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주문 생산’한다
  • 런던·한준엽 통신원 ()
  • 승인 199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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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별 조작된 ‘디자이너 베이비’탄생…의학·종교계 윤리 논쟁 치열

지난 79년 7월25일, 영국 랭커셔 주에 있는 올드햄 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탄생한 시험관 아기 루이스 브라운 양은 어느덧 16세의 성년기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시험관 아기의 원조 루이스양에 이어서 영국 의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또 한명의 여자 아기가 2월28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소피 메이 클라크로 그의 출생은 루이스 브라운 때만큼 종교계와 의학계를 도덕과 윤리 논쟁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것은 소피가, 태어날 아기의 성별을 사전에 선택해 인공적인 방법으로 결정해서 출산한 첫 번째 아이라는 점 때문이다. 조물주의 고유 영역인 성별의 결정을 피조물인 인간이 빼앗아 행사함으로써 앞으로 빚어질지도 모를 남녀 간의 수적 불균형 등 인간 세계의 구조 변화에 대한 우려는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소피의 탄생이 ‘디자이너 베이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라고 보도한다. 일부 기사는 주문 맞춤복처럼 성별은 물론 피부색, 머리털, 신체 조건, 심지어는 지능까지도 재단한 ‘맞춤 어린이’를 그때그때 차질 없이 생산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다소 성급한 지적으로까지 발전했다.

“신의 뜻에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
 영국 언론들이 ‘디자이너 베이비’ 제1호라고 명명한 소피는 올해 32세의 동갑내기 부부인 닐 클라크와 질란에게서 태어났다. 클라크 부부는 두 번째 아들을 낳은 뒤로 또 임신할 경우 꼭 딸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질란은 출산후 5년이 흐르자 자신의 임신 가능성은 물론 임신이 된다 해도 꼭 여아를 임신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남편의 정자 숫자가 다소 감소됐다는 악조건에서 임신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4월초 클라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태아 성별 선택시술 방법과 이를 시술하는 런던 젠더 클리닉을 알고 나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

 “클라크는 형제 중 장남이고 나는 사내 아이가 없는 세자매 가운데 둘째이죠. 어쩌면 어린 시절 같은 성의 형제 자매로 구성된 가정에서 자라며 이성 형제 자매를 바랐던 것이 우리의 아들들에게 여자 동생을 갖게 해주려고 한 동기이기도 합니다.”

 희망대로 아들 둘에 이어 딸 하나가 절묘하게 추가돼 그들의 소원대로 완벽한 가족 구성을 이룬 클라크 부부의 기쁨과는 달리 영국 사회의 종교 지도자, 의학자, 심리학자들은 디자이너 베이비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분석 거론하고 있다. 먼저 종교계와 전통적인 윤리의 우선을 주장하는 의학자들은, 자연이 신의 섭리에 따라 조화 속에 유지해온 성의 균형을 과학자들이 인위적으로 깨뜨리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맞서 진보적인 이루 학자는, 의학과 과학은 신의 뜻이자 자연의 예정으로 인간에게 닥쳐오는 질병과 늙음에도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진보적인 학자들이나 의사들은 이미 통용되고 있는 피임약에 의한 임신 회피, 그리고 임신중절 수술 등은 근본적으로 자연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지만, 성별을 사전에 선택하는 일은 오히려 바라지 않는 성의 태아를 낙태시키는 살인 행위를 사전에 방지하는 안전판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반해 종교계와 학계 그리고 의회내 도덕론자들은 태아의 성별 선택 시술 요법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재앙과 저주의 씨앗처럼 여기며, 이것을 상자 안에 다시 집어넣으려는 어려운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목소리는 예상대로 영국 성공회와 천주교단으로부터 울려나온다. 성공회의 제2인자 존 요크 대주교는 “부모들은 자녀를 신이 주신 기쁨의 은총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녀를 그때그때 기호에 맞게 편의에 따라 슈퍼마켓에서 고를 수 있는 소비품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충고한다. 천주교의 바실 흠 추기경 역시 태아 성별 선택 요법은 카톨릭의 출산에 관한 교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백인종은 여아, 유색인종은 남아 선호
 정치계의 반응도 여·야가 뜻을 같이 했다. 집권 보수당의 하예스 의원은 “자연의 질서와 균형을 어지럽히고 깨뜨리는 위험한 인간들의 불장난이다”라고 비난했다. 이밖에 이 시술 방법이 전통적인 인간 사회의 오랜 사내 아이 선호를 다시 부추겨 남성 우위 사회로 되돌아 갈 빌미를 제공했다는 경고도 나온다. 특히 남성의 구성 비율이 여성을 월등히 앞지를 경우 남성의 과격화와 경쟁심, 심지어는 남성의 호모화가 촉진돼 인간의 성생활 양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일부 심리학자는 말한다.

 한편 영국내 태생학 연구와 체외 인공수정에 의한 임신 문제를 통제 관리하는 ‘인간 수정 및 태생학 관리국’은 정작 성별 사전 선택 시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측의 무관심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디자이너 베이비 파동의 진원지인 런던 젠더 클리닉은 소피의 탄생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매일 평균 80통의 문의 전화와 함께 시술 상담 부부들의 직접 방문이 전보다 10배나 늘었다고 말한다. 이 진료소 책임자 피터 리우박사는 지난해 초 진료소 개설 이후 1년 동안 상담을 거친 부부가 5백 쌍, 정자 분리 시술을 받은 부부가 2백 쌍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2백 쌍 가운데 4분의 3은 아시아계 및 유색 인종으로 대부분이 여자 아이를 먼저 낳은 뒤 사내 아이를 원하는 반면, 영국의 백인 부부들은 사내 아이를 먼저 낳고 여자 아이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영국의 인구 구성과 분포 상황을 보면 해마다 출생하는 신생아 가운데 평균 53%가 사내 아이다. 그러나 전체 인구 분포는 50대 이후 여자의 비율이 남자를 앞지르기 시작해서 전체적으로는 100 대 105로 여자가 남자보다 많다.
런던·韓准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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