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큰 코 다친 미국
  • 워싱턴 · 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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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패권주의 · 인권 상황 오판해 ‘강공 외교’ 참패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은 북경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중국의 인권신장이라는 풍차를 향해 돌진한 그의 방중 외교가 오히려 인권 탄압이 강화라는 엉뚱한 결과로 마감되자 미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그의 해임 주장도 나돈다. 70년대 중반, 카터 대통령 시절의 해묵은 인권외교 방식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가의 보도라 믿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을 과연 미합중국의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외교 수장으로 볼 수 있느냐는, 평소 주름살투성이인 율사 출신 국무장관의 외교에 대해 못마땅해온 여론이 이때다 하고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크리스토퍼 장관은 카터 대통령 시절 밴스 국무장관 밑에서 국무차관을 역임했다. 당시 한국의 ‘박정희 독재’를 인권 외교로 묶고, 주한미군 철수라는 지렛대로 들어올리려 했던 카터 외교의 첨병이 바로 크리스토퍼였다. 미군을 뺄테면 빼보라며 핵무기 자체 개발을 은근히 대항 무기로 쓴 박정희 대통령의 담력에 카터의 인권 외교가 무참히 와해됐던 경험을 미 민주당 행정부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미 여론은 크리스토퍼가 똑같은 전철을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 대륙을 상대로 되풀이한 데 대해 맹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인권 신장을 요구하며 무역에서 최혜국(MFN) 대우를 박탈하겠노라는 크리스토퍼의 위협에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은 완강히 맞섰다. “좋다. 미국 시장쯤 포기하면 그 뿐 아닌가. 대신 미국도 중국 시장을 넘볼 생각은 아예 말라”고 정면 승부를 걸었다. 특히 중국 공안 당국은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의 방중에 임박해 반체제 인사 魏京生과 89년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 지도자였던 王丹 등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억류했다. 마치 미국 정부에 대해 할테면 해보라는 식의 도전장을 내민 격이다. 특히 크리스토퍼를 수행한 존샤추크 인권담당 차관이 반체제 인사들을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중국 정부가 내정간섭이라며 강력히 항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제 겨우 국내 경기 회복세로 체면을 유지하는 클린턴 행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를 북경 당국이 소상히 파악했던 것이다.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궁색해진 백악관의 처지를 볼 때, 일단 밀어붙여도 별다른 반격이 없으리라 내다본 등소평의 현실 외교가 적중한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굴복했다. 3일 간의 방중 외교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 앞서 크리스토퍼는 북경에 진출한 미국 상공회의소 인사들과 회동했다. 미국 실업인들 거개가 크리스토퍼의 참패를 속으로 고소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업이나 장사를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으로 파악해온 노련한 실업인들은, 최혜국 대우 취소를 빌미로 중국의 인권 신장을 노리는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 정책은 현실을 무시한 외교로 생각했다. 이들은 ‘인권 외교’를 대세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으로 본다.

“클린턴과 중국이 짬짜미한 연극”
 중국 시장에 대한 미국의 좀더 광범위한 진출이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인권 신장의 첩경임을 실업인들은 크리스토퍼에게 역설했다. 상업적인 실리를 밑바닥에 깐 실업인 측유의 진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최혜국 대우 취소라는 최후의 독침마저 써버린 뒤 탈진 상태에 빠져 있던 크리스토퍼는 이들에게 ‘애걸했다’라고 북경주재 미국 특파원들은 전한다. “제발 당신들이 중국한테 영향력을 좀 행사해 주구려, 지금 무엇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지를 저들이 모르고 있으니 문제요. 저들이 실용적이 되도록 좀 도우시요.”

 한마디로 크리스토퍼의 무참한 실패였다. 이는 바로 클린턴 외교의 와해를 뜻하기도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 부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짐 호그랜드는 이번 실책을 “클린턴 행정부가 중국측과 짜고 벌인 술책이  아니냐”고까지 다그치고 있다. 오는 6월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의 재보장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때쯤 중국 인권의 대폭적인 신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로 인해 최혜국 대우 보장이 불가피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벌인 연극이 아니냐 하는 힐난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달 전 미 의회 사절단을 접견한 江澤民 주석 겸 총서기가 중국의 인권 신장에 대한 미국의 관심에 ‘상응할 만한 노력을 하겠다’고 한 약속이 그토록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번 실책을 분석하는 외교통들의 시각은 대충 두 군대로 쏠려 있다. 첫째가 중국이 대미 시각에 대한 미국 자체의 오판이다. 특히 소련권의 해체 이후 미 · 소 양극 대결 체제의 한쪽 공백을 중국으로 메우려 4~5년 남짓 노력해온 중국의 패권주의를 클린턴 행정부가 감지하지 못했거나, 설령 감지했다 치더라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거나, 화이트워터 사건 등 국내 상황에 찌들려 제대로 유념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외교통들은 중국의 저의가 여실히 입증된 대목으로 지난해 11월 강택민 주석의 쿠바 방문을 예로 든다. 시애틀에서 클린턴이 주최한 아 · 태 경제협의회(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강택민은 별도로 워싱턴에 초청받았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국(93년 14.3% 성장)으로서 미국의 관심과 찬사의 대상이 됐다. 미국의 경제 난국을 해소해 줄 가장 유력한 해외 시장으로서 중국의 입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중국 ‘외교 초강대국’으로 떠올라
 중국은 지난 한 해 동안 2백60억달러의 대미 수출 초과를 기록함으로써 출초 6백억달러의 일본에 이어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두 번째 교역 대상국이 됐다. 그러나 이런 경쟁의 순위를 고려치 않고 미국이 일본보다 중국에 더 집착하는 이유는 중국의 광대한 구내 시장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집착을 중국이 이용해 정치적 도전으로까지 치닫기에 이른 것이다. 워싱턴 회담을 마친 강택민은 귀로에 미국의 뒷마당 격인 카브리해를 들러 쿠바의 카스트로를 만난 것이다. 옛 소련이 쿠바에 해온 역할을 중국이 자임하겠다는 당당한 도전이었다.

 강택민-카스트로의 악수를 지켜보는 미국의 시선은 한마디로 우울한 것이었다.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외교적 ‘黃禍論’의 대두를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석달 뒤 현실로 터진 것이 이번 북경에서 치른 크리스토퍼의 엄청난 수난이었다. 미국의 인권 신장 요구에 ‘내정 간섭 불용’과 ‘중국의 인권은 중국식으로 해결하겠다’고 초강경으로 맞서는 李鵬 총리의 응전은, 적어도 국제 정치에 관한 한 89년 천안문 사태의 진압에 비유할 만한 단호한 진압 외교였다.

 북경의 이같은 변화와 성장을 감별해낼 중국통이 미 국무성이나 학계에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클린턴 행정부 입장에서 그 의견을 높이 살 만한 정황이나 국면이 못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두 번째가 중국내 인권 상황에 대한 미국측의 판단과 평가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중국의 인권을 감상적 수준의 인권 상황으로 오판한 것이 분명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북경의 인권 상황은 가히 폭발 직전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반체제 인사에게 ‘거사’를 알리는 전단과 통지문이 배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거사 일자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북경 공항에 발을 딛는 지난 3월1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또한 10일 개막된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 전체회의 개막 시기와 일치하는 데다, 천안문 사태 발생 만 5주년과도 맞물려 있었다. 이 붕 총리가 크리스토퍼 장관에게 “경제 개혁을 포기했으면 했지 결코 미국의 내정 간섭에는 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은 중국이 처한 현 상황의 심각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내 위기가 몰고온 강경 노선이 기존의 패권주의와 결합해 크리스토퍼를 거꾸러뜨린 것이다. 크리스토퍼가 귀국하고 이틀이 지나 외교부장 전기침은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협상 결렬의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 미국이 계속해서 최혜국 대우 취소를 물고늘어질 경우, 우리는 유엔 외교 문제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유엔 외교 문제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의 거부권을 의미한다. 북한이 핵사찰과 관련한 뼈 있는 경고다. 외교 면에서도 중국은 이미 초강대국권에 진입해 있다.
워싱턴 · 金勝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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