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인권 카드’ 자충수 될 수 있다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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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벌목공 수용, 추진 방식에 문제점 많아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 벌목공을 수용하겠다고 한 것은 앞으로 대북정책이 지금까지와 아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김대통령은 4월13일 주돈식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서 러시아 동부 벌목장을 이탈해 한국으로 귀순하기를 원하는 북한 벌목공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방침을 발표함으로써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각 부처간에 되풀이해온 지루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4월15일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를 열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적법 절차를 거쳐 희망자 전원을 받아들이기로 ’방침을 정하고 관계부처 실무자들로 특별 대책반을 만들었다.

 이번 방침은 김대통령 특유의 ‘정면 돌파’가 대북 정책에 적용된 첫번째 사례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미·북 3단계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고수해온 특사교환 요구를 철회해야 할 형편에 처한 정부로서는 ‘북한의 버티기 전술에 굴복했다’라는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모면할 명분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이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바람에 4월15일 결정된 ‘특사 조건 철회’ 문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인권 카드는 대북용인 동시에 국내용이기도 하다.

 한편 청와대 방침이 발표된 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제 남북관계에서 ‘대화’라는 거품이 사라지게 됐다”라고 논평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정부의 대북 정책은 사실상 ‘북한 길들이기’를 기조로 하면서도 가능한 한 대화의 모양을 갖추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돈식 청와대 대변인이 배경 설명을 했듯이 북한이 대화를 끝내 거부함에 따라 ‘인내심이 소진된’ 정부는 이제 대화라는 외피를 벗어 던진 채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북 정책이 온건에서 강경으로 선회했다기보다는 원래의 강경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인권 카드 제기는 안보파의 득세와 대화파의 몰락을 예고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조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이번 조처가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을 거쳐 나온 것이어서 이를 추진하는 방식에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국경지역 한국인 신변 안전 고려 안돼
 첫째는,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주민 및 러시아의 북한 벌목공 그리고 이 지역 한국인들의 안전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지적은 국내외 몇몇 언론이 경쟁적으로 이들의 실태를 보도하면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 시장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최근 북한은 중국 정부에 정식으로 북한 주민 검색 강화와 체포시 즉시 송환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벌목장에서는 모든 벌목공에 대해 외출을 엄격히 금하기 시작했다. 벌목공 문제를 다루는 정부의 한 당국자도 “북한은 정무원 임업부 명의의 담화를 통해 ‘벌목 노동자 몇몇이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를 남조선의 납치로 인정하고 즉시 상응하는 단호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중국·러시아를 찾은 한국 기업인이나 관광객 · 유학생이 납치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사업 관계로 중국 동북지방을 정기적으로 찾는 한 기업인은 “이제 중·북한 접경지역 근처에서는 잠잘 생각을 말아야겠다”라고 말했다.

 또 이번 조처가 북한과 중국·러시아의 정치적 입장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론도 있다. 국회 외무통일위 소속 한 의원은 “북한 벌목공이나 탈출 주민들을 공개적으로 데려올 경우 북한이 이들을 송환하라고 강력히 요청하면 뭔가 반대급부를 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중국·러시아와 이미 공조협약을 맺은 상태이기 때문에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과 역량이 필요하다. 정부가 원칙만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와의 관계도 문제다. 러시아는 최근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8자 회담을 제안하는 등 한반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벌목공 문제는 러시아가 남북한 모두에게 큰 소리 칠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될 수 있다. 4월1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외무장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유엔의 난민 지정 절차 없이 바로 데려오기로 했다”고 말했지만 실현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회담이 끝난 뒤 모스크바방송은 ‘코지레프 외무장관은 (북한과의 벌목협정 연장) 문제를 국제 기구들의 참가 없이(러·북) 쌍방이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벌목공 문제를 러시아 국내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유엔이나 한국의 개입을 배제하여 협상의 카드로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러시아가 이 문제를 체불된 차관 상환 문제와 연계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사정이 더욱 어렵다. 정부는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주민 처리 문제와 관련해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을 통해 이들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도록 할 방침이지만, 중국 정부는 북한과 맺은 조약을 이유로 난민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박춘호 교수(고려대·법학)는 벌목공 문제와 관련해 최근 한 기고문에서 “우리는 복잡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일단 큰 목소리로 한 마디 하려는 폐습이 있다. 그래서 총론은 A학점, 각론은 C학점, 결론은 F학점으로 흐지부지 끝난다”라고 주장했다. 정부의 벌목공 대책은 몇 점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韓宗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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