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생활 26년째 맞은 조용필
  • 서명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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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내 음악을 길렀다”

가수 생활 만 25년, 앨범 천만장 돌파, 대중 가수로서는 유례 없는 호암 아트홀 장기 공연(9월1일~30일 예정), 두 번째 결혼(3월25일)과 두 번째 중국 공연(5월 13일~15일 예정). 중국에서의 첫 음반 취입. 그러나 이 단순한 기록만으로 슈퍼 스타 조용필을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무명의 설움과 좌절, 대중 가수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공과 갈채, 대형 스캔들과 그의 뒤를 바짝 추적하는 젊은 가수들에 쫓기면서 어느덧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한 시대의 대중 정서를 담은 그의 노래에서 위안을 받던 열성 팬들도 그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그는 지난 25년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으며, 남은 노래 인생을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가.

14집이 나온 지 꽤 오래 됐는데 15집은 언제쯤 내놓을 예정인가요?
 지난번 미국에 가서 데모 테이프(가녹음)만 뜨고 왔어요. 4월 중순께 다시 건너가서 후속 작업을 마친 뒤 5월쯤 낼 예정입니다. 록 음악이 대부분이고 소프트 록이 좀 있어요. 8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도 동원합니다. 25년 기념 음반이기도 해서 꽤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반응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미국 팝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록 음악으로 돌아가는 추세가 있는데, 그런 흐름을 의식한 것입니까?
 저 자신 맨 처음에 록 음악으로 출발했습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어릴 때 했던 음악이 자꾸 생각나고 그쪽으로 돌아가게 돼요. 그런데 이게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더군요. 대중 음악의 흐름은 시계 바늘이 돌듯이 4반세기 만에 한번씩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해요.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이거든요. 모든 일이 너무 기계화하고 컴퓨터 문명이 지배하다 보니 그 반작용으로 언플러그드 음악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요. 노래말도 인간의 순수성을 그리워하고 거기에 호소하는 쪽으로 가잖아요. (그는 “록을 하더라도 서구적인 록, 지금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화려한 록이 아니라 우리 정서와 가락이 녹아 있는 록을 추구하겠다”라고 덧붙였다.)

결혼 생활이 개인적 안정을 가져다 주겠지만 혹 활동이 뜸해지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가정적 안정과 행복도 좋지만, 저 나름의 음악 세계와 리듬을 지키는 일은 더 소중합니다. 그게 깨지면 전 음악을 그만두어야 해요. 지금까지 정신적으로 무척 어둡게 살아왔습니다. 안정감이 느껴지고 안주하고 싶어질수록 되려 더 어두운 정서, 외로운 정서를 몸에 담아 두려고 애썼어요. 음악의 원동력이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그 여자(안진현)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웬만해선 견디기 힘든 제 생활을 말없이 지켜봐 줄 여자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정서라니 좀 아리송하군요, 왜 어두워야만 노래가 나옵니까?
 저희 세대가 다 그렇듯이 너무나 못살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 너무 많은 유년 시절을 겼었습니다. 또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생각에 반발하면서도 그것을 마음에 담고 살았고요. 한이나 어두움, 그게 우리 세대의 보편적인 정서가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근본 정서는 안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뒀지만, 일본 문화가 한국에 진출할 발판을 만드는 데 이용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의 눈길도 있습니다.
 제가 혹시 그런 일에 밑거름이 되는 건 아닌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결국 하나의 상품이라고 봅니다. 힘들다는 일본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저 나름의 야심도 있었고, 그쪽 사람들이 제 음악을 원했어요. 그게 서로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정책적으로 조작된 히트는 자본주의 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굳이 변명하기도 싫고, 제발 그런 시각으로 제 문제를 보지 않았으면 해요.(최근 한 일본 언론은 조씨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여기 와서 자유롭게 노래하는데 왜 한국은 우리 가수들을 안 받아들이느냐”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두 나라 사이에는 가수가 대답하기 어려운 역사라는 고리가 있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원했기에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였다.)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실험하면서도 왜 일본에서는 엔카만 부르나요?
 그건 사실과 전혀 다른데요. 일본에서 엔카보다도 뉴 뮤직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저는 엔카를 잘할 수 있는 가수가 못 돼요. 엔카 가수는 보타이를 얌전히 매고 간드러지게 발음을 굴려가면서 불러야 하는데, 전 우리말 가사도 안 굴리는 편이거든요.

한때 ‘오빠 부대’로 불렸던 팬들도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팬들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입니까?
 팬들에게는 우선 계속 활동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제 음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들과 너무 동떨어진 음악을 내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팬들만 의식한 음악을 내놓을 수도 없습니다. 제 음악에 익숙한 팬들에게 너무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컬러, 새로운 방향,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자신을 최대한 상품화한 본격적인 상업 가수’라는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대중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이상의 영광과 보람은 없습니다. 대중 음악은 팔려야 한다는 게 제 믿음입니다. 많이 팔린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제 작업과 기획실(필 기획)의 작업은 다릅니다. 전 음악을 만드는 일에만 책임을 지고, 그걸 매스컴에 알리고 상품화하는 일은 완전히 기획실에서 맡지요. 음악은 외로워져야, 외로워지려고 해야 잘 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곧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26년째 가수 생활을 해오고 있는데, 그동안 가장 처참하게 벽에 부딪혔던 시기가 언제인가요?
 끊임없이 부딪혔지요. 80년대 한 5,6년간 1년에 10곡씩 내놓고 방송 출연하고 공연 다니다 보니까, 나올게 다 나왔더라구요. 더 이상 나올 게 없어요. 그럴 때 몇 개월씩 어디 가서 잠적하고 그랬지요. 80년대 중반부터는 늘 벽에 부딪혀 있는 셈인데, 다음 판이 자꾸 무서워지고 했어요.

요즘 바짝 뒤를 쫓거나 앞서 나가는 후배 가수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이가 있습니까?
 사실 전 후배나 동료 가수와 거의 안 만나는 편이고 그들의 노래도 안 듣습니다. 가끔 뛰어난 후배들을 연구하고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만, 안 들어요.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쫓아가게 될까 봐 두려운 거지요. 제 방식대로 노래하면서 더 크게 승부해야 한다는 초조감도 느끼고…. 이게 늙어가는 건지도 몰라요.

올 가을에 한달간 장기 공연을 한다는데, 재도약의 신호탄입니까?
 84년에 프랑스 문화부 초청으로 프랑스에 갔는데, 이브 몽탕의 4개월 장기 공연이 열리고 있더군요. 너무 부러워서 그때부터 꿈으로만 간직해 오다가 10년 만에 뜻을 이룬 겁니다. 앞으로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줄이고 국내와 중국 공연에 힘을 쏟으려고 합니다.

가수로서의 마지막 목표랄까요,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계속 노래하는 거지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러도 현역은 현역인데…, 그렇게 남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확실하게 존재하는, 중심으로 빛나는 현역으로 남고 싶어요.

 권불십년인가. 그에게는 인기의 절정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 슈퍼 스타의 초조함과,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중년의 절박함이 묻어났다. 부인의 재력을 둘러싼 국내 언론의 과장 보도에 지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의 표정은 생기로 가득 차고 빛났다. 15집 데모 테이프를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 틀어주고 경향을 설명하는 그를 보면서, 천생 소리꾼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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