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앞에 고해성사합니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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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리 신부 · 평신도 ‘부끄러운 교회사’펴내 … 적극 친일행위 등 고백



 한국 가톨릭이 우리 역사와 민족 앞에 고해성사를 하고 나섰다. 1784년 가톨릭이 이 땅에 들어온 뒤 교회가 저질러온 부끄러운 과거를 스스로 고백하면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교회 내에서 일제 강점기에 자행했던 반민족적 역사에 대한 비판이 산발적이나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한 사제와 평신도가 각각 펴냈거나, 펴낼 예정인 ‘가톨릭 교회사’는 이 사회를 행해 스스로를 전면적으로 고백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난해 계간 《역사비평》 겨울호에 발표된 <일제하 천주교단의 친일활동>은 실증적 사료를 바탕으로 쓴 최초의 논문이었다. 교회 바깥에 발표된 첫 논문인 <일제하 천주교단의 친일활동>의 필자 박문수씨(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는 이 눈문을 확대해 《민족공동체의 구원과 해방》 2부에 <한국천주교회사>라는 5백장 분량의 눈문을 게재할 예정이다. 박씨의 작업이 평신도의 눈으로 본 가톨릭 역사라면, 최근 출간된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 천주교회사 - 교회 창설부터 1945년까지》(도서풀판 빛두레)는 성직자의 입장에서 본 교회사이다. 《역사비평》에서 실렸던 눈문을 포함해 두 책의 공통점은 여태까지의 교회사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 입장에서 한국 교회사를 본 것이 아니라 민족의 시각에서 교회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교사들 “안중근은 살인자”
 “기존 교회사는 사회 · 교육 사업 등 일제치하에서 교회의 긍정적인 역할만을 기술했을 뿐 일제에 찬동하고 적극 협력했다는, 교회사의 주류를 이루는 부끄러운 역사에는 침묵했다.” 70년대 이후 한국 가톨릭이 도덕성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부끄러운 과거를 그대로 둔 채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을 박문수씨는 지적했다. 과거 그릇된 역사를 반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대접을 받는 게 온당하다는 것이다. 박씨에 따르면, 일제하에서 형성된 잘못된 신앙 습관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교회 상층부를 이루는 일부 평신도와 주교, 그리고 사제가 천주교회 안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해 왔다. 교회 안에 고착한 이데올로기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뿌려놓은 ‘성속이원론’과 ‘정교분리론’이었고, 이는 신자들에게 사회 정의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게끔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문규현 신부(전북 김제 요촌천주교회)의 《…천주교회사》는 교회 창설부터 일제하까지 민족 현실을 외면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았다. 제국주의의 안내자로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행동과 조선을 보는 시각으로부터 《…천주교회사》는 시작된다. 조선 정벌을 목적으로 들어온 프랑스 군함의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한 선교사들의 눈에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과 약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1만여 강화도민의 참상과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음을 문신부는 비판한다.

 ‘지금의 고통을 감내하면 죽어 천상에서 행복해질 것’이라는 파이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가르침은 신자들에게는 민족이 처한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게 만들었다. 동학군을 ‘폭도’라 부르고 그들의 봉기를 ‘강도질’이라 규정한 선교사의 가르침을 따르던 한국 교인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백성들에게조차 배척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정교분리’라는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협력한 선교사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살인 행위’이며 ‘그런 살인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고 강변하고 나섰다. 지금까지는 안의사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행한 빌렘 신부가 그 일을 이유로 2개월 간의 성무집행 정지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문신부가 밝힌 내용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일찍이 안의사에게 세례를 주었던 빌렘 신부도 ‘안중근이 범한 죄악은 천지가 다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회개시키려고 갔던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와 천주교회의 정교유착은 더 철저해진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과 신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기당 같은 이는 파문을 당한 뒤 개종을 하기에 이른다. 천주교회는 3 · 1운동마저도 정치운동으로 규정해, 신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교 문을 닫고 퇴학까지 시켰다. 나아가 항일운동의 주동자였던 안명근은 두 외국 신부의 밀고로 투옥되기에 이른다.

 일제 말기로 치달을수록 교회의 친일 행위는 도를 더한다. 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일제의 진짜 의도를 애써 외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신사참배를 손선”했다. 교도권의 가르침을 거슬러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직자는 투옥되고 신학생들은 군대나 공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신사참배뿐 아니라 군기헌납운동에다 ‘대동아 전쟁 기구문’을 만들어 매일 미사 끝에 신부와 교우들이 일본 왕실과 동양의 평화, 전몰장병을 위해 기도할 것을 규정했는가 하면, 교회는 조선 청년 징병령을 대환영해 순교정신으로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외쳤다. 42년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경성교구장에 착좌한 노기남 주교는 창씨명인 오카모토라는 이름으로 “성전 목적 달성을 위해서 당국에서 지도하는 바에 무언복종할 것이오, 복종하더라도 겉으로 하는 체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할 것”을 신자들에게 명한다.

광복 이후 교회사도 집필
 “불의한 세속 권력과의 연결고리에 젖어 세상을 구원한 다른 복음적 가치에는 이미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교회였다.”라고 문신부는 지적한다. 밖에서 옷을 벗기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놓아야 교회가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그는 “역사를 잘못 알면 통일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감옥 속에서 깨달았다”고 밝혔다. 임수경양과 함께 판문점을 넘어온 뒤 3년4개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진정한 회개 없이 소망하는 삶이 있을 수 없고, 그래야 민족 안의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문신부는 지금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사를 ‘민족과 함께’ 새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

 “천주교회사는 늘 교회의 시각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신앙인들의 국민으로서 보는 시각과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서 있을 자리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천주교회사》의 서문을 쓴 함세웅 신부(서울 장위동천주교회)는 교회가 역사 과정을 거치면서 불필요한 옷을 너무 많이 입었다면서 “옷과 예수의 본사상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인 지금 시점에서는 교회 자체도 구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반민족주의자 척결의 예를 늘 프랑스에서 구해오곤 한다. 2차대전후 프랑스 천주교회에서도 치욕스러운 역사와 단절하기 위한 청산 작업이 있었다. 드골 장군이 로마 교황청과 협의를 거친 후 독일에 협력한 주교들을 모조리 해임했던 것이다.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을 향한 고해성사는 광복 50년이 되도록 일제 간재를 청산하지 못한 불행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는 4년 전부터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를 해마다 열어 ‘살인죄인’으로 규정했던 그를 ‘피로써 복음을 증언한 증인’으로 기리고 있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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