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部 세력분화 ‘3일천하’ 재촉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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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부는 보수, 장교 · 사병은 개혁성향 … 군내 반체제조직 ‘방패회’도 활약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18년 1월 소련군의 전신인    을 창설하면서 레닌이 그 군기에 새겨넣은 구호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마지막 구절인 이 구호를 신생 소련군기에 새겨넣으면서 그는 볼셰비키혁명의 전진을 다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는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조국을 위하여’라는 구호로 대체되고 말았다. 1942년 당시 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스탈린에게는 세계혁명의 이상보다는 소련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여 ‘조국’을 구해내는 것이 당면과제로 되었던 것이다.

 ‘세계를 뒤흔든 3일’이라고 불러야 할 지난주 소련의 쿠데타 기간에 소련군은 어떤 것이 조국에 대한 진정한 충성인가라는 실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 결과는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방측 소련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소련군 일선 장병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군부의 최고지도자들과 선택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번에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에는 실질적으로 소련군의 각 부문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망라돼 있었다. 소련군은 명령계통을 ㄷ라리하는 세 분야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각 공화국에서 징집된 장병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방부 소속 연방군과 국내치안을 주로 담당하는 내무부 소속 군부대,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국경경비대 및 특수부대(스페츠나즈) 등이다. 쿠데타 지도부였던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목상의 중심 인물인 야조프 국방장관, 크류츠코프 국가보안위원회의장, 푸고 내무장관, 바클라노프 군사회의 제1부위원장이 군 · 군수산업 · 보안기관의 대표들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의 소련사태는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서방 군사전문가들은 쿠데타군의 주요 전력으로 내무부 소속 특수임무부대인 MVD와 KGB 소속 병력을 지목했다. 미국의 정보소식통들은 19일의 모스크바 시내 진입은 주로 연방군 소속의 공수부대와 MVD · KGB 소속 부대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관측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8월 21일자 <르 몽드>지는 쿠데타세력이 동원한 병력 수를 내무부 소속 30만명, KGB 소속 23만명을 합쳐 도합 50만명 정도로 추산한 바 있다.

 내무부 소속인 특수임무부대 MVD는 주로 민족분쟁 진압에 동원되었던 부대로, 특히 87년에 창설된 오몬부대는 분규현장에 투입돼 악명을 떨쳐왔다. 올 1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서 발생한 학살사건도 ‘검은 베레’라 불리는 이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민족분규 때 맹위 떨친 특수부대 맥못춰
 문제는 여태까지 민족분규 현장에서 맹위를 떨쳐오던 이들 각군 소속 특수부대들이 이번의 경우에는 맥을 못추었다는 점이다. 특히 쿠데타 초기 모스크바에 파견된 군부대들 중 옐친 지지로 돌아서는 부대가 속출하면서 쿠데타군의 예봉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임스 세르 영국 옥스퍼드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쿠데타군의 이같은 동요는 사태 초기 군장성들이 회합을 갖고 국민들에게 발포하지 말 것을 요구한 데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획일적이었던 소련사회가 다양한 분화과정을 겪어온 것처럼 그동안 군내부에서도 개혁정책을 둘러싸고 다양한 세력분화가 진행돼온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둘러싸고 군내의 장성그룹과 대령 이하의 영관급을 중심으로 한 일반 사병그룹 사이에 커다란 입장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1일자 <르 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개혁파 군장교인 샤밀 니키프 대령은 “군부를 사회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군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총체이다”라고 주장, 사회의 변화과정에 군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했다. 또 러시아공화국 의회의원인 세르게이 유첸코프 소령은 “소련사회에서 다원주의가 대두하면서 군도 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군 내부에서도 일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고르비 이전부터 개혁 필요성 인식
 원래 군은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부터 소련사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세력 중의 하나였다. 안드로포프가 이끌던 KGB가 일찍부터 체제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해왔던 것처럼 군부도 또한 그 필요성을 느껴왔던 것이다. 일본 청산대학교의 소련문제전문가 데라타니 교수는 군부의 이런 자각이 서방측과 군사하이테크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던 소련군의 처지에서 연유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군은 소련사회의 다른 부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과학 기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소련사회의 사회경제적 침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서방측과의 경쟁에서 결국은 패배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방과 대등한 경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사회경제 전반의 하이테크 수준이 동시에 높아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제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당시 군이나 KGB, 그리고 공산당의 일부 간부들이 생각했던 개혁은 현재와 같이 급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기존체제 유지를 전제로 한 개혁이었다. 그러나 위로부터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는 일단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참여가 분출하기 시작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서서 진행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군부와 군수 산업들은 군축과 국방비삭감으로 인해 피해를 받아왔고, 또 신사고외교에 의한 일방적 군축이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약화시켜왔던 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여기에 페레스트로이카 진행과정에서 터져나온 민족분규와 연방의 해체 위기, 사회적 혼란 등이 가증돼면서 여태까지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오던 군부 및 KGB 상층부는 지난해 연말부터 공산당 내의 보수파와 손을 잡고 강경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 8월 20일로 예정됐던 신연방조약 조인을 앞두고 쿠데타라는 형태로 터져나온 것이다.

 그러나 군부나 KGB 등 기존체제 상층부의 보수적 입장과는 달리 영관급 장교들이나 KGB 말단조직들에서는 소련사회의 개혁은 지속돼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3월 일본 시사주간지 ≪아에라≫의 다오카 슌지 기자는 서방측 기자로는 드물게 바이칼군과구의 소련부대를 취재,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군 장교들의 의식변화를 추적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소련장교들과 대화를 하며 느낀 것은 고르바초르의 개혁노선이 군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르 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와 인터뷰한 소련군의 한 고급 장교는 소련경제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실패한 것은 모든 것의 세부까지 계획이 가능하다는 믿음 대문이었다. 예를 들어 철을 몇 만튼 생상한다든지 하는 계획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못을 얼마나 생산해야 하는가까지 계획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의 영향으로 군내에서도 사회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간으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특히 영관급 이하 군장교 및 사병들의 이러한 개혁성향은 이번 쿠데타의 실질적인 현장인 러시아공화국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고, 이미 군부내 개혁파 세력들이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 주변에 결집하는 양상도 나타났었다. 지난해 러시아공화국 인민대의원 선거에서는 군부 개혁파인 루츠코이 대령과 볼고노프 장군 등 옐친파 군인들이 대의원에 당선됐고, 올 6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선거에서는 군부대내의 선거에서조차 루츠코이 대령을 러닝메이트로 한 옐친이 군부 보수파인 그로모프 내무차관을 너링메이트로한 리슈코프 전 총리를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쳤다.

 개혁파 군 장교들에 따르면 이번 쿠데타 과정에서 쿠데타군이 옐친파로 가담하게 된 데에는 공군대령 출신이자 아프간 전쟁의 영웅인 루츠코이 현 러시아공화국 부통령의 쿠데타군 사병들에 대한 호소가 주효했다고 한다. 이들은 군내부 자료 및 정보를 사전에 파악해 쿠데타 세력의 사전 움직임을 포착해낸 바 있고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에는 쿠데타군의 내부 분열을 주도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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