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없는 지방의회‘市 귀에 경읽기’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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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장애인 위한 조례 무시 … 공공시설 매점 43개 중 1개만‘선심’

지방 의회가 애써 마련한 조례를 집행부가 묵살해 지역 주민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충북 청주시의회는 지난해 봄 시의회로서는 국내 처음으로 행정 정보 공개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으나 단체장이 이를 거부한 소동이 벌어졌다. 부천시의회도 지난 92년 12월 공공 장소에 담배 자판기를 설치하지 말자는 조례를 만들어 부천 시민은 물론 전국민의 호응을 얻었으나, 시행 3년째를 맞은 요즘 집행부의 무성의로 실효를 거주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집행부가 지방의회의 입법 정신을 성실히 집행하지 않는 사례는 허다하다.

 광주시의회는 지난 92년 8월 장애인 복지 문제를 개선할 요량으로, 김재균 의원(현재 시의회 산업건설위원장)이 발의해 다른 시ㆍ도 의회에 본보기가 될 만한 조례 2건을 통과 시켰다. 내용은 광주시 공공 시설 안에 설치한, 또는 앞으로 설치할 매점과 자판기에 대해 장애인에게 신청권을 주고, 일반인에 우선 하여 이를 허가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례는‘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는 부칙까지 덧붙여 통과됐으나 시청으로 넘어간 지 1년이 훨씬 넘도록 담당자 서랍에 갇혀있다. 94년 3월 현재 광주시 소속 13개 공공기관에 있는 매점은 43개이다. 그 중 조례가 통과된 이후 새로 설치한 매점도 6개나 된다. 그런데 조례에 따라 장애인에게 설치를 허가한 매점은 겨우 1개뿐이다. 그나마 이 매점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그것도 새로 지은 수영장 안에 물을 열었다. 현재 이 매점은 하루 평균 수입이 평일 2~3만원으로, 지체 장애인 장일수씨(34) 한 가족만 근근히 먹고 살 정도이다.

 장애인에게 우선 허가하도록 한 자판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광주 시내 공공기관에 설치한 자판기 수는 20개 기관 74대이다. 그중 장애인이 운영하는 자판기는 고작 9대이다. 물론 올해 상반기 안으로 자판기 5대를 추가로 장애인에게 허가할 예정이지만, 그것도 조례안을 냈던 김의원이 지난해 12월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왜 조례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느냐’고 따져 얻어낸 것이다.

 광주시가 조례를 홀대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매점의 경우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엄연히 계약 기간이 정해진 남의 매점 문을 하루아침에 닫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시청은 산하 기관 별로 구성된‘직원 상조회’도 신경써줘야 할 처지이다. 광주 시청 신근식 보사국장은“각 기관에 설치된 자판기는 5급 이하 지방 공무원으로 구성된 직원 상조회가 운영하는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은 상조회 회원들의 각종 경ㆍ조사 비용으로 쓰고 있어 당장 그만두게 할 형편이 못된다”라고 밝힌다.

“시청 직원 이익에 장애인 뒷전”
 그러나 장애인들은 시청 쪽 설명을 핑계라고 본다. 상조회와 장애인의 이해 다툼은 시청의 힘으로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데도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네 이익만 앞세운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시청은 조례가 통과된 뒤에도 일반인과 매점을 재계약하면서 관행대로 계약 기간을 2~3년으로 했다. 반면 장애인에게 허가한 염주동 실내수영장 매점의 계약 기간은 1년이었다.

 광주시가 조례 지키기 시늉만 하는 동안, 장애인 단체는 손해만 봤다. 광주시장애인연합회(회장 이재홍)에서 자판기 신청 업무를 맡은 고경주씨(39)는“구형 자판기 1대 값이 2백 40만원이다. 신형은 3백만원이나 된다. 우리 깜냥에 거액을 투자해 기계를 사들였는데, 모두 사람이 뜸한 구석에 처박혀 적자를 면치 못한다”라고 푸념한다.

 시의회는 조례가 방치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시 의회의 힘이 집행부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조례안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던 김재균 의원은“얼마 전에는 시장이 의회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무쳐 직원 인사까지 단행해 문제가 된 적도 있다. 의회의 의사 결정력이 무시당하는 한 진정한 주민 자치는 기대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30년 만에 다시 닻을 올린 지방자치제호. 그 배는 지금 곳곳에서‘집행부 독주’라는 암초에 부딪히고 있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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