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대덕 1번지
  • 대덕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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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박硏, 20년간 간판 바꾸기 수차례…“정관 무시한 채 기계연구원에 억지 편입”

‘과학기술 수준을 알려면 대덕을 봐야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덕 연구단지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는 다음과 같은 자조 섞인 말 앞에서 맥이 풀리고 말지 모른다. ‘과학기술 정책의 현주소를 알려거든 대덕 1번지를 보라’.

 대덕 1번지는 바로 한국선박연구소를 말한다. 정확히는 대전직할시 유성구 장동 171번지이고, 또 다른 주소는 대덕 연구단지 사서함 1호이다. 76년 이곳에 설립된 한국선박연구소는 대덕 연구단지에 입주해 있는 연구소들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12만평에 달하는 이 연구소의 입구에 들어서면, 왼편에 대전 엑스포 때 전시됐던 거북선 실물 모형이 자리잡고 있어, 국내 유일의 국책 선박·해양 연구소라는 풍모를 느끼게 한다. 신축중인 해양수조동을 포함해 이곳 대부분의 시설물과 인력은 선박 연구를 위한 것이다.

“진짜 이유는 기계연구원 위상 문제에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연구소의 간판은 한국기계연구원 본원(원장 徐相箕)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선박연구소와 기계연구원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해답을 찾으려면 20여 년이 채 안되는 시기에 통합과 분리를 거듭해 만신창이가 돼버린 한국선박연구소의 ‘수난사’를 먼저 읽어야 한다. 거기에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통·폐합과 분리를 둘러싼 정치적 배경과 행정편의주의가 깔려 있다. 적어도 대덕 1번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한국선박연구소가 한국기계연구소에 완전히 통합된 것은 지난 81년에 이르러서는 기계연구소 부설 해사기술연구소로 부분적으로 분리됐다가, 지난해 다시 한국기계연구원(한국기계연구소의 후신)에 완전히 통합됐다. 선박연구소의 현재 정식 이름은 한국기계연구원 선박해양공학연구센터다(오른쪽 표 참조). 센터는 부설 연구원과는 달리 예산이나 인사권과 같은 행정 권한을 따로 갖지 않는다.

 통 · 폐합 결과 기계연구원은 서울 · 대덕 · 창원 등 세 곳에 분산되어 자리를 잡게 됐다. 이 연구원은 애당초 경남 창원에 있었던 것인데 뒤에 서울의 한국정밀기기센터화 대덕의 한국선박연구소를 통합하게 된 것이다. 92년에는 본원을 아예 부설 기관인 해사기술연구소가 있는 대덕으로 이동해, 한국선박연구소 자리에 기계연구원 본원이 들어앉았다.

 93년 4월 기계연구원 부설로 돼 있던 해사기술연구소는 ‘정부출연 연구소의 기능을 재정립하고 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해서’ 다시 기계연구원에 통합됐다. 81년 통합 당시와 비슷한 취지에서였다. 정부가 최근에 밝힌 정부 출연 연구소 통 · 폐합 이유는, ‘대상 연구소들끼리 비슷한 연구 업무가 중복되고, 연구시설과 성과의 공동 활용도가 낮고, 연구 성과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해사기술연구소가 이런 연구소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평가 기관의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이 연구소를 통합한 데는 다른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통합 이유는 이 연구소를 흡수 통합한 기계연구원의 위상 문제와 관련이 깊다. 이 연구소는 생산기술연구원(원장 金永旭)과 연구 업무가 중복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국정 감사 기간에도 자주 거론됐을 정도다.

 생산기술연구원은 상공자원부 산하이고 기계연구원은 과학기술처 소속이다. 만일 정부출연 연구소 통 · 폐합 문제가 제기되면, 두 연구소는 서로 먹고 먹히는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89년에는 당시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한국기술지원세터와 산업기술전문교육원이 생산기술연구원으로 떨어져 나간 전례가 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재정개혁 차원에서 정부출연 연구소 정비를 공언했다(최근에는 공기업 민영화 계획이 마무리 되는 대로 이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싸움은 예정돼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기계연구원 측이 몸집을 부풀릴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지역적으로도 떨어져 있고, 연구 업무의 성격이 비슷하지도 않은 해사기술연구소를 통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 연구원 협의체인 ‘선박·해양 공학 발전을 위한 연구원 협의회’ 대표 徐祥玄 박사는 “기계연구원 고위층도 이 점을 시인했다”라고 밝힌다. 그러나 기계연구원측은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급히 통 · 폐합을 추진하다보니 무리를 나타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선박연구소의 후신인 기계연구소 부설 해사기술연구소가 기계연구원의 한 센터로 통합될 당시 법적 근거 자료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기계연구원 이사회는 이를 서면으로 의결했다(아래 자료 참조). 이사회는 이사장과 원장에 과학기술처를 비롯한 4개 부처의 이사 4명을 합쳐 모두 6명의 당연직 이사로 구성돼 있었다. 정관에 따르면 당연직 이사 외에 민선 이사진도 구성돼 있어야 하나 당시는 없는 상태였다.

연구원들, 통합 조처 형평성에도 의문
 더욱이 기계연구원 정관은 ‘이사장이 경미하다고 인정하는 사항에 관하여는’ 서면 의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제 22조 7항). 부설연구기관의 통·폐합 문제가 ‘경미한 사항’에 해당되는지 여부는 법리적 해석을 떠나 상식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해사기술연구소 연구원들은 통합 조처의 형평성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89년 당시 한국기계연구소의 부설 연구소로 설치된 항공우주연구소는 아직도 부분적으로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다. “선박 및 해양 연구는 항공·우주 연구만큼이나 기계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연구원은, 정부출연 연구소 통합 기준이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선박해양공학센터는 첨단 선박, 각종 해상 장비, 해양 구조물을 개발하고 해양에너지 및 해양 오염 방제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 분야가 다른 연구소끼리 통합할 경우 당초 통합하는 취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 뻔하다. 선박해양공학센터에서 일하는 상당수 연구원은 연구소가 통합된 후 연구를 그대로 수행하기 힘들 정도로 비효율성이 가중됐다고 주장한다.

 이 센터 연구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金始中 과학기술처장관에게 거듭 질의했다. 지난해 말 김장관은 이에 대한 답변을 서한 형식으로 보내왔다. 그는 서면 답변에서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출연 연구소 통 · 폐합 결정 때마다 정작 가장 소외돼 왔다고 느끼고 있는 이들이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대덕 1번지 연구원들은 앞으로 곧 드러날 정부출연 연구소 정비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대덕 · 金芳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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