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 키우기 정답은 있지만…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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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재벌화’가 묘책…실시까지는 어려움 많아

 ‘경제력 집중 방지’와 ‘소유 제한 완화’라는 두 열차가 달리는 레일은 달랐다. 우리 사회에서 두명제는 각기 다른 필요성 때문에 주장되었고, 금융산업에 있어 두 열차가 만날 수 있는 교통의 결절점은 없었다. 금융 전업 기업군은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명제를 한곳에서 만나게 하는 ‘해방구’이다. 경제력 집중이란 폐해를 차단하면서도 금융기관에 주인을 찾아주는 절묘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조세연구원 安鍾吉 연구위원은 최근 조용하던 그의 방이 금융기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로 북적거리는 경험을 했다. ‘주요국의 금융그룹 현황과 정책적 시사점’이란 연구 보고서 때문이다. 금융 전업 기업군을 담은 이 보고서는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들여다본 학계의 첫 보고서라는 점에서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그만큼 이해관계가 걸린 집단이 많다는 사실도 입증한 셈이다.

 금융 전업 기업군은 동일인 또는 동일 기관의 경영권 아래 있는 복수 기업으로서, 영업 범위가 금융업에 한정돼 있는 기업집단이다. 금융 재벌인 셈이다. 제2금융권(증권·단자·보험 등)과는 달리 은행은 주인이 너무 많다. 주인이 없는 셈이다. ‘동일인 주식소유 한도’라는 소유 제한(8%) 규정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무주공산에 따른 폐해는 만만치 않았다. 책임 경영이 안돼 비효율성이 컸다. 그렇다고 주인을 만들어 줄 경우 예견할 수 있는 폐해도 자못 심각했다. 은행을 소유할 능력은 자본력을 가진 산업 재벌일 터이고, 이는 경제력 집중 심화라는, 우리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금기 사항을 건드리게 된다. 실제로 제2금융권에서 보듯, 사금고화라는 역기능도 도사리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정부는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방황했다.

 정부로서는 금융 전업 기업군이 오랜 번민에 종지부를 찍는 화끈한 대안임이 틀림없지만, 해방의 희열을 즐길 처지는 못된다. 복잡한 인수분해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무부는 금융 전업 기업군 육성을 93년6월 말에 성안된 신경제 5개년계획 금융개혁 부문에 ‘94~95년까지 여건을 조성한다’고 한 줄 걸쳐놓은 후 연구 용역을 주는 것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잠행을 계속하던 이 문제가 겉으로 불거진 것은, 3월초 민자당 국가경제력 강화특위가 이 문제를 불쑥 꺼냈고, 3월17일 朴在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서울대 강연을 통해 언급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경제비서실의 한 관계자가 “박수석은 금융산업의 경쟁력 강화 일환으로 이 문제를 거론했을 뿐 특별한 무게를 실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금융기관들의 촉각은 곤두섰다. 이 문제가 쟁점화하자 재무부는 곤혹스러운 눈치다. 재무부 李桓均 1차관보는 “육성한다는 의지 외에 상황이 진전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부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 단계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전업 기업군’ 지정 그 자체가 큰 이권
 금융 전업 기업군을 단순하게 말하면 소유제한을 풀어 주인을 만드는 것이다. 금융업을 전업으로 삼기를 희망하는 모든 이에게 일정한 기준을 정해 문호를 전면 개방하면 된다.반면 재무부와 일부 학자는 이 문제를 고등수학으로 이해한다. 누가 금융기관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경영 형태가 달라질 수 있고, 나아가 국민 경제의 자본 형성과 경제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다.

 금융 전업 기업군을 만드는 목적은 강하고 단단한 금융기관을 키우는 데 있다. 정부는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꼭 주인이 있어야 하느냐 하는 원론적 회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주인이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난다 해도, 특혜 소지를 주지 않을 투명한 기준을 만드는 일이 우선 문제가 된다.

 지정 이후에도 그림자는 또 있다. 금융 전업 그룹은 산업 자본과의 연결 고리를 아예 끊거나 최소화하겠지만, 여전히 산업 자본과 비공식적으로 단합할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동일인에 대한 여신한도 준수 여부를 더 열심히 챙겨야 하지만 감독 능력은 거북이 걸음 수준이다. 또 산업 재벌에서 보듯이 한 기업의 부실이 그룹 전체로 비화할 위험도 있다. 이런 확산 위협(contagion risks)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업종간 폐해 차단 장치인 방화벽(fire walls)을 정밀하게 쳐 놓아야 한다. 또 결과적으로 고객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은행을 이용하는 고객에 대한 정보가 증권 영업에서 악용될 수 있다. 서로 다른 금융기관을 거느린 금융 전업 기업군의 이해와 고객의 이해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이런 이해 상충 행위를 막으려면 차단벽(chiness walls)을 세워야 한다.

 이런 폐해는 이미 선진국들이 겪었다. 한국은행 朴載俊 조사1부장은 “금융 전업 기업군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아쉽게도 이렇게 보는 안이한 시각들이 많다”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조세연구원 안연구위원도 “이 문제는 재벌 정책과 금융산업 재편성이라는 장기 구도와 맞물린 복잡한 사안이다.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이해 당사자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다. 금융 전업 기업군은 소유 제한이 대폭 완화되고 조세와 금융상의 지원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업군에 지정되지 않은 은행들은 한층 소유 제한이 강화되고, 주인이 있는 제2금융권도 정부가 제한 규정을 두려는 방침이기 때문에 이 제한에서 해방되는 기업군 지정 그 자체가 큰 이권일 수 있다.

 현재 금융 전업 기업군 지정 자격을 갖춘 유력 후보들은 꽤 있다. 신한은행을 간판으로 하는 신한금융그룹이나 장기신용은행을 모기업으로 하는 장은금융그룹은 대표 주자이다. 시중 은행 1인자인 제일은행과, 서민 금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을 갖는 국민은행도 모기업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리한 고지에 있다. 지불결제 기능을 갖는 은행은 금융의 핵일 수밖에 없고, 전업기업군의 구도 자체가 은행 중심으로 짜여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산업 자본 견제 세력으로 키울 수도
 대신증권이나 고려증권도 금융 재벌로 떠오르려고 야망을 불태워온 기업들이다. 은행이 없다는 결정적 약점은 은행 인수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보험사들도 후보로 거론된다. 특히 산업 재벌의 영향력이 적은 대한교육보험이나 대한생명이 대상으로 꼽힌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세력은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이 혼재된 재벌이다. 유력한 후보는 금융업 비중이 그룹 매출액의 53%를 차지하는 동양그룹이다. 금융 그룹화에 의욕을 보여온 이 그룹은, 그러나 나머지 47%에 약점이 있다. 외국처럼 금융 그룹이 아닌 ‘전업’ 그룹이므로 제조업 등 비금융 부문을 처분해야 하는 것이다.

 금융 전업 기업군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다면 산업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길항 세력’으로 자리잡고 금융 소비자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빛’은 그림자를 제거해야 가능한 일이다. 소유 구조 등 금융산업의 장기 구도에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대체로 자생적으로 성장해 지분이 많이 분산된 외국 금융 그룹에 비해 우리는 소유 구조에서 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몸집도 왜소하다. 13개 시중 은행을 합쳐야 세계 23번째 은행의 덩지와 같다. 외형을 키우기 위해서는 합병 및 매수(M&A)가 활성화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저항감이 만만치 낳다. 또 자회사 방식이든 지주회사 방식이든, 한 지붕 아래 몇 개의 가정이 꾸려지는(겸업주의) 데서 오는 감독 체계의 혼선도 일찍이 경험치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금융 전업 기업군은 금융산업의 상실된 ‘기업성’을 부추기고 ‘공공성’도 잃지 않으려는 두 마리 토끼 잡기와 같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을 궁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일지 모른다.
張榮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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