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필드’에 보이 오고 잇다.
  • 프놈펜 · 박순철 편집국장대우 ()
  • 승인 1991.09.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캄보디아 현지 취재/평화 정착 가능성 높아… 학상 악몽 · 경제난 극복이 과제

낡은 소련제 쌍발 프로펠러 여객기를 타고 시엠 리압공항에 내렸을 때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군인들이었다. 연두색 군복을 입은 1개 소대쯤 되어보이는 중무장 군인들이 나지막한 공항청사로 나가는 길가 한쪽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비행기에서 내리는 관광객들을 따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2백50㎞ 떨어진 인구 6천명의 이 시골도시는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크메르제국의 영화를 간직한 앙코르 와트사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시엠 리압’이라는 이름도 이곳에서 ‘삼족(현재의 태국인)을 격파’한 사실을 자랑하는 지명이다. 최근 캄보디아의 내전이 수그러들면서 12세기초 수리야바르만2세가 건립한 웅장한 앙코르 와트와 12세기말 자야바르만7세가 세운 바이욘사원의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거대한 불상들을 찾는 외국관광객 수가 조금씩 늘고 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앙코르 와트는 가로 1천5백m, 세로 1천3백m의 해자로 둘러싸인 세계 최대 사원이다. 올 2월 호주에서 발간된 캄보디아 소개 서적에는 앙코르 와트 내부와 주변에 지뢰가 매설돼 있고 군인들이 혼자 배회하는 관광객을 강탈하는 일도 있다는 경고 구절이 느낌표와 함께 인쇄돼 있었으나 이 엄청난 폐허 속에서는 역사가 조용하고 무거운 숨을 쉴 뿐이었다.

구걸의 손길과 유혈 · 공포의 ‘탄흔’
다만 오늘의 가난한 캄보디아를 사는 헐벗은 아이들이 관광객들과 숨바꼭질하며 구걸의 손을 내밀었다. 또 바이욘사원의 우아한 浮彫에는 난폭한 탄흔들이 20년 동안 계속된 공포와 유혈의 시대를 증언했다.

크메르제국의 몰락과 함께 밀림 속에 파묻혔던 앙코르 와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박물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오랜 동안 밀림 속의 전설로만 남아 있었다. 검트리와 다른 열대수목들이 하늘을 찌르듯 치솟은 밀림 속에 숨은 이 사원이 마지못해 관광객들에게 그 자태를 열어 보이듯 오랫동안 닫혀 있던 캄보디아도 외부세계에 대해 조금씩 빗장을 풀고 있다. 그러나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 낀 넓이 18만㎢, 인구 8백30만명의 이 나라는 아직도 지난 20여년 동안 저질러진 유혈의 기억 속에 갇혀 있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지어진 낡지만 우아한 그랜드 호텔에서 만난 관광가이드 벵본 케티야양(22)은 푸른 상의에 검은색이 길게 갈리고 분홍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아랫단을 수놓은 솜푼이라는 전통 스커트 차림으로 영어가 능숙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나온 뒤 공무원으로 2년째 이 일을 해왔으며 한달에 5천리엘을 받는다고 했다. 공정환율로는 약 6달러, 암시장의 환율로 따지만 4달러밖에 안되는 돈이다. 사설학원에서 3년 동안 영어를 배웠다는 그의 희망이 궁금했다. “카놈미엔 상큼.”(나에겐 꿈이 있어요.) 그는 대학을 나와 아버지처럼 고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이 나라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리라는 가능성이 부쩍 높아진 것과 관계가 있다. 캄보디아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0년 당시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공의 정부가 론놀 장군의 쿠데타로 넘어지면서부터였다. 미군기에 의한 대규모 폭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군과 크메르루주 간의 전투가 점차 격화됐다. 1975년 4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의 승리는 악명 높은 대량학살 시대를 열었다. 1979년 초 베트남군의 힘을 빌려 헹 삼린과 훈 센이 이끄는 세력이 캄보디아를 장악하면서 이들과 태국 국경지대로 물러간 폴 포트 · 시아누크 · 손산 등 3개 반군파 간에 새로운 ‘12년 내전’이 시작됐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했지만 국제적 주선 속에 4개 정파 간에 지루하게 거듭돼온 평화협상은 좀처럼 성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6월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모인 4개 정파는 즉각적인 휴전, 외국으로부터의 무기도입 중지에 극적인 합의를 보았다. 또한 일종의 과도정부 역할을 할 최고민족평의회(SNC) 의장에 시아누크공을 선출하고 그 본부를 프놈펜에 두기로 했다. 오는 11월 시아누크의 프놈펜 귀환은 캄보디아 사태에 새로운 막을 열 것으로 보인다. 8월말 파타야에서 다시 열리는 실무회의에서 프놈펜정부를 대표하게 된 속칸 외무부 차관은 일제 가전제품들이 놓인 자택의 응접실에서 “우리는 신축적인 자세로 협상에 응할 것”이라면서 평화협상의 장래에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관광객 급증, 신분 상승 위해 영어학습 붐
이 동남아의 소국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오는 듯한 분위기가 번지면서 올해초부터 외국 관광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수많은 고적과 휴양지를 갖춘 이 나라를 찾는 외국인은 87년 4백여명, 그리고 88~90년에는 매년 1천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올해들어 4개월 동안 외국 관광객 수는 9천명에 육박했고 하반기 들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에어컨이 잘 된 사무실에서 캄보디아 정부의 관광국 부국장인 삼 프로모네아씨는, 관광객들을 맞기 위해 3년 내에 호텔의 객실 수를 4천개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프놈펜시를 끼고 흐르는 도도한 메콩강가의 칼 마르크스거리에 새로 지어진 호텔 캄보디아나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캄보디아 유일의 이 1급호텔은 지난해 7월 우선 1백10개 객실로 문을 열었는데 요즘은 손님이 많아 객실을 얻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종업원 속 덕(28)씨는 손님이 대부분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태국 미국인들이며 소련이나 동유럽 사람들은 없다고 말했다. 이 호텔의 1층 사이클로바에는 5인조 밴드가 감미로운 시아누크시대의 유행가나 라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정부 고관들과 부인들이 밤에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주황색 지붕이 산뜻한 이 호텔의 정문 앞에는 삼륜자전거의 앞에 손님의 좌석을 마련한 트라이시클로 운전사들이 밤낮없이 20~30명쯤 줄을 지어 기다린다. 가랑비가 내리는 일요일 아침 밀짚모자를 쓴 익살스러운 모습의 수요나씨(29)에게 30분 동안 1달러를 주기로 하고 트라이시클로를 타고 메콩강변으로 나갔다. 그는 서투른 영어로 트라이시클로 주인에게 하루에 3백리엘을 주고 빌린다고 했다. 캄보디아 자본주의의 한 모습이었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사설학원을 6개월 동안 다녔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는 벌써 몇년 전부터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듯싶었다. 프놈펜 시내 한 사설학원의 벽에는 ‘필수영어 제1권’이라는 영어광고가 캄보디아어 광고와 함께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변화의 바람은 시장터에서 더욱 실감났다. 1920년대에 세워진 센트럴마켓은 프놈펜 제일 가는 큰 시장이다. 황금빛 돌이 높이 솟아 있는 건물 안에는 캄보디아인들이 늘 품고다니는 금붙이와 보석, 외제 손목시계를 전시한 진열장들이 줄지어 있었고 일제 텔레비전 카세트 등 가전제품을 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경찰 경력 13년의 경위 월급 10달러
개방의 변화와 함께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내무부 산하 특별수사대에서 의사관계를 맡고 있는 투이 사모어 경위(44)는 외국인 상대의 범죄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싱가포르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8년까지만 해도 경찰 간부들마저 외국인 접촉이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마음놓고 만날 수 있다고 활짝 웃었다. 그는 경찰경력 13년에 월급이 110달러 정도라면서 최근 싱가포르회사에 취직하려고 사임한 부하처럼 자기도 직장을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경찰관이 마음대로 사직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사표만 내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키오 세리 부티씨(여 · 31)도 최근에 외무부를 그만두고 외국원조단체에 취직했다. 왜 직장을 옮겼느냐는 질문에 그는 “돈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외무부에서 그는 약 7달러를 받았으나 현재는 1백50달러를 받으며, 2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면 2백달러로 오를 것이라고 좋아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실업자 증가라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키오 세리씨는 자기 주변을 보면 30% 정도가 실직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업자 증가보다 더욱 심각한 경제문제는 어쩌면 인플레인지도 모른다. 지난 해에 비해 쌀값은 2배 이상 뛰었다. 모든 물가가 뛰고 있으며 이를 반영해 미국 달러에 대한 리엘화의 대폭적인 평가절하가 있었다.

70만 프놈펜 시민들의 빈부격차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업을 벌이거나 외국에 자리잡은 부유한 친척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각종 전자제품이나 오토바이 등을 소유하는 등 넉넉한 생활을 하는 이면에 집이 없어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도 5% 정도 된다고 한다.

국제 냉전구조 해소와 눈앞에 다가온 듯한 평화, 국내 통제의 완화와 시장경제요소도입, 관광과 투자를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 이러한 변화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력이 부족한 프놈펜 시내는 날이 저물면 거의 암흑세계로 변한다. 캄보디아 엔터프라이즈(박스기사 참조)의 마케팅 담당 직원인 키아 산씨(37)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자전거를 타고 어둠 속의 사거리를 무심히 가로지르는 두 사람을 칠 뻔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으로 쳐서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지요. 과거의 고통을 잊으려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합니다.”

어두운 바다 같은 프놈펜의 밤거리에 불을 밝힌 술집들이 여기저기 외딴 섬처럼 떠있다. ‘라 튄느’의 넓은 홀을 빼곡이 채운 5백명이 넘는 손님들은 싱가포르에서 들여온 캔맥주를 정신없이 들이켜고 호스티스들과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한결같이 문신처럼 박혀있는 어두운 기억들이 있다.

한 마을에서 1만7천명 처형돼
3년8개월10일. 이것은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자신의 생일처럼 익숙한 숫자이다. 1975년 4월17일 검은 농민복 차림의 크메르 루주 군대가 프놈펜에 입성하면서부터 이 악몽의 세월은 시작됐다. 폴 포트는 모든 졷시민을 농촌으로 추방하고, 모든 시장을 폐쇄하고, 모든 불교승려를 내쫓고, 모든 론놀정권의 지도자를 처형하는 등 8개항의 조처를 내렷다. 프놈펜은 하룻밤 새에 유령도시로 변했다. 영국의 원조단체인 옥스팜이 1988년 발행한 《빈민의 처벌》은 이 기간중 처형 강제노동 기아 질병으로 1백만명에서 2백만명에 이르는 사름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프놈펜 남쪽 약 15㎞ 지점의 충액마을은 사연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평화로운 시골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크메르 루주는 1만7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처형했다. 본래 열대과일인 롱갠의 과수원이 있었던 이곳에는 1백29개에 달하는 집단처형 구덩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1988년에 세운 높이 20m의 백색 위령탑에는 10층으로 나눠 수많은 유골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수많은 백골 앞에서 천역덕스럽게 앉아서 노는 어린아이와 근처 나무그늘에서 떠들석하게 웃으며 잡담을 나누는 농민들, 그리고 한편에서 흰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이 비현실적 느낌을 강하게 준다.

관리인 마우텔씨(30)는 구덩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안내하며 흙속에 묻힌 뼈 · 이 · 옷조각 등을 슬리퍼로 뒤적이거나 손가락을 가리켜가며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1백명 이상의 어린이들을 살해한 아카시아나무에는 검은 혈흔이 지워질 줄 모르고 남아 있었다.

충액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이에 앞서 프놈펜 시내의 옛 고등학교 터인 투올 슬렝 형무소에서 심문을 받았다. 현재 범죄막물관으로 꾸며진 이곳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의 고문기구들이 진열돼 있다. 여러 방의 벽을 가득 메운 희생자들의 사진 가운데 어린 소년 소녀들의 겁에 질린 모습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난민촌 주민 “평화가 곧 올 것”
현재 캄보디아에는 국제적십자사 등 모두 51개의 외국원조기관들이 활동하고 잇다. 세계고회협의회(WCC)에서 일하는 일본인 야마시타 마사씨는 지난 4년 동안 농업지원 프로젝트들을 맡아왔다. 그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가족들이 집 안에 모여있고 집 밖에는 물고기가 있는 연못과 돼지 · 닭이 있는 그림을 흔히 그린다고 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어두운 과거와 북확실한 미래 가운데에서 국가와 사회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가족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백10달러의 이들 가운데서도 더욱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프놈펜으로부터 남동쪽으로 70㎞쯤 떨어진 오코키난민촌에는 지난해 크메르 부주 게릴라를 피해 고향 오랄산악지대를 떠난 1천5백여 가구 7천1백명의 난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황토길을 따라 길 양쪽에 대나무를 기둥으로 삼고 이엉을 덮은 오두막들이 3㎞쯤 줄을 지어 있었다. 비가 후줄근히 내리는 한낮에 킴씨(25)의 오두막집에는 부인 후옷씨(27)와 뱅색이 완연한 벌거숭이 애 두명, 병으로 얼굴이 짓무른 할머니 둘, 무슨 시퍼런 풀을 말아 담배를 피우며 애에게 젖을 먹이는 공허한 표정의 젊은 여인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러나 후옷씨는 웃으면서 평화가 곧 올 것이며 소 한마리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캄보디아의 절망도 끈나가는지 모른다. 유아사망률은 17%로 세계 최고이지만(콩사몰 보사부 차관은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계산기를 직접 두드려 이 수치를 알려주었다) 폴포트의 기억이 없는 어린이들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교육사정은 좋지 않다. 현재 5년째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졸업하는 학생은 절반도 안된다. 학생들에겐 교과서도 공책도 없고, 칠판이 없는 교실도 허다하다. 그러나 흙바닥 교실의 아이들에게는 털어버려야 할 악몽은 없다. 또한 되찾은 종교의 자유와 함께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다시 ‘자비’를 배운다. 캄보디아 엔터프라이즈의 키아씨는 양로원을 지어 어려운 노인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은 다시 꿈과 ‘콜콤니트’(앞날의 계획)를 갖기 시작한 것인가. 어쩌면 20세기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을 겪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다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점점 좁아가는 지구촌 주민 모두가 나눠가져야 할 짐인지도 모른다.

방콕행 프로펠러기를 타기 위해 프놈펜의 포첸통공항에 도착하자 중학교 강당만한 공항건물은 더 많은 외국 손님을 맞기 위해서인지 수리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건물에 전화가 한대도 없다는 키아씨의 말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비를 맞으며 비행기에 올라가자 맨 앞좌석에 속칸 외무 차관이 앉아 있었다. 파타야에서 열리는 SNC실무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대표단 6명이 떠나는 길이었다. 그에게 “행운을 빈다”고 인사했다. 비행기는 물이 질펀한 기름진 들판위로 솟아올랐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