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관리는 대학 자율에”
  • (김동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1.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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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신임 직선총장 金鍾云 교수

학자로서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5 · 16군사정권이 들어선 이래, 특히 유신시대와 5공 치하에서는 명망 있는 교수가 서울대 총장으로 발탁 되면 주위에서 ‘아까운 사람 또 하나 희생당하는 군’ 하는 반응을 불러 일으켰었다. 개교 이래 4년 임기(한때는 6년)의 총장이 열아홉 번 바뀐 것만 보아도 그 자리에서 영예를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19대 金鍾云 총장(영문학)은 교수들의 직선에 의해 선출되었으므로 출발부터 이전 총장 과는 다르다. 하기 나름이지만 직선총장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율권을 확보했으므로 운신의 폭이 커졌다. 학창시절부터 줄곧 리버럴리즘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왔다는 김 총장은 시종 질문에 온화한 미소와 함께 답변했다.

총장 직선은 일단 획기적 변화로 평가되고 있는데, 의미를 찾자면 어떤 것일까요?
우리 사회 전체의 민주화 요구에 발맞춰졌다고 보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과거에는 임명권자가 수시로 총장을 갈아 치웠기 때문에 학교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고, 실제로 학교 발전에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으므로 교수들이 그런 폐단이 없어져야겠다는 생각에서 현재와 같은 제도를 제안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학교의 자율권· 교권 확보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취임하시면서 서울대는 75년 종합화에 버금가는 제2의 도약을 해야 된다고 밝히셨는데.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구상되셨습니까?
아직 구체적인 프로그램까지 내드릴 처지는 못 되고, 그러나 서울대 발전사를 되돌아보면 1946년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대학들을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따라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종합대학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가 6· 25가 나서 학교가 현상 유지만 해오다가 비로소 65년에 종합화 10개년 계획을 만들어,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종합대학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종합화는 됐지만 그 뒤에는 대부분 국내 정치 불안 때문에 국제적 안목으로 봤을 때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도약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도 좋아졌으므로 서울대학교가 줄곧 구호로 내걸었던 민족의 대학, 세계의 대학이 될 수 있도록 교내 외에서 추진해야 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제1의 도약이 관악캠퍼스에로의 종합화였다면 이제 제2의 도약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서울대학교를 국제 경쟁력이 있는 대학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세계 유수의 학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전체로 보아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식자들이 5 · 16이후 현재까지 30년 동안 대학이 거의 황폐화되었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 황폐화 현상의 후유증은 아직도 대학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되며 특히 사제간의 관계에서 더욱 심한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 황폐화 현상은 지식인으로서의 교수, 또 사제간의 관계 등 정신적인 면에서도 나타나지만 사실은 학문의 업적 이라든가 학교가 생산해낼 수 있는 생산성 면에서도 걱정되는 현상이 많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황폐성, 학문적 불모성 등은 빨리 치유되어야 할 것입니다.

86년과 87년에 이른바 ‘텅 빈 졸업식’이라 해서 졸업생들이 총장과 문교장관 졸업 축사 때 퇴장해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 현장에 계셨습니까?
저는 그때 그곳에 나가지는 못했고 보도를 통해서 알았는데, 매우 서글펐지요.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지요.

사제 관계는 어떤 식으로 정립되어야겠습니까? 지금도 친분 있는 교수들 얘기를 들어보면 문제가 많은 것 같던데요.
저는 현재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응어리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층도 있고 또 교수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많이 호전되어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사제 관계라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었지요. 불행한 일들이 매일 학교에서 일어났었고 교수회의에서 논의조차 못해보고 학생을 처벌했었으니까요. 또 뚜렷한 이유가 없는데도 학교를 떠나야 했던 학생들도 있었고….

최근 서울대 사회학 연구 실습팀이 학사과정 재학생 9백37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의 분배 정도’가 불평등하다는 응답이 96.8% 이고 이 ‘불평등구조 극복’을 위해 59.8%가 근본적 개혁을, 31.3%가 점진적 개혁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설문 결과를 어떻게 보시는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그런 종류의 설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변해야 된다는 어떤 선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설문결과에 대한 신뢰도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젊은 학생들 상당수가 급진성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교수들이 대화를 통해 지도해야겠지요.

결국 학생들의 이러한 현실개혁 욕구가 학생운동의 근원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학생운동에 대해서 교수들이 ‘공부만 하라고 해서 달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학생들에게 ‘공부나 하라’고 말한 적이 없고 그것이 학생 지도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대체로 진보적이고 개혁 지향적이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고 또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라에서는 학생들의 그러한 성향이 당연히 나타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 해방 이후 현재까지 그러한 학생들의 현실개혁 욕구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고, 그래서 학생들의 개혁욕구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해야 된다는 것은 그걸 없애야 한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그러한 생각이 다음 시대를 창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모색하지는 것입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은 우리 지식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서울대 생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글쎄, 제가 학생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없었고, 다만 학생들이 써 붙이는 대자보를 기준으로 본다면 학생들이 상당히, 뭐라 할까 다소 멍한 상태가 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학생들이 개혁 지향적이라는 말이 나왔었는데 소련 공산주의 몰락은 특히 급진적 개혁을 원하는 학생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므로 당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80년 이후 운동권 학생의 주류는 NL이니 PD니 해서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 왔는데, 소련의 급변 이후 그들이 어떤 노선을 택하리라고 보십니까?
제 전공이 영문학이어서가 아니라 학생운동권의 사상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글쎄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주사파가 되었건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되었건 그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인간성의 자연스런 흐름에 배치되는 정치 체제는 오래 못 간다는 사실입니다. 재미있는 케이스가 하나 있는데 1920년대에 1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 술을 추방하겠다고 금주령을 내렸는데 몇 해 못 가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런 식의 인간성의 자연스런 흐름과 일치되지 않는 지나친 이상론은 배척당하게 되지요. 젊은 시절, 또는 혁명 열기에 들떠 있는 시기에는 그런 식의 이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인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평등이라는 이상도 인간성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착각인데 그렇다고 평등이라는 이상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지요.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향수와 같은 것인 사회정의 추구를 없앨 수 없는 것이지요. 사회주의의 극렬한 형태가 실패했다고 해서 사회정의라든가 평등의 이상을 향한 인간성의 추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금년에 서울대 음대에서도 부정입학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은 금년에 터졌지만 사실 소문이 수십 년 전부터 있어오다가 금년에야 부정입학의 실태가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석에서 학부모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능계 입시부정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들입니다. 서울대학에서만이라도 이 부정을 근절시킬 확실한 복안은 없으십니까?
그걸 없애려면… 확실한 방법이란… 시험을 시행하는 학교나 입시에 종사하는 사람의 양심의 회복밖에 없지요.

학부모들이 총장님 말씀에 실망할 것 같은데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금년에는 사회가 납득할 만한 다각적인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아마 시기가 되면 발표될 것인데 골자는 자율적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공동채점이니 해서 자율적으로 안했습니다. 얼핏 보기에 공정할 것 같은 것을 시행했는데 그건 겉보기만 그랬지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우선 예능계 시험을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그러면서 사회가 납득할 만한 장치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결국은 교권과 교육자의 양심, 자율성 보장, 이런 것들이 함께 조화를 이뤄야 근절될 것입니다. 이왕 시험 얘기가 나왔으니까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입시문제에 대해서는 학교에 자율권을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버드대학 등 세계 명문대학에서 자율적으로 학생을 뽑고 있는데 사회에서 시비를 걸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교권을 완전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가 나쁜 학생을 부정한 방법으로 뽑는다면 그 학교가 망하는 것이니까 세계 어느 나라건 학교에서 학생을 뽑는 것을 시비하지 않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시비를 합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학교가 변변치 못해서 그랬겠지요. 학교가 변변치 못해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니까 학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그렇게 되니까 학생을 뽑는데도 학교 스스로 뽑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에 필요한 학생은 그 학교에서 뽑아야 되지 않습니까. 《시사저널》에서 사원을 뽑을 때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을 뽑지 사회가 이러한 사람을 뽑아라 해서 뽑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도 교육의 목표가 있고 우리 목표에 맞는 사람을 뽑아야 되는데 지금은 사회가 룰을 정해주고 공동시험을 치르게 해서 학생을 뽑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나는 이 같은 제도는 깨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임 중에 학생선발 자율권을 관철시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교육부가 94년도부터 입시 개선안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국가고시와 학교시험을 절충한 것입니다. 서울대학교가 교육부 산하에 있기 때문에 당장 서울대학 스스로의 방법을 택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하겠습니다. 94년에 실시되는 개선안이라는 것도 서울대학 입장에서는 미흡한 것이 분명합니다.

제 개인적 소신이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의 여망이기도 한데. 서울대학교 총장은 그 권위로나 덕망으로 우뚝 솟아 사회에서 추앙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총장께서 서울대 총장 론을 한번 밝혀 보십시오.
일반 총장 론을 말하자면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구미 각국에서의 총장상은 훌륭한 학자 또는 지식인의 대표보다 행정적 능력과 경영능력, 더 구체적으로는 모금을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모금능력을 따집니다. 그러나 동양권, 특히 한국에서는 학문적 심벌이라든가 덕망 쪽이 강조되는데, 글쎄올시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달라지겠지만 현재 형편에서는 그게 잘 조화되는 것이 이상적인 총장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만…. 서울대 총장은 단순히 상징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 매일매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므로 고고한 학문업적이나 고매한 인격만 가지고 총장 일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경영능력이나 행정능력이 중요시된다고 해서 경영인을 총장으로 모시고 올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 두 가지가 절충된 인사가 이상적인 총장이 아닐까요.

63년부터 서울대학에서 강의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교수라는 직업이 ‘불행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신 때가 있었습니까?
국내 정치 현실 때문에 비애를 느꼈던 적은 수없이 많고, 또 그것은 교수직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서 있는 입장에서도 제가 불행하다고 몇 번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영문과를 지망하여 처음 학교 다닐 때는 재미도 느끼고 문제가 없었는데, 강의를 하며 연구 논문을 써야 되는 시기가 되니까 외국학자들이 쓴 것을 소화하기도 바쁜데 내가 무슨 의미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가 하고 회의가 들어 영문학 택한 게 후회되더군요. 그래서 전공 선택 없이 계열별로 모집했을 때 1학년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학문을 하려면 국학 공부를 해야 된다고 권유했는데 그때가 바로 제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때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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