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은 두 얼굴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1.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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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연속극 ‘말로만…’ KBS ‘우리는…’ 대중문화적 접근 내적 성숙 개의치 않는 ‘살만한’ 계층… 개혁 · 보수 양면 지녀

지난 8월5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MBC-TV의 아침 일일연속극 ‘말로만 중산층’과 8월7일 첫회를 내보낸 KBS2-TV의 16부작 수목미니시리즈 ‘우리는 중산층’은 표제 자체부터 ‘중산층’을 내걸고 중산층에 대한 대중문화적 접근을 시도하고 잇어 관심을 끌고 있다.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침묵하는 다수’에서 일약 민주세력의 주체로 부각되어온 중산층에 대한 논의는 주로 학술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 실체가 막연한 상태여서 이 드라마가 과연 중산층이란 개념에 어떻게 접근해갈 것인지에 대해 시청자들은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신기루와 같은 ‘중산층 신화’를 창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尹興吉 원작소설 제목을 그대로따온 ‘말로만 중산층’(박찬성 극본 · 박복만 연출 · 매주 월~토 아침 9시 20분~45분)은 27평 연립주택에 살며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대기업의 만년과장 김달국씨(박인환 분) 일가와 그 이웃들의 일상이 익살스럽게 전개된다. ‘진짜 중산층’편(5일 방영)은 김달국씨가 사는 연립주택에 차가 너무 늘어난 운영위원회가 화단을 헐고 주차장을 만들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연대서명한다는 내용이다. 자기용이 없는 김달국은 교통난과 주차난의 심각성을 설파하면서 서명하지만 가족으로부터 “당신 혼자 그런다고 교통난 주차난이 해결된대요?”라는 비난을 듣고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자기주장 관철 역부족인 소시민의 모습
남보다 많이 배웠고, 또 많이 생각하는 축이므로 말로는 자유주의적 내지 진보주의적 발상을 스스럼없이 토해내지만 가족에게조차도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에 역부족인 소시민의 모습이다.

역시 소설가 朴榮漢의 동명소설을 드라마화한 ‘우리는 중산층’(박영한 극본 · 박수동연출)은 신혼을 갓 벗어난 대학 전임강사 부부가 서울근교의 신도시(안산시) 장미연립주택으로 이사온 뒤 교수의 아내 이자옥(선우은숙 분)의 눈에 비친 생경한 이웃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가정의 굴레를 따분해하는 자유분방한 여자 세라(송옥숙 분), 대지 같이 강하고 칡넝쿨처럼 질긴 촌할머니 영임댁(김지영 분)등이 땅투기, 집단이기주의, 폭발적인 女權 요구, 남성들의 중성화현상 등 최근 사회변동의 특징적 징후들에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륻ㄹ이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중산층’이라는 허위의식을 풍자한다.

위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만나는 중산층이 ‘진짜 중산층’은 아니다. 전자는 물질적인 중산층이긴 하나 정신적인 중산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내일의 중산층을 꿈꾸는 서민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이 사회의 비리와 병폐를 가볍게 풍자하여 건강한 중산층 의식을 제시하려는 기획의도가 가정사 중심의 각종 자잘한 단편에 눌려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고 잇을 뿐더러 후자 역시 서민을 그린 모습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영암댁이 새벽부터 소주병으로 북어대가리를 두드려 연립에 사는 사람들의 아침잠을 깨운다든지(14일 방영 ‘장미 눈뜰 때’편), 연립주택 분양미수금 때문에 삿대질을 하며 폭언이 오가는 (29일 방영 ‘자옥네 집들이’편) 장면을 비롯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서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수선스럽고도 무례하다. 이 미니시리즈는 매회 끝날 때마다 주제음악을 배경으로 ‘삶의 이야기’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바로 당신의 이야기’임을 강조하여 시청자는 누구나 다 중산층인 듯한 착각에 바지게도 한다.

중산층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기준에 따라 크게 다르다(표 참조). 따라서 그들의 생활모습이나 의식상의 특징을 드라마로 도출해내는 것은 연출가의 ‘상상’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박수동씨(‘우리는 중산층’ 연출)는 중산층의 실체에 사실적으로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 만하면 중산층”으로 잡고 있다고 말한다. 박복만씨(‘말로만 중산층’ 연출)는 “보통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 청량제가 될 만한 일을 부각시키는 데 주안점을 들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면서 다른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굳이 시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 문제에 눈 돌릴 틈이 없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드라마는 주제의식이 흐려지고 ‘중산층’이라는 용어가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사탕발림’으로 작용하면서 중산층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최근 경제생활이 크게 달라지면서 많은 사람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작용한다. 康俊? 교수(전북대 · 신문방송학)는 9월호 ‘말’지에 게재한 ‘중산층 신화와 사회변혁’에서 한국에서 중산층은 이제 하나의 상징이요 가ㅣ호라면서, 정부여당 · 재벌 · 언론이 이데올로기 공세로 전국민의 중산층화 신화를 창조하려 한다고까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중산층을 ‘연습’하는 서민들의 모습은 드라마의 소도구에서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실평수가 스무평 남짓한 연립공간에 덩치가 큰 소파와 마루 입구를 잔뜩막아선 수족관, 주위에 늘어선 대형화분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중산층의 취미나 생활상을 그대로 모방하면서까지 ‘중산층되기 예행연습’에 안달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22일 방영 ‘우리는 중산층’ 에이프런 두른 남자편). 그러나 외형적으로 일단 중산층 대열에 들어서면 내적 성숙은 개의치 않고 출세지향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가족중심적이 되고 만다. 월급봉투를 ‘땀봉투’라고 받아드는 아내(김수미 분)는 사회의 잘못에 눈을 돌릴 틈이 없다. 이 아내가 수입바나나를 사지 말라는 아들에게 “외화 주고 사온 수입바나나가 썩어버리는 게 아까워 잠이 오지 않더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26일 방영 ‘말로만 중산층’ 월급날편).

중산층드라마가 일상의 문제를 반추해보는 공간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작가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현실감 없는 재벌들의 이야기나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공통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작가 宋智娜씨(32)는 “시청자가 공감대를 느끼면서 재미있게 보고 자신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드라마로서는 일단 성공”이라고 말한다. 또한 방송평론가 이경순씨는 드라마 유행의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사랑과 야망’과 같은 남녀애정을 주로 다룬 멜로물에서 ‘전원일기’ ‘한지붕 세가족’ 같은 농촌 · 도심의 소시민을 다룬 건전가정드라마로, 여리서 다시 중산층드라마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두 드라마 이외에도 ‘서울뚝배기’ ‘산너머 저쪽’ ‘옛날의 금잔디’ ‘까치며느리’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그 여자’ 등도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여러 유형의 인간을 보여주면서 내 주변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중산층드라마라 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이들 제목과는 달리 ‘중산층’ 자체가 표제로 택해졌다는 점만이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니시리즈 기획을 맡고 있는 이정훈 KBS부주간은 “소설을 드라마화할 때 원작젝목을 그대로 쓰는 게 관례”라며 양 방송사에서 유사한 표제를 쓴 것을 우연으로 돌린다.

그러나 金萬龍 교수(한국외국어대 · 신문학과)는 중산층이란 사회학적 용어가 드라마제목으로 나왔을 때 당혹감부터 느꼈다면서 “전국민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은 상업방송의 특징이긴 하나, 최근의 중산층드라마는 원작의 제목이 그렇다 치더라도 시청자들이 자신들을 중산층으로 오해하게끔 호도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아름다운 착각’은 개인적 삶마저 정치로부터 철저히 유리시키는 탈정치화를 부추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보의 역군, 또는 퇴보의 온상 될 수도
중산층의 성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이다. 중산층의 의식을 관류하는 가장 본질적인 흐름은 ‘안정 속의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안정은 보수화의 가능성을, 개혁은 진보화의 잠재력을 함축한다. 중산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도 중산층의 진보의 역군이 될 수도 있지만 퇴보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야누스적인 속성은 중산층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학자 朴亨埈 교수(동아대 · 사회학과)는 “지금가지 중산층을 다룬 드라마들은 잔잔한 재미는 있지만 모든 문제를 개인 · 가족 · 집단이기주의로 국한시켜 출세주의 · 개인주의 성향을 확산시키고 어떤 면에서는 허상에 불과한 중산층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상관없다는 탈정치화를 유도한다”고 비판한다. 박교수는 “사실상 한국의 중산층은 표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이왕 ‘중산층’을 표제로 내걸려면 시청자가 개인주의 · 집단이기주의 등을 넘어서 역사의 흐름 앞에서 자신의 위상을 넓게 설정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안타까워 한다.

실제로 스스로 중산층의 길목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는 朴貞順씨(38 · 경기도 과천 1단지 연립주택 124동 104호)는 중산층드라마에 대해 “산뜻하지 않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자녀교육에 관해 다룰 때 가장 공감이 갔다”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하면 무녀 독남 외아들을 잘 키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라는데, 이러한 예는 중산층의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김우룡 교수는 “드라마의 중산층 범주를 소비나 지출의 산술적인 잣대가 아닌 행복의 지수로 바꾸도록 유도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직업과 삶에 대한 만족, 행복을 느끼는 세대만이 진정한 의미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윤흥길씨는 원작과 드라마가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소설 속의 의도가 드라마에선 거의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김달국씨가 사회의 정신적인 흐름을 끌고나가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를 원했으나 드라마에서는 신변잡기로 나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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