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 실제의 괴리 축적된 죄과의 업보
  • 이인호 (서울대교수 · 러시아혁명사) ()
  • 승인 1991.09.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련공산당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주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소련에서 사회주의 이상이 아직도 살아 잇다는 희망적 징후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지금도 고르바초프 자신과 그를 지지하는 개혁파의 입장이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심각한 경제침체의 직접적 원인을 브레즈네프 시대의 무사안일과 부패에서 찾으며 도덕적 재무장을 통한 경제활성화를 주창했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비판의 자유, 곧 목소리(golos)를 내어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글라스노스트가 필수조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막혔던 봇물을 터놓는 것과도 같이 비판의 홍수현상을 초래했다.

사실 소련의 역사, 아니 러시아역사 전체를 되돌아볼 때 어느 시기에도 고르바초프시대의 소련인들이 누리게 된 만큼의 언론자유를 보장받은 예가 없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1917년 혁명보다도 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인, 소련인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어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상당한 정도로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역사나 정치의 영역에 이미 신성불가침 영역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였다. 곧 브레즈네프나 스탈린뿐 아니라 1917년 이래 계속 집권당으로서 1당독재를 해오던 공산당과 레닌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도덕적으로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모든 집단이나 조직은 이제 살아남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며 공산당 몰락은 그런 의미에서 글라스노스트의 선포와 동시에 선포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명분과 실제 간의 괴리라는 점에서 소련의 공산당처럼 엄청난 좌과를 축적해온 집단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소련공산당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제정러시아와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러시아에 소개된 것은 1872년이었지만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혁명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에도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다는 징후가 뚜렷해진 1880년대였다. 사회주의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 해방을 꿈꾸는 모든 지식인들에게 러시아의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종합적 방안으로 막연하게 신봉되고 있었다.

그러나 헤르첸 · 체르니세프스키 등이 생각하고 있던 사회주의는 러시아 고유의 전통으로 믿어지고 있던 농민공동체를 바탕으로 하는 농민사회주의였으며, 러시아의 인민주의운동은 러시아가 서구가 걷고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피하고 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고, 있어야 한다는 친슬라브주의적 환상과 염원에 기초를 두고 출발했던 것이다. 농민의 계몽과 선동에 실패한 후 테러리즘의 길을 선택했던 인민주의자들 일당은 알렉산드르 2세 피살 후 그 지하조직이 일망타진되고 반동이 격화되자 그 가운데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스위스로 망명하여 자술리치 및 악셀로드와 함께 ‘노동자의 해방’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선구자가 되었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뚜렷한 지하조직으로 결성된 것은 1903년 런던 · 브뤼셀에서 열린 제2차 전당대회에서였다. 이 전당대회에서 이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와 레닌의 볼셰비키로 분열되었으며, 그것은 러시아 공산주의의 성격과 미래를 규정짓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마르토프에 따르면 전제체제가 온존하고 있는 역사적 시점에서 혁명의 주역은 아직 부르주아가 담당해야 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가 자본주의를 고도로 발달시키고 전제체제를 타도하는 그들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지배계급으로서의 기반을 영구히 장악하지는 못하도록 독려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역사발전단계에 대한 객관적 진단을 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전위세력임을 자처하는 인텔리겐차의 집단인 사회민주노동당에 의한 조속한 권력장악이라는 과제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직업적 혁명가들로 구성되고 엄격한 중앙집권적 기율에 의해 통제되는 당 조직의 결성을 고집했다. 그의 사상에 대해 마르토프는 그것이 결국 ‘계엄령식 통제’ 체제를 낳게 되리라고 강력하게 반대해 결국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레닌을 지지하는 볼셰비키와 미르토프를 지지하는 멘셰비키로 분열되었다.

레닌과 마르토프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그 후 볼셰비키 진영 내에서도 여러차례 거듭된 분쟁의 핵심, 곧 당내 민주주의와 러시아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의 적용시기 및 방법에 관한 분쟁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레닌의 승리는 곧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 자체에 대한 심각한 변질을 뜻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의 세가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4월 독일군이 마련한 밀봉열차를 타고 레닌이 페트로그다르에 도착하여 “소비에트에 전권을, 농민에게 토지를, 즉각적 평화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대중을 선동하면서부터였다. 1917년 여름 노선을 달리하던 트로츠키가 레닌과 제휴함에 따라 볼셰비키는 제2의 레닌을 만남 셈이 되었다. 8월말에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혁명적 쿠데타가 불발로 끝나자 그에 대한 반발의 여세로 레닌은 혁명세력의 핵심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장악하게 되었다.

볼셰비키는 권력장악 이후 전제정권이 종말을 고하자 대국민 최대 공약사항이었던 제헌의회의원 선출을 허용했다. 그러나 러시아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 하루 사이에 의회를 해산하고 곧이어 모든 비볼셰비키 정당들의 활동을 규제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비밀경찰 체카를 수립해 반혁명세력을 단속하는 한편 계속되는 당원숙청과 충원을 통해 새로 개편되는 모든 국가기구에 대한 볼셰비키의 통제를 확보했으며 당의 명칭을 볼셰비키에서 공산당으로 정식으로 개칭했다.

볼셰비키의 혁명정 정책
혁명 당시 2만3천명에 불과했던 당원 수가 그 이듬해에는 11만5천, 1921년에는 57만, 1926년에는 1백만으로 늘어났고 스탈린 사망 직전 당원의 수는 6백만명을 넘었다. 다우언이 증가함에 따라 조직 확대와 개편이 불가피했다. 혁명 전 지하조직을 구성했던 공작원들이 집권당의 기관원 아파라트치키로 둔갑했으며 피의 대숙청 직전인 1930년까지만 해도 연방공화국의 당 중아위원회나 지구와 지역당의 공산당 것기장들 69%가 혁명 전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노병들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당 정책에 대한 결정권은 대체로 레닌이나 트로츠키와 같이 망명생활을 했던 지식인 출신들이 행사했으며 국내파는 당기구와 조직관리에 주력했다. 이러한 역할구분이 레닌 사망 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이 승자로 부상하는 관건이 되었다.

공산당은 볼셰비키파로 분립할 때부터 이른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원칙에 따라 당조직과 활동을 관장해왔으나 혁명 때만 해도 당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민주적 토론과 자율적 행동의 여지가 허용되었다. 그것은 볼셰비키가 1917년에 혁명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분위기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함으로써 지지를 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최근의 연구들이 밝혀내고 있다. 공산당이 집권세력으로 전환하면서 오히려 당내 민주주의는 레닌의 절대적 권위 앞에 위축되어갔으며 발볼셰비키 정치세력들에 대한 탄압이 가속회됨에 따라 당내 비주류 반대파들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었다. 혁명전에는 전당대회와 당협의회, 그리고 중앙위원회가 전부이던 당 기구가 1919년 제8차 당대회에서 확대 개편되어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당원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당 조절위원회가 또한 부가되었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카메네프 크레스친스키 5인으로 출발한 정치국은 스스로 구성원을 선정하는 폐쇄된 최고 권력기구로서 모든 중요한 정책결정권이 처음부터 그곳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1922년 조직국과 서기국이, 레닌에 항거하여 트로츠키편에 섰던 크레스친스키의 관할로부터 스탈링네엑로 넘어가자 당 서기장직은 최고권력에 접근하는 직접 통로로 중요성을 더해갔다.

레닌 사망 직전부터 노골화된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이 최고의 승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인 출신이 아니고 국내 지하조직에서 경륜을 쌓아왔으며, 대중적 지지에 기대를 걸어왔던 트로츠키와 달리 당 기구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시대의 ‘테러와 진보’
1929년 세계혁명론을 주장하던 트로츠키가 국외로 추방되고 1930년에는 부하린 톰스키 튀코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거세됐다. 이어서 부하린이 부르주아 반역자로 숙청되고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서기장 키로프의 암살을 계기로 시작된 피릐 숙청이 1938년에 마무리되자 당원수가 1백40만명으로 줄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앙에 대한 당의 독재 수준을 이미 넘어선 스탈린 개인에 대한 우상숭배, 언론과 정보의 자유에 대한 완전봉쇄가 시작됐다. 표면으로는 ‘당 정신’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 가운데 당의 운영과 국민에 대한 통치는 ‘테러와 진보’라고 배링톤 모어가 표현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체험으로 알고 잇는 진실과 살아남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말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생존을 위한 지혜로 습득되었다.

최저 생계수단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계획경제는 소비재 생산을 극도로 억제하고 기간산업과 군수산업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개발되었다. 소련이 군사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공산당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피의 숙청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1936년 스탈린은 새 헌법을 제정하여 소련이 계급갈등 없는 완전한 민주사회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1938년에 새로 발간된 《소련공산당 약사》는 스탈린 영웅화를 위해 사실을 완전 조작한 것인데 그후 이 책이 소련의 정치는 물론 학문과 교육의 초석이 되었다. 정치나 역사에 관해서뿐 아니라 언어학 생물학 분야에서조차 스탈린의 발언은 곧 진리가 되었으며 소련의 생물학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특징이 유전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일에 수십년을 바쳐야 했다.

국가안전기구 카가베(KGB)는 최초의 비밀경찰 체카와 달리 공산당원에 대해서도 통제권을 가졌으며, 당 · 정부 · 군 등의 모든 요직은 노멘클라투라라고 불리는 특별목록에 수록하여 독재자에 대한 절대 충성심에 의심이 가지 않는 인물들만을 특별히 발탁하여 그 자리에 기용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피오네르 · 콤소몰 등을 위시하여 모든 연령층과 국가살림의 구석구석에까지 파고드는 하부구조와 세포조직을 발달시켰다. 공산당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어떠한 일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 되었다.

군비경쟁력을 강화한 스탈린의 위세가 히틀러에 대한 승리를 퉁해 국제적으로 드높아지자 소련공산당의 횡포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프랑스 공산당 당수 토레즈까지도 정치적 포로가 되다시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공산당 독재체제에 수반된 현상은 공산당 중앙위원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엘리트의 특권계급화와 부패였다. 주택이나 소비재의 극심한 부족 속에서도 당원들은 특별히 허용되는 배급을 받고 특별상점 출입권을 가졌으며 공산당 지도급 인물들은 제정시대 귀족을 무색케 하는 여러가지 특권을 누렸다. 차이가 있다면 그러한 영화의 부가 국민들의 눈앞에 공공연하게 노출되고 전시되는 것을 정책적으로 막았다는 점이었다.

스탈린의 사망 후에 테러는 완화된 공산당 독재의 형식으로 변질되고 특권층의 권력남용과 부패 가능성은 보다 높아졌다. 유고의 밀로슢 등은 일찍부터 소련에 ‘신계급’이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비판했으나 소련이 유일한 사회주의 본산으로 남아 있는 한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공산당에 굴복하는 길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KGB의 베리야와 말렌코프 · 흐루시초프 등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동조함으로써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다.

스탈린의 비행을 인정하고 폭로한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국시로 하는 사회에서 정당화될 수 없는 특권을 행사해온 공산당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때문에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은 국제적으로 해빙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으나 국내에서는 스스로 무덤을 파 1964년 그의 실각을 불렀다. 계획경제체제의 비능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공산당 지도부는 코시긴의 주도 아래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는 미온적 시도를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흐루시초프 이후 소련의 정치와 경제는 브레즈네프의 장기집권체제 하에서 침체와 부패의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침체와 부패의 깊은 잠
드디어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를 상회하는 산업국가로 탈바꿈했으며 국민의 교육과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데탕트 덕분에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전보다 빈번해지자, 브레즈네프는 우주선이나 핵무기 개발에서 미국과 경쟁할 수 있으므로 소련은 ‘발달된 사회주의’국가이며 곧 ‘대단히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리라고 선전했으나 상투적 언사는 점점 더 야유의 대상이 되어갔다. 경제가 자꾸만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면서 사기가 저하되고 기강이 급격히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개혁 주도세력의 한사람인 자슬라프스카야에 따르면 페레스트로이카 전야의 소련사회는 1917년 혁명 전야의 분위기를 방불하는 사회가 되어 특권을 누리는 공산당 지도부와 그밖의 사람들이 제정 말기처럼 ‘저들과 우리들’로 구분되어 부르게 되었다.

소련공산당은 종말을 맞이했응며 계급투쟁과 계획경제를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강조하던 레닌주의는 분명히 파산을 선고받았다. 소련에서의 공산주의 실패는 이데올로기의 실패 못지 않게 지도층의 지적 오류와 도덕적 부패, 곧 국민을 기만하는 데 이데올로기를 오용했다는 사실로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기여를 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경종을 울리믕로써 수정과 보완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잇다. 그런 시각에서, 공산당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수정과 보완으로서의 마르크스 이념의 존재이유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