는 중요한 장벽은 자료 활용의 제합입니다. 자료는 연구 활동을 가능케 하는 식량과도 같은데, 우리는 법적으로 북한 자료에 접근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료 보유 기관의 폐쇄성 때문에 자료 교환 체계가 거의 전무합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북한 자료를 구하느라 야단입니다. 일본의 북한 연구자로서 《조선전쟁》을 쓴 바 있는 하기와라 료를 만났는데, 그는 김정일이 처음 등장하는 계기가 된 67년 5월의 당4기 회의록을 구하느라 소장 학자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에서 북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정보기관에 자료를 요청해도 언제나 거절당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귀순자에 대한 정부 기관의 1차 심문조서를 요청했더니 안된다는 겁니다.

전 : 저는 귀순자 인터뷰의 가치를 아주 낮게 보는 사람입니다. 주민 인구조차 비밀에 부쳐진 나라에서 넘어온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증언을 하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 지식이 다 거기 살 때 배운거냐, 여기 와서 배운 거냐’ 하니까 얼굴이 벌개지더군요. 북한 사회는 유언비어가 극심한 사회입니다. 특히 최고 지도부에 대한 것은 대부분 루머거든요. 귀순자들은 우리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다 알고 대답하기 때문에 반드시 크로스 체크를 해봐야 합니다. 북한의 한국 연구 현황은 어떻습니까?

이 :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한국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50년대초 해방지구라 할 수 있는 개성에 송도정치학교를 세우고 한국 출신 학자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연구를 시키기 시작했으니까요. 본격적 학문으로서라기보다는 대남정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산하에 한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있고, 그밖에 남조선문제연구소에도 약 5백명 정도 전문 인력이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가 북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나 지식보다 북한이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월등하다고 봅니다. 북한의 최고 지도부에 비해 한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상대적으로 정보와 지식이 취약하기 때문에 파생하는 문제는 여러차례 목격되고 있습니다.

이 : 사실입니다. 최근의 북한 정책을 보더라도 북한이 한국을 비교적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서라도 방북팀은 북한 주민의 정서, 김일성의 담화 스타일 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삐걱대지 않고 얘기를 풀어 나가고, 따낼 것을 따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한만큼 1인 결정권이 강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정리 ·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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