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적외선은 생명의 빛인가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4.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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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가전제품 판매 경쟁… 전문가들 “마구잡이 과장 광고” 비판

91쪽 아래 사진은 작년 12월 삼성전자가 이른바 ‘바이오 텔레비전’을 선보이면서 제시한 사진이다. 바이오 텔레비전 앞에 놓아둔 국화는 30일이 지난 뒤에도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데 반해 일반 텔레비전 앞의 국화는 볼품없이 시들어버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대단한 ‘바이오’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신이 주신 마지막 선물’ ‘생명의 빛’이라 불리는 원적외선은 대형 가전사에게도 ‘구원의 빛’이 되고 있다. 원적외선을 내뿜는다는 삼성전자의 바이오 텔레비전에 뒤질세라 금성사가 ‘음이온 텔레비전’을 내놓았고, 아남전자도 그와 비슷한 ‘바이온(BION) 텔레비전’을 선보였다. 이들 광고 내용에서 공통점은 ‘이 텔레비전 앞에 있으면 원적외선을 받아 생체에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이들 가전사는 텔레비전에 앞서 이미 경쟁적으로 원적외선 냉장고를 개발 · 시판한 바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적외선을 생명의 빛이라 부르는 것은 고장이다. 신이 주신 ‘마지막’선물은 더더욱 아니다. 태양 광선의 일부인 이 빛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다. 빛은 그 파장의 길이에 따라 자외선·가시광선·적외선으로 나뉘는데(위 그림 참조), 그 중 약 5~1천㎛(마이크로미터, 1천㎛=㎜)가 문제의 원적외선 영역이다. 이 빛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따라서 현란한 빛을 내는 원적외선 제품 광고는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주위 어디에나 있다. 군불을 지핀 온돌방의 따뜻한 느낌이나 뚝배기가 내는 독특한 장맛도 원적외선의 힘이다.

 최근 나온 바이오 텔레비전들의 원적외선 효과는 아직 뚜렷하게 입증된 바가 없다. 삼성전관의 ‘바이오 모니터’를 검증한 지철근 교수(서울대 · 한국조명전기설비학회 회장)가 “양파의 뿌리 발아, 국화의 개화 시기, 올챙이의 생명력 등을 비교 · 실험해본 결과 원적외선의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다”라고 말한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임상실험만으로 원적외선의 효능을 입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심지어는 지교수의 실험 결과와 배치되는 결과를 얻은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교수는 “세라믹 소재를 이용해 수개월 동안 양파 성장 실험을 해보았지만 유의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며 증거 사진들은 보여주었다.

효능 입증 안된 생활용품 홍수
 원적외선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바이오 세라믹스’이다. 우리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원적외선을 방출하지만 세라믹 소재란 금속 산화물의 일종으로 유리 · 시멘트 · 도자기 같은 재료를 가리킨다. 이런 물질들은 다른 재료에 비해 원적외선 영역의 방사 강도가 높은 데다 내열성 · 내부식성까지 뛰어나 최고의 원적외선 방사 재료로 평가 받는다. 원적외선 관련 제품이 예외 없이 세라믹스를 코팅했거나 함유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믹 소재가 생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것은 2백℃ 이상의 높은 온도로 가열했을 때이다. 농산물 건조나 식품 조리, 수년 전부터 각광 받고 있는 원적외선 사우나 등은 이미 그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받은 경우에 든다.

 38년 미국 포드사가 자동차를 도장하고 나서 이를 말리는 데 인공 원적외선을 이용한 이래 고온 원적외선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응용돼 왔다. 국내 원적외선 붐을 자극한 일본도 1차 석유 파동이 몰아친 73년부터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원적외선 이용을 검토해 80년대 중반부터 산업용으로 활발히 연구해 왔다. 이에 비해 한국의 원적외선 관련 연구℃기술 수준은 여러 모로 떨어진다.

 한충수 교수(충북대 · 농기계학)는 “우리나라는 원적외선 응용 기술을 고온 세라믹스를 이용한 산업 분야보다 효능이 아직 입증되지 않은 상태의 일상 생활용품 분야에 더 많이 이용하는 추세다”라고 말한다. 그나마도 일본으로부터 직수입하거나 기술 제휴 · 모방 생산 형태로 4, 5년 전부터 급속히 밀려들어온 경우가 많다. 식기류 · 마스크 · 파스류 · 신발깔창 · 비누 · 침구류 등에 이용돼 가히 원적외선 홍수라 할 만하다.

 세라믹 소재가 상온에서도 고온에서처럼 충분한 원적외선을 방출할 수 있는가. 이른바 비가열 세라믹 제품의 효능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한 화학 전공 교수는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상온에서 세라믹스가 방출하는 원적외선의 에너지는 결코 물체나 인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라는 것이다. 25℃에서 1시간 동안 세라믹 소재가 표면 ㎥당 발산하는 열량은 약 1.5× 10Kcal. 같은 조건에서 인체 피부가 내는 열량(11.9Kcal/㎡/h)의 백만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한 열에너지 비교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원적외선이 물에 닿았을 때 일어나는 공진 현상이다. 물은 다른 물질보다 강한 적외선 흡수대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다. 원적외선은 물의 성분인 수소와 산소의 결합각을 104.5도에서 104.8도로 변화시키는데, 결합각이 넓어지면 물분자가 활성화한다. 물은 우리 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물질이므로 원적외선이 인체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한다는 주장의 근거다. 이양희 교수(명지대 · 생물학)는 <원적외선과 생체>라는 논문에 ‘원적외선의 에너지는 생체에 공명 · 흡수되는 특성이 있다. 의학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물분자의 결합각 변화 주장 또한 ‘원적외선을 쬐었을 때에만 일시적으로 나타날 뿐 원적외선이 없으면 곧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가역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만만찮은 반론을 받고 있다.

“쓸모 있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앞의 화학 전공 교수는 “원적외선은 일종의 열에너지이므로 그것이 피부에 닿았을 때 체온이 올라가고 혈액 순환이 촉진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혈압이나 류머티즘 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얘기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국립공업기술원 요업기술원의 최태섭 연구원도 “원적외선이 매우 유용한 에너지원임에는 틀림없지만 과학적이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알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원적외선을 이용한 각 제품의 사용 조건(고온인가 상온인가)에 따라 그 효과가 크게 다를 수 있으므로 제품 성능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충고다.

 요업기술원은 원적외선을 방사하는 원료 · 소재를 합성하고 측정 · 평가하는 기관이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세라믹스 제품을 평가할 수는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공인된 품질 기준이나 평가 방법이 마련되지 않은 탓이다. 여기에 기술적인 문제도 잇다. 최근 경쟁적으로 출시된 바이오 텔레비전들의 경우, 원적외선 방사량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세라믹 코팅 브라운관을 가로 3㎝× 세로 3㎝× 두께 1~3㎝ 크기 절편으로 잘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최근 바이오 모니터를 개발한 삼성전관의 김헌수 선임연구원도 “정확한 수치를 제시할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임상 실험 결과만을 광고에 낼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원적외선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지만 어느 쪽도 상대가 수긍할 수 있는 근거 자료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은 “원적외선이나 세라믹 소재의 기본적 특성조차 모른 채 마구잡이로 과장 광고를 일삼는 것이 무엇보다 문제다”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적지 않은 사람이 원적외선의 효과로 잘못알고 있는 탈취 기능은 다공질로 된 세라믹의 흡착 성질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적외선의 피부 투과율이 40㎜에 이른다는 광고 역시 근거가 없다. 이 빛의 투과율은 기껏 수백㎛이다.

 관련 전문가들은, 검증되지 않은 건강 관련 제품들에 집중돼 있다는 문제점만 개선한다면, 국내의 원적외선 붐을 얼마든지 생산적인 분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열 · 건조 분야에 원적외선을 이용할 경우 70~80%까지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등 응용 가능한 산업 분야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한충수 교수는 “제품 생산 업체와 연구기관, 전문가 들이 원전외선의 효과 · 특성 · 평가 방법 들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라고 말했다.
金相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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