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판소리 ‘전봉준’ “농민전쟁 안 끝났다”
  • 정읍·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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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갑오농민전쟁 1백주년 맞아 공연 예정

너른 들판이 사방천지로 달려 나가고 마을들은 멀찍이 비켜나 낮은 산기슭으로 물러나 있다. 전북 정읍들판, 해발 1백m 를 채 넘지 못하는 구릉 같은 산들은 스러지다 멈추어선 동학농민군의 넋처럼 마을과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작가 박태순은 이 너른 들을 “반도를 대륙으로 만드는 평야”라고 노래했거니와, 이 들판은 한국근대사 그 희망과 좌절의 뿌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선뜻 지평선을 그어대는 들녘은 실핏줄 같은 황토 길로 숨쉬고, 그 길은 높낮이 없이 나아가다가 문득 동진강 줄기로 잘려나가지만, 동진 강물줄기는 무관심한 듯 느린 유속으로 들판에 물을 대주거나 그 들녘 물을 실어내 간다. 그리고 각을 뭉개버리고 퍼질러 앉은 야산들. 이 낮고 느린 풍경들이 진양조 가락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갑오년 그 해, 휘몰이로 번져가다 꺼져버린 ‘삼남의 들불’ 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리라.

최근 시인 장효문씨가 완성한 창작판소리 《전봉준》은 작품성의 평가에 앞서, 오는 94년 1백주년을 맞는 갑오농민전쟁(이하 농민전쟁)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다(67쪽 인터뷰 기사참조). 농민 전쟁을 문학 속으로 끌어들인 작가들이나 학자들은 그 주체세력, 동학과의 관련, 전 봉준의 생애, 그리고 미래지향성 등 그 성격 규정을 놓고 다양한 편치를 보이고 있어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운동 동학란 등 우선 용어에서부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미완의, 지속되고 있는 전쟁(혁명) ”이란 대목에서는 여러 견해들이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장효문씨와 취재팀이 답사한 ‘전쟁로’는 고부면 봉기와 전주성 무혈입성, 그리고 공주 우금치 전투 등 농민전쟁의 세 단계를 거칠게 되짚어보는 것이지만, 이 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만 있다면 호남은 물론 중원과 영남, 나아가 이 땅 전부가 ‘전적지’임을 깨닫게 한다. 늙은 왕조의 극심한 부패상과 이를 틈탄 제국주의의 발호는 19세기말 이 땅 구석구석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늘이었던 것이다.

농민전쟁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한 항목이지만, 왜 동학이 전국에 걸쳐 자리를 잡았고, 1862년 진주농민 봉기 이래 전국적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중에서도 유독 이 호남벌에서만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전쟁이 일어났던 것일까. 연구성과를 간추리면, 조선정부의 재정을 감당해야 했던 이 곡창지대는 안으로 정부 하급관리와 밖으로 제국주의의 수탈이란 이중적 고통에 시달렸으며, 이같은 사회경제적 원한을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 속에서 ‘해원’하고자 했다. 전봉준은 그 원한과 해원의 고리를 누구보다 잘 읽어냈다. 즉 곡창이란 사회경제적 환경과 동학이란 정신문화적 요인이 호남농민군을 결속시켰다는 것이다.

보국안민· 척양척왜 기치 높이 들어
1894갑오년 정월 10일께 “고부성을 혁파하고 조병갑을 잡아서 효수할 것”“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것” 등 4개항의 결의문을 내건 고부봉기는 조병갑을 놓치긴 했지만 성공작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각종 세금 포탈 때문에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그의 지시로 동진강가에 만석 보를 세우게 되자 원한의 물꼬가 터진 것이었다. 그러나 ‘민란’을 평정하러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는 구관보다 더한 폭정을 자행했다. 그해 3월 농민군이 전운소(관곡 보관소)가 있던 백산으로 진지를 옮기면서 고부봉기는 민권투쟁의 징후를 드러낸다. 이때 전봉준이 국가 기강의 해이를 지적하면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드는 창의문을 발표하자 삼남의 동학농민군들이 백산으로 몰려들었다.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이때부터 관군과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전라감영군을 대상으로 싸운다. 그해 4월6일 밤에 벌어진 황토현(황토재)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농민군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를 계기로 농민군의 사기가 한층 높아졌다. 이후 전봉준과 농민군은 황룡강 대승을 거치면서 6월 전주성에 무혈입성 하지만, 농민군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는 농민군들의 대의를 꺾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동학 내부에는 전봉준의 궐기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고, 권력다툼 많이 끊이지 않던 조정에서는 청국에 병력을 요청했고 한편으로 조선 강점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청나라가 텐진조약을 위반했다 하여 병력을 파견한다.

전봉준은 정세의 흐름을 원어내고 정부 측과 화약을 맺고 물러나는데 이때 전운소와 균전사의 모순을 혁파하고 “각국 상인은 항구에서 매매하되 도성에 들어가 저자를 설치하지 말고 노비문서를 소각할 것” 등 14 개항을 약속한다. 전주 화약 이후 호남지역에는 민중들의 여론수렴 창구인 집강소가 설치, 운영되지만 동학에 입교한 천민들의 횡포로 동학에 대한 비난도 높았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벼랑에 다다르자 농민군은 일본을 무찔러야 한다며 그해 9월 다시 일어선다. 호남의 전봉준과 충청의 손병희를 따르는 무리가 공주성 아래 여산벌에 모였을 때 그 수는 20만을 넘었다. 농민봉기에서 민권투쟁으로 옮아간 전쟁은 마침내 민족 ·민중의 항전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신식무기로 훈련된 일본군과 관군에 대패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을 노리는 외세들에게 발디딜 명분을 주고 말았다. 그러나 장편소설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씨는 이 농민전쟁을 “민중항쟁의 위대한 첫출발”로 보고 있다.

전봉준은 그해 12월 전북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1895년 3월29일 서울에서 처형당했다. “나라 위하는 붉은 정성 그 누가 알리오” 그가 남긴 마지막 시였다. 봉건주의와 외세에 짓눌린 ‘반도의 민중’을 구해 ‘민중의 대륙’을 이룩하려던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넋은 3공화국과 5공화국에 의해 기념비 전적지 기념관 생가 등으로 ‘정화’되었지만 장효문 시인은 호남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취재팀과 헤어지면서 “저 들녘의 구롱이나 나무 풀 한포기, 그리고 저 농민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넋이 발견된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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