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으로 그린 이방인의 일상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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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佛 화가 정경자씨 30여년 만의 귀국 개인전…“고국에서 평가받고 싶다”



프랑스 파리와 일본 오사카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온 화가 鄭京子씨(55)가 30여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개인전을 열고 있다. 4월7일~19일 서울 청담동 유나화랑(02-545-2151)에서 작품을 선보인 정씨는 일본과 프랑스에서 쌓아온 미술 작업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개한 셈이다. 작가는 “몇십 년을 그림에만 몰두하면서 살아왔다. 그 동안 해온 작업의 성과를 고국에서 평가받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는 91년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꾸몄다. 작품 소재는 주로 작가가 살던 일상의 공간과 연관된 것들이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골목과 꽃시장, 카페의 실내 풍경이 소재의 주류를 이룬다. 낯선 풍경이나 이미지를 끌어낸 것이 아니라 파리의 구석진 방에 들어박혀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아름다운 돔 양식의 성당, 성당을 오르는 비탈진 골목길, 길거리 카페와 오가며 보았던 시장 풍경 등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소박한 모습들이 그림에 들어온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생활이 매우 단순했던 작가에게 단순한 생활 그 자체가 또한 훌륭한 그림 소재가 되었던 셈이다.

동양적 섬세함과 서양적 형식주의 조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소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씨의 작품들은 우선 편안하다는 느낌을 준다. “추상도 구상도 아니고, 작가가 글을 쓰듯 마음 속의 영상을 따라가면서 색과 선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했다.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나 따뜻한 마음의 한 면이라도 화폭에 담는다면 나는 만족한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비구상적인 배경과 수묵화 기법의 반구상적인 표현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은 생동감이 있고 화사하다. 정씨의 작품 경향에 대해 미술 평론가 朴榮擇씨는 “새롭다거나 실험적이거나 개성적이라기보다는 밀도가 있고 색채와 평면적인 공간 구성에서 자신의 감각과 정서를 일관되게 끌어올리는 능란함이 힘이 되고 있다”라고 평했다.

프랑스 평론가로부터 ‘동양적인 섬세함과 서양적인 형식주의를 적절히 활용해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는 평을 들은 정씨는 국내에서는 이제서야 선을 보이지만 파리와 일본 화단에서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그가 파리 화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프랑스의 유명 미술그룹인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라는 사실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03년 창립된 이후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쳐온 살롱 도톤느는 해마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회원전을 열고 있는데, 정씨는 77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적을 가진 상임 회원 30명의 추천을 받아 전시 기간에 파리에 체류하는 회원들의 비밀 투표를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입회 절차를 통해 회원이 된 것은 지난 88년이었다.

파리와 오사카에 아틀리에를 두고 이방인 생활을 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출생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39년 경남 울산군 언양면에서 난 정씨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머니는 가난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3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큰 딸을 프랑스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50년대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에 탄원서를 내 입국 허가를 받은 뒤 작가는 일본여자미술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69년 나이 서른에 파리로 건너갔다.

“돈과 친구가 없어 오히려 좋았다. 그림 그리는 일밖에 할일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파리 생활은 궁핍했지만 굶지는 않았다. 예술을 사랑하는 파리 시민들이 센 강변에서 그린 수채화를 많이 사주었고, 카페 주인은 가난한 화가에게 빵과 커피를 그냥 주기도 했다. “외로운 시절을 버티어 낼 수 있게 해준 힘은 순전히 파리 시민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입으로만 예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사랑했다. 그들은 화가를 특별하게 대우했다.” 그의 이웃은 한 동네에 화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고 정씨의 개인전에 꼭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 위해 재단 설립
출신 대학과 수묵을 가르친 스승이 있는 일본에서는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갖기도 하고 아틀리에를 꾸며 1년에 넉달 정도 생활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우리 말을 또렷하게 구사하는 정씨가 화가로서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화단은 물론 그 어디에도 연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씨에게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이는 국민학교 동창생으로서 35년 만에 만나 3년 전 결혼한 李興祿 변호사이다. 결혼 이후 작가는 1년에 4개월은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는 눈을 부시게 했던 어릴 적의 산과 하늘, 그 빛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푸른 색과 붉은 색이 유달리 강하게 구사된다. 프랑시스 파랑이라는 프랑스 평론가는 “독특하게 구사되는 붉은 색깔은 고향의 진달래꽃 빛깔이다. 그의 최근작은 동양적인 개성미를 되찾아가고 있다”라고 평했다. 30여 년을 기다린 끝에 화가로서 고국에 첫 선을 보인 정경자씨는 지난해 어느 기업에 그림을 팔아 조성한 1억원으로 ‘정경자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비록 몸은 외국을 떠돌았지만 한국 국적을 끝내 버리지 않은 그가 자기처럼 가난한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만든 재단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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