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댕 보고 놀란 가슴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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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경악실색케 만드는 것이 쿠데타이다. 로마제정기에 제국 각지의 군대가 멋대로 황제를 폐립한 시기가 있었다. 서기 235년부터 50년 동안 게속된 ‘군인황제 시대’의 18명 황제 가운데 천수를 누린 사람은 2명뿐, 쿠데타가 쿠데타를 부른 그 군사적 무질서와 내란시기의 사람들은 어지간히 놀랐겠다는 생각이 든다.

 군대가 국가를 방위하지 않고 거꾸로 국가를 향해 일격을 가하는 정변은 일상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변괴 중의 변괴이다. 불셰비키의 ‘3일천하’라고도 부르고 ‘3일간의 탈선’이라고도 일컫는 소련정변에 대해 한국땅에 사는 우리들은 남다른 반응을 보인 구석이 없지 않다. 소련 ㄱ쿠데타는 모스크바 군구사령관 칼리닌이 지휘하는 최소 3개 사단 병력이 모스크바에 진입하고, 발트군구 사령과 크즈민이 지휘하는 공수부대가 발트3국에 들어가고, 오데사의 KGB공수단이 레닌그라드에 출병하는 등 전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초동단계에서 수백대의 탱크가 모스크바 대로에 진입하는 것만 보고 우리들 가운데서는 소련 신군부의 핵이 될 법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8인방이 전권을 장악한다고 망설임없이 예단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쿠데타라는 것은 은밀하게 계획된 후 별안간에 감행되어 국가권력을 전복하는 모반행동이므로 그 결과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데 우리 전문가들이 보수파의 승산은 불문가지라고 속단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웬일일까.

웬일로 보수파의 승산은 불문가지라고 점쳤는가
 중국공산당 정변이나 ‘천안문 폭란’을 염두에 두고 소련 정변의 향방을 점쳐본 사람도 나왔다. 중국에서 일어난 대립과 정변 가운데 현상적으로 근사한 예가 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전야인 66년 4월에 대군까지 동원하여 숨가쁘게 진행된 ‘상해중앙’과 ‘북경중앙’의 대결사태였다. 문혁을 발동한 상해의 모택동 · 임표 일파가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북경의 유소기 · 등소평 일파에 대항하는 형세 속에 임표의 심복대장인 양성무는 군을 이끌고 북경에 도착하여〈인민일보〉북경방송〈신화사통신〉을 힘으로 접수해버렸다 ‘반혁명수정주의’의 유소기 일파는 중국공산당 8기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를 긴급소집해서 투표방식으로 모택동을 당주석에 파면하려고 시도했고 임표부대는 총참모장 나서경을 체포하여 내전 폭발전야의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내전위기는 참모총장대리가 된 양성무가 행동중지를 명하고 당 총서기 등소평이 결정적인 순간에 모택동을 지지하기로 태도를 돌변하여 모택동이 북경중앙을 접수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그처럼 문혁파가 개혁파를 뒤 엎은 중국정변의 경험을 크렘린 쿠데타가 답습할 개연성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언론인인 기 소르망도 프랑스적 기원을 갖는 쿠데타에는 익숙하지만 소련 신군부가 천안문 이후의 중국을 모방하여 ‘대외적 개방과 대내적 단속’을 꾀할 것이라고 속단했으니 볼셰비키 쿠데타의 심층을 들여다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속단이나 오판은 비서양적인 사고의 틀이나 한국적인 경험에서 연유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79년 12월13일 새벽에 중앙청 광장으로 굴러들어온 탱크의 굉음과 그에 뒤이은 신군부의 권력장악이 아직도 기억에 새로우니 모스크바의 탱크대열 앞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라는 꼴 된 우리 모습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 보수반동세력으로 전락한 볼쎄비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주의자인 존 리드가 1917년의 러시아 10월혁명을 현장에서 보고 기록한 ‘세계를 뒤흔드는 10일’은 르포르타주 문학의 걸작으로 남아 있지만 그가 말한 ‘격렬한 역사의 단편’은 이제 기세를 잃고 사라져가는 듯한 요즘이다. 미국 최초로 공산당을 창립한 후 모스크바에서 객사하여 레닌의 애도 속에 붉은광장에 묻힌 그는 이제 말이 없다. 일찍이 러시아혁명은 인류 역사에 있어 위대한 사건이며 볼셰비즘의 부상은 세계적 현상이라고 강조한 그의 말과 대조적으로 소연방의 해체, 공산당중앙위원회의 해체,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옐친의 행동 등으로 이어지는 소련 반볼셰비키 개혁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소련에서 보수반동세력을 전복한 볼셰비키가 74년만에 스스로 보수반동세력으로 전락하고 시들어버리다니 역사의 아이러니 아닌가. 우리는 아직 소력 제2혁명의 케렌스키가 되어 실패의 운명을 진 채 사라지고 옐친이 ‘과격한 개혁’이 제 2혁명의 시작으로 기록될지 지금 우리는 말하지 못한다. 대전환의 시점에 서 있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참된 기록은 역사의 무게로 작용한다는 점뿐이다. 우리는 멀면서 가까워진 소련이란 존재를 좀더 깊이 파악하는 노력을 쏟으면서 스스로의 개혁속도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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