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옐친!옐친!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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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93cm 키에 알맞은 거구. 온몸에 배어 있음 직한 격한 감정이 금세라도 폭발할 듯한 표정.

단정히 빗어 넘긴 억세고 흰 머리카락. 보리스 니콜라예비치(소련어의 존대 호칭법에 따라 사람들은 엘친을 그렇게 부른다)가 일명 모스크바의 백악관으로 불리는 러시아공화국 의사당에 출동한 탱크 위에 올라가 쿠데타에 항의하는 군중들에게 “끝까지 저항하라”며 연설하던 모습은 소련역사는 물론 세계사의 한 장으로 영원히 남게 됐다. 이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가 “깊숙한 러시아”라고 부른 ‘혹독한 우랄’출신의 이 정치인은 쿠데타 저지의 1등공신으로 떠올랐다.

 ‘태풍을 몰고다니는 사나이’ ‘늑대’ ‘괴짜’ ‘일은 망치는 사람’. 세계의 언론은 이미 고르바초프의 장래는 물론 소련의 장래와 세계의 장래도 이 ‘떠오르는 샛별’에 달려 있다고 단정하기 시작했다. 그가 1917년 레닌이 케렌스키를 축출했듯이 고르바초프를 축출할 것인가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탈볼셰비키혁명’의 1단계 마무리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으로부터 74년. 3일천하의 쿠데타가 실패한 지 3일만에 소련은 이 ‘선동 정치인’의 주도 아래 ‘탈볼셰비키혁명’의 제 1단계를 마무리 했다. 고르바초프 연방대통령이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했고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해체됐다.

 지난 24일 서기장직을 사임하면서 발표한 고르바초프의 성명은 쿠데타 좌절 직후인 23일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에서 한 그의 연설과는 내용이 판이하다. 물론 옐친의 압력 때문이다. “공산당과 정부를 좀더 신뢰할 수 있는 쪽으로 개편할 것이며…우리는 어떤 종류의 반공 히스테리도 막아야 한다…공산당의 재산을 박탈하는 문제는 앞으로 논의를 거쳐 결정해야 할 것이다…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러시아 공화국 공산당 전체가 쿠데타에 가담하고 그것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라던 그의 연설문은 “공산당 서기국과 정치국은 ㄴ이번 쿠데타에 맞서 대항하지 않았으며 당 중앙위원회도 쿠데타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고… 당 지도부가 쿠데타 음모자들에게 포위돼 있었으며, 다수의 공산당 위원회 및 대중언론 기관들이 국가범죄 행위를 두둔했다”로 바뀌었다.

 이로써 좋은 직장을 보장해주고 자녀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으며 특별히 생산된 물건이 진열된 특수점포를 이용할 수 있는 데다 경비원이 지켜주는 호텔에서 싼값에 휴가를 즐길 수 있는 특권의 상징인 공상당원의 ‘붉은 수첩’은 한낱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소연방 내의 모든 건물과 은행구좌는 물론 신문까지 소유하던 소련공산당은 지난 2년간 11억루블(4억2천만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지난 18개월 동안 4백20만명이 당원증을 반납했다. 인구 2억4천만명 가운데 1천5백만명밖에 안되는 당원들에게도 이제는 억압과 경제파탄의 상징이자 과거시대의 범죄와 오류의 책임자라는 낙인만이 찍히게 됐다.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사임과 중앙위원회 해체 발표 이전에 소연방 면전의 70@를 차지하는 러시아공화국에서는 공산당 활동 금지령이 내렸다. 그리고 각 공화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처들이 계속 취해지고 있다. 이로써 1990년 봄에 있었던 발트3국의 독립선언과, 같은해 6월 러시아공화국의 주권독립선언으로 시작된 연방와해 움직임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소비에트주권공화국연방‘으로 바꿀 것으로 보인다.

 옐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일은 더 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가운데 한 사람이 有故 때는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맡기로 했다. 국영 텔레비전 사장도 해임됐따. 79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볼셰비키의 입노릇을 하던 <프라우다>를 비롯한 6개의 공산당기관지가 정간과 함께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떠오르는 대중 선동가’가 연방대통령의 권한을 휘두른 것도 있따. 고르바초프가 합법적으로 임명한 국방 · 내무 · KGB 책임자가 에프게니 샤포슈니코프, 빅토르 바라니코프, 바딤 바카틴으로 하룻만에 경질 됐다. 러시아공화국 영토 내의 모든 통치권을 주장하는 그는 또 공화국 내에 있는 공산당 및 연방 소속의 KGB에 대한 비밀문서 압수령도 내렸다.

 천막에서 공동행활을 하던 가난한 노동자의 장난이라는 출생성분. 학업성적은 늘 5점 만점에 5점을 받았으나 ‘사건’이 날 때 마다 주동자 노릇을 해 아버지의 무서운 회초리를 맞곤 했던 성장과정. 석공 · 직공장 감독 · 협동조합 엔지니어 및 책임ㅈ, 스베르들로프스크 무기산업 책임자라는 경력을 가진 옐친이 아파라티크(고급 관료) 최고자리에 올라 안이하게 특권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만들어낸 스탈린시대에서 소련을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자 한 힘은 무엇인가.

 “그는 기질적인 혁신주의자다.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늘 변화를 기다려왔다. 고향인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서기로 있을 때, 황제 가족이 암살됐던 집을 보고 사람들이 제정러시아를 회상하는 것을 안 옐친은 불도저를 보내 그 집을 없애버렸다. 이는 그가 과거지향이 아닌 변화와 미래지향적 인물임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라고 소련문제 전문가이자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카리에르 당코스 여사는 분석한다.

 스베르들로프스크 지방의 당서기 시절 옐친은 스타브로폴 지방의 당서기인 고르바초프와 식량과 목재를 교환하면서 알게 됐고 그에 의해 85년 7월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거쳐 12월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모스크바 시장)가 될 때까지 그는 원색적인 말투에 감정의 폭발을 억제하지 못하며 논쟁에 서투른 사람이었다. 이 러시아 오지의 우랄공대 건축과 출신 스포츠맨이 소련 역사의 한가운데서 서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다.

 사상의 자유가 억제된 속에서 공산주의가 엘리트 관료의 특권을 통해 소련인민에 ‘봉사’하고 있을 때인 86년 2월, 정치국원 후보로 당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조직의 힘과 지도층의 특권 속에 도사린 모순과 비리를 보고 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가 변화의 이름으로 ‘새로운 계층’을 들먹였던 것처럼, 흐루시초프가 특권을 공격했기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처럼, 옐친은 당 중앙위원회 동료들의 분노를 일으켜 87년 10월 모스크바 당 제1서기와 정치국원 후보직에서 해임된다. 날카롭고 창백한 얼굴로 아무데서나 격정을 폭발시키는 ‘사귀어서는 안될 인물’이 된 옐친은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자신이 옹호해온 체제가 ‘개혁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 체제 파괴의 대안이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자신의 운명과 지도자들을 결정할 권리와 이에 대한 책음을 규정해주는 민주주의임을 엘친은 깨닫는다. 89년 체제 밖에 있을 때부터 엘친은 이같은 자신의 ‘체제’를 조잡하지만 타고난 웅변가 · 선동가답게 나름대로의 논리로 설득하기 싲가했다. 89년 3월 6백만 모스크바 시민의 압도적 지지에 의해 러시아공화국 대의원으로 다시 체제 속으로 돌아온 옐친은 ‘진정한 민주교육’을 위해 언행일치를 결심한다. 90년 7월 ‘레닌당’과 결별할 때 그는 “제국시대는 끝나고 모든 국민은 자율적 결정권이 있다”고 설파했는가 하면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탱크로 밀고들어가 살상을 저지른 소련 집권세력의 의지와는 반대로 국가 대 국가조약 서명을 강행했다.

 인간적 사회주의를 위해 고르바초프가 불을 당긴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 · 우스카레니에(작업의 가속화)의 결실로 변화를 원했던 엘리트들과 최고 지식인들이 점차 그의 곁으로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데이비드 에이크만 기자는 이같은 현상이 “소련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좌절을 그가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고르비 퇴장의 필연성과 옐친의 과제
 89년 대의원 피선 이후 국내에서 그의 인기가 급증하는 데 반해 서방세계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못된 사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용모와 매너가 서구화됐고 매력적이며 세련되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고르바초프가 소련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대화가 통하는’ 인물로 서방 지도자들의 호감을 한몸에 받고 있던 데 반해,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직전인 금년 6월까지만 해도 프랑스를 방문한 옐친은 그곳의 냉대에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러시아가 민주국가가 되고 유럽식 민주국가가 되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라고.

 무모했기 때문에 그 만큼 용감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받는 옐친에 대해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는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나갈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옐친은 경제개혁에 대한 이론이나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바가 없다. 그러나 작년 11월 러시아공화국이 추진하기로 한 5백일 경제개혁안을 통해 그 일부를 짚어볼 수 있다. 5백일안은 샤탈린안이라고도 하는데 시장경제로의 급진적인 전환을 담고 있다. 그 주요 골자를 보면 가격 개혁은 모두 시장기능에 의해 가격이 형성되도록 하며, 단지 과도기 동안에만 5백~1천5백개 정도의 생필품과 서비스가격을 동결한다는 것이다.

 보수파의 3일천하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오자마자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실패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이라고 했으나 그가 원했던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은 아니었다. 공산당과 군부에 불어닥친 페레스트로이카 바람은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으며 당 · 군 · 경찰 속에서조차도 이같은 상황은 벌어지고 있었다.

 엘리트 관료를 더 선호한 고르바초프, 옐친이 없었다면 그런 인물을 만들어냈을 고르바초프에게 옐친은 몇 달 전부터 동유럽에서처럼 보수 · 개혁파 간의 대화정치를 제안해온 바 있다. 세바르드나제 전 외무장관과 야코블레프 전 고르바초프 고문이 주도하는 민주개혁운동 등을 위시해 공산당을 탈당한 민주세력이 앞으로 옐친과 어떤 위상을 갖느냐 하는 점이 주목된다. 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됐을 때 개혁을 들고나온 사실을 극찬한 옐친은 “민주주의가 싹트는 불안정한 총체”인 오늘의 소련을 당분간 고르바초프와 함께 끌어나갈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연방인민의회 정원의 3분의 2는 공산당과 그 부속기관이 임명해왔다. ‘신뢰받는 당’의 당수로서 앞으로 옐친이 이뤄내야 할 과업 중 제2단계는 민주개혁을 위한 연방인민의회대의원 선거다. 모순투성이의 신연방조약안을 러시아공화국에 유리하게 해석해온 옐친이 대내외적으로 그만한 대안이 없는 고르바초프와 얼마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협력할 것이다. 단 <르 몽드>의 평가처럼 엄청난 개혁의 주인공인 고르바초프라는 정치인의 중도하차가 필연성을 띠는 것처럼 개혁을 급진적으로 끌어나갈 옐친의 앞날에 어떤 도전이 있을지는 아직 예측불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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