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개발 전쟁 속, 중소기업은 맨손
  • 김상익 기자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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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 · 인력 절대부족에 허덕 … 정부지원 확대 ·기업 연구풍토 개선돼야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중소기업의 장래에 대해 “성장의 기회와 전락의 위기가 등을 맞대고 있다”고 말했다. 불과 6개월 전에 나온 신제품이 ‘구닥다리’로 취급될 만큼 기술혁신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기업과 기업 국가와 국가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중소기업의 사활은 그같은 변화에 얼마나 신속히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천 남동공단에 입주한 ㅈ엔지니어링의 경우를 보자. 지난 79년 설립된 이 회사는 맨처음 VTR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톱니바퀴 제조 및 조립 회사로 출발했다. 돌리기 되감기 빨리돌리기 등 단추를 누르면 VTR이 그 명령대로 작동되도록 연결하는 톱니바귀 부품을 국내 가전제품 회사에 줄곧 납품해왔는데 얼마전부터 그것만 가지고는 사업이 어려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래서 새 품목 개발에 눈을 돌렸다. 판단이 늦었다면 이 회사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수출이 부진하고 내수시장마저 일본제품에 잠식당하는 요즘 톱니바퀴 관련 전자부품의 월 매출액은 10%이상 감소, 평소보다 1억~2억원이나 줄었다.

재벌회사엔 몇 천억씩 특혜
 이 회사가 새로 개발한 품목은 이른바 첨단 반도체 부품. 인쇄회로기판에 트랜지스터 · 저항 등의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시작했다. 기존의 축적된 기술을 이용, 자동차 유리창을 여닫는 스위치와 깜빡이의 자동점멸장치도 생산했다.

 그러나 인건비가 오르고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단순조립에 한계가 느껴졌다. 생산라인의 자동화가 절실해졌다. 일본에 가서 알아보았지만 기술이전은 하지 않고 기계를 팔려고만 했다. 스스로 기술개발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 회사는 90년부터 자동화사업부를 두고 자동조립기계 개발에 나섰다. 연구인력을 뽑고 중소기업진흥공단에 기술개발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90년 12월 상공부 산하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2억6천만원의 자금을 지원받았따. 5억원을 신청했는데 절반 가까이 잘려 나갔다. 그러나 “그나마 받은 것이 다행”이라는 것이 이 회사 관계자의 말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중소기업이 국산화 촉진 · 생산성 향상 · 원가절감 · 국제수지 개선 등에 기여하는 기술개발을 추진할 경우” 기술개발자금을 지원하고 있따. 아주 새로운 제품ㅇ르 개발한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지금 생산되는 제품만이라도 더 값싸고 더 좋게 더 빨리 만들어낼 수 있다면 감지덕지다.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개발자금은 업체당 최고 3억원이며, 중소기업체가 연구개발에 성공하여 이를 사업화하고자 할 경우 다시 최고 4억원(시설자금 3억원 운전자금 1억원)까지 싼 이자로 빌려준다. 연구개발자금의 대출기간은 5년, 연리는 6.5%이다. 사업화 자금은 연리 9%이며 이중 시설자금의 대출기간은 8년, 운전자금은 3년이다.

 올해 정부가 책정한 기술개발자금은 모두 5백30억원이다. 불법 택지분양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한보와 같은 회사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몇천억원의 ‘특혜’가 베풀어지는 마당에 3백~4백개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에 지원되는 자금은 고작 5백30억원바껭 안되는 것이다.

 6월말 현재 중소기업에 지원하기로 결정된 자금은 총예산의 70%를 웃돈다(49쪽 표 참조). 심사과정에서 대상업체를 거르고, 지원금액을 깎았는데도 남은 6개월을 위한 잔고가 30%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지원자금의 절대부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때문에 자금지원 실무부서는 안팎곱사등이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중소기업체에서는 “왜 이리 까다롭게 구느냐”고 아우성이고, 위에서는 대출자금이 부도날 경우 “잘 보고 줘야지”라며 구박이다. 기술개발이란 것이 착수했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닌 만큼 위험부담‘이 큰 데다 자금 규모가 워낙 적다보니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개발비 감당 못해 부도 위기 맞기도
 중소기업은 자전거에 비유할 수 있다. 자전거는 자동차에 비해 힘은 달릴지 몰라도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전거는 두 다리로 쉬지 않고 폐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게 마련이다. 기술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 아래 작은 규모나마 연구소를 설치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느 중소기업체가 늘고 있으나 페달 밟을 힘이 워낙 부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기술개발의 페달을 밟는 두 다리는 자금력과 연구인력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자금을 동원하고 연구인력을 확보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반월공단에 있는 ㄱ금속공업은 자동차 부품 2백50여가지를 생산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서모스타트’이다. 서모스타트는 엔진과 냉각기 사이에 장착돼 있는 부품으로, 엔진이 과열되면 스스로 통로를 열어 냉각기의 물이 흘러들도록 해 엔진을 식혀 주는 노릇을 한다. ㄱ금속공업은 자동차 회사들이 수입해다 쓰던 이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서모스타트는 20여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조립했다. 그러나 기능인력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 자동조립기계 개발에 나서 인력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생산설비 자동화 이후 4~5명이 달라붙어서 하던 일을 한사람이 거뜬히 할 수 있게 됐다. 불량률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ㄱ금속공업은 현재 서모스타트의 핵심소재라 할 수 있는 밀납(왁스)의 국산화를 구상중이다. 밀납은 일정온도가 되면 팽창하는데 이 힘으로 냉각수 통로를 열어준다. 지금까지 밀납은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ㄱ금속공업이어렵사리 확보한 연구인력은 모두 16명. 이중 대학원 졸업자는 3명뿐이고 나머지는 이공계 대학 졸업자이다. 석 · 박사가 즐비한 대기업의 연구소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우수두뇌가 대기업으로 몰리는 현실 속에서 연구원을 이나마 확보한 것이 대견스럽다.

 이 회사는 최근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기술개발자금 1억6천6백만원, 사업화자금 2억8천만원을 지원받았다. 다른 중소기업체에 비하면 정부의 신세를 톡톡히 진 셈이지만 이 정도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는 업체가 많기 때문에 다음에 또 언제 ‘차례’가 돌아올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술축적이 안되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므로 자체자금으로 꾸준히 연구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ㄱ금속공업은 그동안 매출액의 5~7%를 연구개발에 투자해왔다(우리 기업의 평균 기술개발 투자비율은 약 1%). 그렇다고 투자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 회사는 3년 전 연구 개발비를 감당 못해 부도 위기를 맞을 뻔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연구개발 투자에 조시스러워진다고 한다.

“생산이 전제되지 않는 기술은 유명무실”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 “기술개발만이 살 길이다.” 누구나 하는 말이다. 중소 기업ㅇ느 부품류를 주로 생산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탄탄하면 자동차 · 전자제품 등 완제품의 수출경쟁력이 강화된다.

 재벌회사들은 “왜 우리에겐 일본의 니콘과 같은 중소기업이 없는가”라고 한탄하지만 이것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없지 않다. 재벌은 확장논리에 따라 중소기업의 영역을 마구 침범, 자기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왔다. 정부가 나서서 중소기업 고유업종을 지정, 여기에 참여하는 재벌회사의 사업이양을 추진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이같은 상황을 말해준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창업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중소기업이 클 수 있도록 뒤를 돌봐주는 데는 인색하다. 91년의 중소기업 구조조정자금 예산은 모두 2천6백억원이었는데 이중 80.8%가 상반기중에 사용됐다. 6개월만에 1년 예산이 거의 바닥난 것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최근 92년 예산을 3천3백억원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같은 상황에서 중소기업의 기술집약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연구풍토에 문제가 있다는 적도 있다. “생산이 전제되지 않는 기술은 쓸모가 없다. 연구자들이 생산현장과 유리된 채 첨단이론을 화려하게 펼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일본이나 독일의 ‘박사’들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이것을 배워야 한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기술개발부장이 꼬집는 한마디다.

 정부의 지원만을 기다리며 스스로 연구개발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그같은 기업은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바가지물을 공급해야 펌프가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있듯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에 대한 정부 지원이 충분할 때 중소기업의 투자의욕도 샘솟을 수 있다는 것이 자금갈증으로 허덕이는 ‘현장’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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