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겨레의 자화상 ‘판문점’
  • 판문점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1.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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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대결의 상징에서 화해 ·교류의 마당으로 탈바꿈… 일촉즉발은 옛일

판문점 방문의 ‘첫 키스’를 맛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덤덤하다. 민족분단의 현장이니 동서 냉전구조의 마지막 유산이니 하는 거창한 상징이 주는 이미지보다는 판문점이란 ‘명소’에 대한 호기심이 이들의 감정을 희석시킨 탓이다. 이 달 5일 모처럼 판문점을 찾아 기념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는 서울교대 부속국민학교의 한 학부모는 “가슴이 쩡하다”면서도 “왠지 남북대치의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이 첫 해외근무지로 판문점 관광안내역 5개월째인 포먼 일둥병도 판문점이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하다”고 털어놓는다. 또 최전방 미군 관측초소(GP) 중 하나인 올리엣 초소에 근무하는 하든 일등병도 “요즘은 북측의 특이한 동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판문점은 조용하다”고 전한다.

본디 이름은 널문리… 1년에 10만명 방문
판문점 풍속도의 또 다른 단면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유엔사령부 전방기지이기도 한 캠프 보니파스 내의 ‘수도원’이란 큼직한 팻말 밑에 ‘비무장지대(DMZ)의 즐거운 狂增의 집’이라 쓰여진 부제가 눈길을 끄는 휴게소가 그것이다. 간단한 음료수와 기념품을 파는 이곳 내부의 한켠에는 판문점 방문소감을 적도록 한 방문록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인들은 예외 없이 “조국의 통일” 운운하는 글을 쓰는 데 반해 외국인은 거의 예외 없이 “멋있었다 “흥미진진했다”라는 감탄조의 글을 주로 쓴다는 점이다. 자신의 제대날짜를 적어놓은 사병도 있다. 우리 측에서만 하루평균 3백여 명의 관광객, 1년이면 10여만 명이 찾는 판문점은 어느덧 민족의 아픔의 상징이란 이미지보다는 국제적 해빙무드에 따라 민족화해와 교류의 장으로 탈바꿈하는 느낌이다.

판문점.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 평양에서 남쪽으로 2백15㎞ 지점에 있는 이곳의 본디 이름은 널문리다. 지난 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진 후 76년의 ‘도끼만행 사건’, 84년의 소련인 망명 사건 등으로 80년대 중반까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던 남북대치의 현장이었다. 특히 68년 1월21일의 청와대 기습사건, 1월23일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0월 북한 게릴라 1백20명의 울진 ·삼척 침투사건 등 일련의 사태가 말해주듯 휴전 후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남북한 관계는 긴장과 불신으로 일관했던 게 사실이다. 이 와중에 판문점의 기능이란 것도 유엔군 측과 공산 측의 삿대질과 고함이 오갔던 군사정전 위원회(MAC)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남북대치의 빗장이 풀리면서 유명무실했던 판문점의 기능은 180도 탈바꿈했다. 71년 8월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가 제안한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회담’을 북측이 받아들여 마침내 8월20일 분단 후 첫 남북대좌가 이뤄진 곳이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이었다. 이 후 70년대 중반까지 ‘중감위’ 회의실은 실무 접촉과 예비회담의 장소로 활용돼왔고, 북측 지역의 ‘판문각’과 유엔군 측의 ‘자유의 집’이 본회담장소로 그 기능을 발휘해왔다.

통일논의 봇물 터지면서 질적 변화
판문점이 질적으로 모습을 바꾼 계기는 88년부터 일부 재야단체와 학생단체에 의해 통일논의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판문점으로 대변되는 민족분단의 현장은 지난 89년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 외국어대 임수경양 등의 방북사건 이후 일부 학생과 재야인사들에게는 통일운동의 ‘성지’가 된 느낌이다. 사실 판문점이 본격적인 남북대화의 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들어서였다. 특히 우리 측이 84년 9월 북한 측에서 제공한 수재물자(쌀 7천1백96톤의 약품 7백59상자)를 받아들이고, 이듬해 9월에는 분단 40년의 벽을 헐고 양측에서 1백51명의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이 오간 통로가 다름 아닌 판문점이었다.

통일원의 한 당국자는 판문점의 위상변화를 “민족분단사의 흐름 및 남북관계의 진전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 논리에 따르면 판문점 위상은 3기 정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 1 기는 휴전 후 60년대 말까지로 북한의 연방제 통일안에 맞서 우리가 ‘선경제건설 후통일론’과 함께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시기, 남북접촉의 ‘암흑기’이다. 이 당시만 해도 판문점은 실속없는 군사정전위원회의를 위한 장소의 수준이었다. 2기는 71년 8월 첫 남북대좌를 계기로 72년의 ‘ 7 · 4 남북공동성명’ 73년의 ‘ 6 · 23 선언’ 등 북한의 통일공세에 맞서 우리측이 나름대로 자신감있게 나간 시기다. 바로 이때가 판문점에서 남북은 활발한 접촉과 회담을 열어 나름대로 제기능을 찾은 시기이다. 이후 북한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빌미로 73년 8월 대화중단을 선언했고 그 여파는 84년까지 지속됐다.

우리의 국력이 북한에 앞서가면서 남북대화에서 종전의 수세적 입장을 공세적 입장으로 바꾼 시기가 제3기다. 3기는 학생과 재야단체 등에 의해 통일운동 열기가 본격적으로 고조된 시기이기도 하다. 90년대 판문점이 3기에 속한다.

이 같은 시대적 특징 외에도 판문점의 변화는 최근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휴전 위반사례가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점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체육회담 국회회담 총리회담 등 남북 간에 각종 회담과 교류가 부쩍 늘어났다는 점 △판문점 지역 남방한계선 lkm 내 미군 경비구역이 한국군에 이관되리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휴전 이후 한 ·미 ·북 희생자 1천4백 35명
휴전협정 위반사례는 경미한 사안이 아직도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총격사건과 같은 중대사건은 지난 84년의 소련 민간인 망명 사건을 제외하고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게 미8군 측의 얘기다. 중립국감독위 스웨덴 대표인 카이 홀름버그 소장도 “과거 한달에 1백여 건씩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발생했던 것에 비해 요즘은 고작 7~8건 정도이고 그것도 경미한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미 8군 측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휴전 이후 지금까지 미군 89명 한국군 3백78명 민간인 1백60명이 희생됐고, 미군 1백32명 한국군 6백85명 민간인 6백85명이 부상했다. 또 북한군은 8백8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1백60명이 부상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의 사고가 70년대 이전에 발생했다”고 미8군 관계자는 설명한다.

남북대화는 지난 71년 8월 첫 대좌가 있은 후 지금까지 약 2백12차례의 접촉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지난 73년 8월 대화를 중단하기까지 약 70여 차례가 열렸다가 이후 84년 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공백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화의 대부분은 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됐음을 알 수 있다.

“통일기반 조성 전진기지로 발돋움할 것”
판문점의 단적인 변화는 또 있다. 빠르면 10월부터 미군 관할 최전방 초소 경계업무가 한국에 이관된다. 이는 탈냉전 이후 한반도의 긴장완화 및 미국의 이해타산이 맞물려 이뤄진 것이지만 민족 자존심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귀결이란 지적이다.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의 우리측 지역은 여전히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나 이 지역으로 향하는 비무장지대 lkm 길목과 칼리어 및 올리엣 등 두 군데 미군초소를 우리 군이 맡게 된다.

판문점은 광복 후 숱한 사람들이 오간 현장이다. 광복 3년 후인 1948년 김구 ·김규식 선생이 ‘조국통일’의 집념을 안고 38선을 넘었다. 지난 59년엔〈프라우다〉의 평양 주재 기자였던 이동준씨가, 67년 3월엔 ‘위장간첩’ 이수근씨(당시 북한 〈중앙통신〉기자)가 판문점을 넘어 탈출했다. 그후 72년 5월과 6월 사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비밀리에 판문점을 오가며 ‘ 7 · 4 남북공동성명’의 전초작업을 벌였다.

오늘날 판문점은 긴장 같은 것은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다는 게 중평이다. 판문점을 찾는 사람에게 아직도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 있다면 15년 전 ‘도끼만행 사건’이 벌어진 현장일 것이다. 북으로 통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불과 10여m 떨어져 있는 문제의 미루나무 그루터기엔 그날 희생된 미군장교 2명을 위한 기념비석이 있을 따름이다.

이제 판문점은 단순한 분단의 현장이 아닌 남북교류의 장,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그 이미지를 바꿔가고 있다. 동맹국인 소련의 공산당이 붕괴되고 전 세계적으로 탈사회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북한도 생존을 위해서는 융통성 있는 대남정책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수교를 서두르고 미국과의 관계개선도 모색할 것으로 보이나, 이 두 나라의 전제조건이 남북대화의 지속이고 보면 판문점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남북대화사무국의 한 당국자는 “앞으로 남북이 유엔에 가입하고 소련사태 등 국내외적 영향을 받아 판문점의 위상은 또 한번 달라 질 것이다. 결국 판문점은 남북교류 협력의 관문이자 통일기반 조성의 전진기지로 발돔움 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판문점은 예비접촉 등 비본질적이고 지엽적 기능을 위한 장소로 머물고 정치 및 군사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결국 서울과 평양이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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