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 재야, 시멘트 반죽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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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투사들 ‘새시대 광장’ 만들어 세력 정비 시동…‘야권 재편’ 신호탄 될지 관심



 서울 광화문 덕수궁 옆 세실 레스토랑은 제야 인사들에게는 추억이 깃든 곳이다. 재야 인사들은 대개 여기서 한두 번쯤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울분을 토로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정국의 흐름을 뒤바꿔놓을 만한 거사를 은밀하게 논의하곤 하던 곳도 여기이다. 재야 인사들이 과거에 즐겨 찾던 세실의 구석방에 지난 13일 민주당 개혁모임 소속 이부영 · 임채정 ·  제정구 의원과 재야의 이창복(전국연합 의장) 김근태(통일시대 국민회의 추진위원회 대표) 장기표(전 민중당 정책 위원장)씨가 모였다. 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제도 정치권과 재야로 뿔뿔이 흩어져 각개약 진해온 이들은 이 날 ‘새 시대 광장’이라는 토론 모임을 결성한다고 선언한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과거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분열과 좌절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선후배 동지들 앞에 깊이 사죄드린다”고 밝히고, 개혁과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정치 문화 창조를 위한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개혁을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역사 흐름,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개혁 작업은 정체와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고 오늘의 정치 상황은 진단했다.

 이들이 결성한 새 시대 광장은 그 형태가 조직적 구속력이 없는 토론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재야 모두에게 예사롭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재야의 정통성을 계승한 이들의 결합은 87년대선 이후 재야의 기나긴 방황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기대와 불신으로 엇갈려 있던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대한 재야의 평가도 정리돼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김근태 구상의 결실…결합까진 우여곡절
 이들은 한자리에 모이기까지 나름대로 많은 곡절을 겪었다. 이부영 최고위원의 경우,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민자당 김덕룡 의원 등과 수시로 접촉하며 정계 개편 가능성을 점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뒤 김덕룡 의원이 여권에서 힘을 잃고,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을 도와 준 수구세력의 일부를 싸안는 노선을 택하자 민주당 내에서 입지를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주류와 목소리를 합해 당 지도체제 개편을 위한 전당 대회 조기 소집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민주당내 개혁모임도 당시에는 민주당이 유일한 대안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당내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제동으로 조기 전당대회 요구가 무산됐고, 그 과정에서 개혁모임은 많은 내상을 입었다. 이부영 대망론을 주장하는 노무현 최고위원과 신중론을 편 임채정 의원 사이에 보이지 않는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번에 개혁모임의 중심 인물인 세 사람이 재야 인사들과 손을 맞잡은 것은 개혁모임 내의 균열을 봉합하는 의미가 있다. 또 민주당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지금까지의 개혁모임 노선을 전면 수정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부영 최고위원의 처지에서 보면 너무 당내 힘 겨루기에 빠지지 말고 시야를 넓히라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민주당 개혁모임 세 사람의 입장은 이번 새 시대 광장 결성을 계기로 정계 개편을 통해 여권에 합류하거나 당내 개혁을 통해 입지를 강화하기보다는 반독재 투쟁을 해온 옛날의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쪽으로 정리된 것 같다.

 장기표씨의 경우는 그 동안 끈질기게 민자당 입당설이 나돌았다. 장씨는 재야 명망가 중에서 끝까지 김대중 전 대표를 지지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정치권에 진입한다면 민주당으로 가기는 힘들고 민자당으로 갈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특히 장씨와 행보를 같이 해온 김문수씨가 민자당에 입당한 뒤에는 장씨의 민자당 입당을 기정 사실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씨의 민자당 입당을 장씨가 설득했고, 장씨도 곧 민자당에 입당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번에 새시대 광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같은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그는 이 모임을 결성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씨의 새 시대 광장 참여는 통상과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김영삼 정부의 잇단 실책으로 재야 일부에 남아 있던 YS 개혁에 대한 ’환상‘이 깨졌음을 뜻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새시대 광장은 김근태 구상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난 연말부터 새로운 정치 조직을 논의하는 전국모임을 만들고 ’분단 상황으로 인해 살찌는 부류를 제외한 범 민주 세력의 결집‘을 주장해 왔다. 당시에는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을 때여서 재야에서조차도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번에 새 시대 광장을 결성하여 작은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앞으로 김근태를 주시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 모임이 야권 통합의 징검다리가 될지, 신당으로 발돋움할지, 아니면 정계 개편을 통해 여권으로 흡수될지 지금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반독재 투쟁의 주력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文正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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